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이하다. 1980년대 후반 영국 언론에는 스파이 영화 제목 같은 기사들이 잇달아 실려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과학자들의 의심스러운 죽음(Scientists’Suspicious Deaths)’ ‘스타워즈 과학자 죽음(Star Wars Scientist Deaths)’ ‘제너럴 일렉트릭 마르코니 과학자 죽음(GEC-Marconi Scientist Deaths)’ 같은 제하의 기사였다. 얼핏 제목만 봐도 무슨 스릴러 스파이 영화에나 등장할 만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실제 영국인들에게는 지금도 으스스한 기
영국은 어찌 보면 칼로 만들어진 국가이고 칼로 국가를 이어왔다. 글을 읽던 문인들이 국정을 주관하고 통치했던 조선과 중국과는 다르다. 영국만이 아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도 무인들이 이끌던 나라였다.그런 영국 역사에서 ‘국가 운명을 구한’ 3명의 최고 명장이 있다. 연대별로 보면 1704년 8월 13일 독일의 블레넘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말보로 공작 존 처칠(1650~1722), 1805년 10월 21일 지중해 입구 트라팔가 곶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해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자작 호레이쇼 넬슨(1758~1805), 1815년
역사에 ‘만약’이라는 전제를 대입시키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만일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을 규탄하는 유엔 결의문 제82호를 채택할 때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참석해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안보리 결의문 제82호가 채택되지 않았더라도 과연 한국을 구하러 유엔군이 파견되었을까? 이런 가설은 우리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엔군이 파견되었기에 대한민국이 북한에 ‘먹히지’ 않았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그러나 당시 미국과 영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가 없었더라도 참전
750만 재외동포의 오랜 숙원인 재외동포청이 드디어 오는 6월 출범한다. 본청은 인천에 두고 서울 광화문에 지원센터가 차려진다고 한다. 축하와 함께 모국의 배려에 재외동포의 일원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번 기회에 재외동포청의 존재 이유와 거기에 따른 몇 가지 건의를 하고자 한다.앞으로 재외동포청은 150~200명의 직원이 작년 재외동포 관련 예산(630억원)의 2배 가까운 1000억원 정도의 예산으로 재외동포와 모국의 ‘원스톱 중간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라고 한다. 문제가 터지면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지 모르던 동포사회로서는 안
내년 4월 치러질 제22대 총선을 1년 앞둔 요즘 한국 정계는 갑자기 국회의원 정수 논의가 한창이다. 줄이자는 의견이 대세인 듯하나, 필자는 오랫동안 영국 정치를 발치에서 지켜본 경험상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지 말자는 입장이다. 오히려 300명의 정수를 한국 인구에 맞추어 550명으로 대폭 늘리자는 건의를 감히 하고자 한다.우선 한국, 영국,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의 인구를 국회의원(하원의원) 정수로 나누어 의원 한 명이 국민 몇 명을 대표하는지 살펴보자. 한국 인구 5155만명을 국회의원 300명으로 나누면 의원 한 명이 국민
지금 영국에서는 ‘황금 보주 작전(Operation Golden Orb)’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 작전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승하로 영국의 대권을 이어받는 찰스3세의 대관식 준비 작업을 이르는 이름이다. 대관식은 오는 5월 6일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된다.이번 찰스3세 대관식은 시대 변화에 맞추어 전통적인 대관식은 물론 바로 직전 군주인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1953년 대관식과도 많이 다르다. 우선 대관식 시간이 살인적인 3시간에서 1시간으로 줄어든다. 초청객 수도 직전 8251명의 4분의1에 불과한 2000 여명 수준이다.
