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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민가기행]  신시가지의 부촌 대원 vs 구시가지의 쪽방촌 대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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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210호] 2012.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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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가기행]신시가지의 부촌 대원 vs 구시가지의 쪽방촌 대잡원

베이징 대원과 대잡원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 한동수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  

▲ 베이징의 대원
베이징에서는 사합원과 후퉁을, 베이징 교외 산촌에서는 산지 사합원을 둘러봤습니다. 이들은 전통 시대의 살림집들입니다. 그러면 현대에 나타난 살림집은 어떨까요? 한옥에서 사는 사람이 적은 것처럼 베이징에서도 실제 사합원에 사는 사람은 적습니다. 실제 대부분의 살림집은 급격한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과 같은 시대 변화에 따라 변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특징적인 살림집을 찾아보겠습니다.
   
   
   무시디·중관춘 일대에 대원 형성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도시로서의 베이징에는 큰 변화가 몰아쳤습니다. 1949년 대륙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몰아낸 마오쩌둥(毛澤東)은 천안문(天安門) 문루에서 신중국(新中國)을 선포합니다. 수도 역시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환원됐습니다. 난징에 수도 자리를 내준 1928년부터 1949년까지 22년 동안 불리던 베이핑(北平)에서 베이징(北京)이란 위엄 있는 이름으로 복귀한 것입니다.
   
   신중국의 신베이징에는 새로운 권력과 함께 이주민이 급작스럽게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신중국의 신권력을 둘러싼 엘리트 계층이거나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려 베이징으로 흘러들어온 백성들이었지요. 베이징은 우선 권력을 쥐고 몰려든 이들에게 주거지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베이징 시내의 빈터에 숙사(宿舍)를 신축했습니다. 숙사는 소속 기관이나 회사, 학교가 소속원들에게 제공하는 살림집이지요. 1950년대 초반에는 시볜먼(西便門) 지역에 많이 지었습니다. 베이징 중심지역을 직사각형으로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의 서남쪽 코너 바로 바깥입니다. 국무원, 외교부, 문화부의 숙사가 들어섰답니다.
   
   이 지역은 곧 포화상태가 됐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직장과 주거를 일체화해 한 블록 안에 직장과 주택, 그에 필요한 공공시설과 편의시설까지 모두 몰아넣습니다. 마치 큰 도시 안에 작은 도시를 건설한 셈인데, 외진 곳에 군사 기지를 구축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이처럼 직장과 주택을 복합한 것을 대원(大院)이라고 합니다.
   
   원래 대원은 큰 저택의 마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대부호의 저택에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궁리(鞏)라는 유명한 중국 여배우가 등장하는 ‘홍등’이란 중국 영화에 나오는 주택이 바로 대원입니다. 지금도 중국 산시성(山西省)에 가면 이런 주택을 쉽게 볼 수 있고 이 연재 후반에 찾아갈 예정이기도 합니다.
   
   신중국 이후 등장한 베이징의 대원은 무시디(木地) 북쪽에서 중관춘(中關村)에 이르는 지역에 많이 들어섰다고 하더군요. 이 대원을 신축할 당시에는 썰렁한 교외의 벌판이었답니다. 널찍하게 터를 잡고 높은 담벼락을 둘러친 다음 그 안에 직장, 주택, 학교, 목욕탕, 병원, 우체국, 상점, 심지어 영화관과 파출소까지 설치한 것입니다. 도시로서의 편의시설은커녕 기반시설도 없던 곳에 다수의 이주민을 단기간에 수용하기에는 효율적 방편이었습니다. 물론 대원과 같이 직장과 주거가 큰 단위로 일체화된 것은 신중국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중국 성립 이후 베이징의 대원에 입주한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라오베이징(老北京)이 아니라 신베이징(新北京)이었고, 만주족이나 베이징 토박이가 아니라 마오쩌둥과 덩샤오핑과 같은 지방 출신들과 그들의 가족이었습니다. 베이징이라는 시급 행정단위나 회사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중앙으로서 공산당, 정부, 군의 상급기관들이나 대학, 연구소, 극단, 병원 등과 같은 국가 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이었지요. 오랜 세월 문화와 역사가 퇴적된 사합원과 후퉁의 라오베이징 백성이 아니라 신중국의 신베이징에서 신권력을 구성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곧 신중국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엘리트적 경파문화 형성
   
▲ 대잡원의 좁은 골목

   그들의 문화는 라오서(老舍)가 소설에서 묘사하던 경미문화(京味文化)가 아니라 신베이징의 엘리트 문화였습니다. 20세기 전반 베이징에는 서민적인 경미문화(京味文化)와, 엘리트적인 경파문화(京派文化)가 따로 있었습니다. 경파문화는 보수적이고 관방(官方)의 냄새가 나고 엄숙하고 점잖은 문화입니다. 해파문화(海派文化)라고 불리던 상하이의 발랄하고 자극적이며 소비적이고 서구적이던 상업문화를 경멸하고 질타하던 문예의 흐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20세기 후반 베이징의 엘리트 문화는 대원(大院)이라는 직장과 주거가 일체화된 폐쇄적 구조 속에서 권력자와 그 가족들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대원문화(大院文化)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원의 아이들은 ‘간부의 자녀’로서 학교와 가정에서 마주치는 요란한 정치적 구호 속에서 그들끼리 동년배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높은 지위 덕분에 국가 기밀문서를 보기도 하고 일반에는 금서로 되어있는 외국 철학서를 읽기도 했습니다. 이 간부의 자녀들이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의 주류를 형성했고 마오쩌둥에 열정적 충성을 바치면서 기존의 가치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문화대혁명 와중에 지식청년의 농촌 하방(下放)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변방의 오지로 들어가 ‘그들만의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그들이 홍위병이었을 때에는 권력의 꼭두각시로 극좌의 깃발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지만 하방의 경험을 쌓으며 새로운 세대로 자랐습니다.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자기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그들만의 지하세계에 슬금슬금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기존 권력에 반항하며 1976년 5월 4일의 1차 천안문사태를 일으켰고, 문화적으로는 자기들끼리 돌려보던 지하의 문학을 세상에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중국에서 ‘3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입니다. 1세대는 마오쩌둥과 같은 혁명세대이고, 2세대는 1세대들이 주도하는 혁명의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1세대의 기에 눌려 있던 세대였습니다. 3세대의 시대가 마무리되는 것은 1989년 6월 4일 천안문사태였습니다. 천안문사태를 통해 덩샤오핑에게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했으나 다시 한번 기득권의 장벽 앞에 좌절하게 되고 결국 많은 이들이 중국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중국 현대사의 깊은 곳에는 베이징의 대원이란 공간에서 성장한 세대와 그들의 문화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대학 내에 은행·파출소·자전거수리소
   
▲ (왼쪽부터)19세기 말 개혁가 강유위의 집 <사진1>. 청나라 사상가 담사동의 집<사진2>. 대문호 루쉰이 살았던 샤오싱회관<사진3>

   대원이란 공간에서 베이징의 문화와 역사, 곧 중국의 역사가 변화해 갔는데 지금도 대원과 같은 주거지역이 남아 있을까요? 대원은 건축이란 측면에서 콘크리트 담장을 높게 둘러치고, 도시공학적으로는 직장과 주택을 일체화한 폐쇄적 소도시를 건설한 것이고, 눈으로 보면 정복 차림의 보안원이 출입자들을 까다롭게 통제하는 곳입니다.
   
   대원은 개혁개방·경제성장과 함께 소리 없이 해체되어 갑니다. 숙사는 새로 지은 아파트로 분리되고 직장은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정부에서 개개인에게 배치해 주던 직장 시스템 역시 개인별 구직으로 바뀌면서 대원은 베이징의 엘리트 문화를 끌어가는 힘을 상실했습니다.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대원 가운데 소위 상급기관들의 대원은 출입통제를 하는 경우가 많아 외부인이 들어갈 기회는 별로 없습니다. 가장 보안이 철저한 대원은 과거에 마오쩌둥이 살았고 지금도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 최고 권력자들이 사는 중남해(中南海)<지도 1>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 국무원과 공산당의 서기처와 사무처(辦公廳) 등 중요 국가기관이 들어있고 천안문과 자금성 서쪽에 높은 담장을 두르고 있는 그곳입니다.
   
   베이징에서 대원의 성격을 가장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은 바로 대학교입니다. 대학교는 우리와는 달리 학생과 교직원이 전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시스템으로 돼 있습니다. 일례로 베이징 이공대학<지도 2>을 보면 강의동과 체육시설은 물론이고 기숙사뿐 아니라 교직원의 아파트 단지도 있고 은행, 파출소, 우체국, 수영장은 물론 공원도 있습니다. 우리 관념으로는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래시장에 슈퍼마켓, 각종 상점에서 구멍가게, 심지어 노점상에서 자전거수리소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오후가 되면 큰 나무가 있는 그늘 좋은 곳에는 노인네들이 유모차를 밀고 산보 나온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교직원 가족들이 대학 구내에서 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사합원 안의 쪽방, 대잡원
   
   엘리트 계층을 위한 주택이 부족해서 대원이란 독특한 대형 주거지가 생겼는데, 백성들의 살림집은 이 시기에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백성들의 집도 새로 짓기는 했지만, 인구 수를 따르지 못하고 기존의 집들을 조각조각 나눠 쓰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사합원에서 방 한 개나 두 개를 한 가구에 배당해서 여러 가구가 같이 살게 하거나, 사합원 안의 여유 공간에 빼곡하게 쪽방들을 만들어 넣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잡원(雜院) 또는 대잡원(大雜院)이라고 합니다. 이 대잡원은 전통적 사합원의 풍격(風格)이나 관념, 사상 따위와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오직 넘쳐나는 인구를 수용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지요.
   
   대잡원의 생활환경은 열악했습니다. 집 하나에 여러 가구가, 방 하나에 여러 식구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골목마다 수용 한계를 넘어선 인구로 인해 공중 변소와 쓰레기장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넘쳤습니다. 벽돌로 지은 쪽방은 여름에는 더위를 참기 힘들었지요. 훗날 도심을 재개발하려고 해도 좁은 집에 많은 가구가 들어서서 사는 바람에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대잡원이 넘쳐나던 베이징 구시가지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로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블록별로 깡그리 철거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철거한 것은 대잡원이지만 그것은 사합원이었고 그래서 사합원과 후퉁이 사라져간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도 천안문광장의 남쪽에는 이런 대잡원이 일부 남아있어 20세기 베이징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 1>은 19세기 말 개혁가였던 강유위(康有爲), <사진 2>는 담사동(譚嗣同)이 살던 집이고, <사진 3>은 샤오싱회관(紹興會館)입니다. 사합원 입구에 설치된 문둔(門墩)은 그나마 옛것들이 좀 남아 있습니다. 문이 만들어내는 통로를 문도(門道)라고 하는데, 문도의 벽면<사진 4>에는 이 안에 몇 가구가 사는지 바로 표시가 되네요. 두꺼비집이 8개면 8가구가 사는 것입니다. 대잡원에 대(大)와 잡(雜)자를 쓰는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 (왼쪽부터)문도에 붙어 있는 두꺼비집<사진4>.중남해 <지도1>.베이징 이공대학 <지도2>

   좁은 골목들은 사실은 사합원 안에 형성된 좁은 통로입니다. 빨간 벽돌로 벽을 쌓고 시멘트로 발라버린 쪽방들. 그래도 문틀은 최근에 다시 낀 것도 있습니다. 일부는 철문으로 통로를 막았네요.
   
   좁은 통로에서 어찌 살까 싶지만 허름한 이발소도 아직 영업 중이고 구석구석 빨래가 널린 것을 보면 그들이 내일의 꿈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빨래란 것은 어제의 땀과 먼지를 씻어내면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소박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상의 상징이지요.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서 지붕을 내려다보면 마구잡이로 엉켜 붙은 모양입니다.
   
   
   대잡원·후퉁의 변신
   
   그러나 이렇게 낙후된 생활환경은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에 힘입어 새로 단장되고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이미 깨끗하게 철거돼 공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철거를 기다리는 골목들도 즐비합니다. 벽에 흰 페인트로 쓴 ‘척(坼)’은 ‘철거한다’는 뜻이지요. 부서진 지붕 귀퉁이에는 주인이 버리고 떠났는지, 주인보다는 자기 영역이 더 중요했는지, 주인 없는 고양이들이 햇볕을 쬐고 있고, 앉은뱅이의자에 앉은 노인네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먹먹한 철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철거민이 힘들기는 베이징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급증하는 베이징의 인구를 수용해 왔던 대잡원 철거는 오늘날 대잡원과 후퉁이 겪고 있는 21세기의 변신입니다. 과연 이들 사합원과 후퉁, 대잡원은 어떻게 변할까요. 서울을 비롯한 우리의 도시들이 겪어온 변화와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장의 생활편의를 위해서는 값싼 콘크리트가 효율적이지만 막상 그렇게 고쳐놓고는 문화와 역사가 없는 메마른 콘크리트 속에서 살게 된 것을 후회하는 일이 반복되겠지요. 집에는 역사와 문화가 환경, 사람과 어울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원과 대잡원이 20세기 후반 베이징의 독특한 살림집이었다면 21세기에 새로 지어진 그들의 아파트는 어떨까요. 그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한 현대의 서민은 어디서 살까요. 다음 편에서 아파트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베이징의 도시 역사를 조금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싶으면 ‘베이징 vs 상하이 - 중국의 두 얼굴’(양둥핑楊東平 지음·장영권 옮김·펜타그램·2008)을 펼쳐보는 것도 훌륭한 여행이 될 것 같아 추천해 드립니다.


   
윤태옥
   
   1960년생. 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 방송위원회 비서실장, m.net 편성국장, 팍스넷 부사장, 팍스인슈 대표 역임. 현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제작사 와이더스케이프 대표.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 ‘삼국지 기행’ ‘북방 대기행’ ‘동티벳 다큐’ 기획, 제작. 주간조선에 ‘중국 음식기행’ 연재. 중국 여행기인 ‘왕초일기’ 블로그에 연재. 2006년 이후 총 70여회 중국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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