최근 친지들로부터 “영국인과 유럽인들은 전쟁이 터지면 참전을 피하기는커녕 되레 왜 자원입대하려고 안달을 하느냐”는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넷플릭스 개봉작 ‘서부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 Front·감독 에트바르트 베르거)를 보고 하는 질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담은 이 영화는 1930년, 1979년에 이어 2022년에 다시 제작돼 현재 미국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로도 올라 있다.사실 위의 질문은 필자도 ‘서부전선 이상 없다’뿐만 아니라 영국과 유럽 전쟁영화들을 보면서 자주 궁금해 하던 것이
영국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학교는 분명 중요하지만 일반 영국인에게는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73.7%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 진학을 하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 고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24%밖에 되지 않아서다. 그나마 1960년의 4%에 비하면 무려 6배나 늘어난 것이 그렇다. 지금도 영국 고교 졸업생 4명 중 1명만 대학교를 가고 나머지 4분의3은 바로 취업을 한다. 그만큼 대학을 안 가도 만족할 만한 직업이 많다는 말이다. 대학에서 취득하는 지식을 필요로 하는 직장이 별로 인기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명예를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타인은 있지도 않다고 여기는데 자신은 있다고 강하게 믿은 명예 때문에 감정과 금전을 심하게 소비해서 인생을 망친 경우를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나 많이 본다. 바로 이런 사례가 영국 미술계에서도 있었다. 영국 미술계뿐만 아니라 영국 역사에서도 가장 흥미로우나 가장 허망하게 끝난 명예훼손 소송이다. 바로 미국에서 온 화가 제임스 휘슬러와 영국의 저명한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 사이에서 벌어진 소송이다. 러스킨을 격분하게 만든 그림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1877년 러스킨은 당시 새로 문을 연 런던의
유럽에서 가장 멋을 부리는 남자들로는 이탈리아 남자가 제일 먼저 꼽힌다. 그다음이 프랑스 남자들이다. 그래서 보통 영국 남자들은 멋과는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영국 남자들도 은근히 멋을 부린다. 단지 이탈리아나 프랑스 남자들처럼 노골적으로 멋을 부리지 않을 뿐이다.영국 남자들한테는 멋을 부리되 그러지 않은 듯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정장 복장을 할 때 그렇다. 이 점이 드러나도록 신경써서 옷을 입는다. 영국인들의 특성처럼 눈에 띄지 않게 멋을 부려야 제대로 된 ‘영국신사’ 반열에 들어가는 셈이다. 왜 멋을 더 부
필자의 삶에서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은 별로 없지만 지금은 러시아라고 불리는 소련과 관련해 몇 개의 ‘최초’ 기록을 갖고 있다. ‘한국 최초의 상사 주재원’ ‘한국 여권으로 받은 최초의 소련 복수 비자’ ‘한·소 최초의 합작회사 법인장’ 등이다. 필자가 이런 타이틀을 달고 모스크바에 주재할 무렵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를 막 시작했었다. 한국과의 수교는 그러고도 수년 뒤인 1990년 2월에야 ‘영사처’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처음 이루어졌다. 당시 최초의 상사 주재원 타이틀을
찰스(74) 왕세자가 공식적으로 53년이란 오랜 기다림 끝에 대권을 물려받아 찰스3세 왕이 되었다. 영국 언론은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서거 기사를 올리면서 바로 ‘찰스3세 왕’이라는 단어를 썼다. 왕정 국가에서는 군주의 공백이 잠시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보는 듯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를 두고 인터넷에서는 미국 유명 래퍼 에미넴(Eminem)의 랩 ‘왕은 절대 죽지 않는다(King Never Die)’가 새삼 거론되기도 했다.찰스가 왕이 되면서 연인인 카밀라(75)는 자연스럽게 ‘세기의 불륜녀’에서 ‘왕의 배우자 왕비(Que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현재 한국 언론에서 연일 다루고 있는 ‘외교적 홀대’ ‘외교 참사’, 거기서 더 나아가 ‘국격(國格)’ 논쟁 같은 것들을 영국 언론에서는 본 적이 없다. ‘국격’이란 단어를 네이버 영어사전에 넣어 봤더니 ‘national dignity’ ‘national status’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러나 이 용어들을 구글링해 보면 영국 매체 어디서고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 ‘national prestige(국위)’로 찾아봤지만 우리가 쓰는 용어인 국격에 해당하는 글들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영국은 오랫동안 자기
세기의 장례식이 끝났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은 ‘60년을 준비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러졌다. 지난 9월 19일 아침 11시 왕실 직할 성당인 런던 웨스터민스터사원에서 시작해 런던의 관문 히드로공항 근처 여왕의 주말 거처인 윈저성에서 계획대로 오후 4시30분 끝이 났다. 500여명의 해외 국가 정상 조문객들과 국내 주요인사 2000여명의 의전을 기계처럼 해낸 영국 정부의 저력은 칭찬받을 만했다.12일간의 국장 기간 동안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언론들이 수많은 여왕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그런
이제 막 시작된 영국의 새 왕 찰스 3세의 시대를 신임 총리 리즈 트러스는 ‘우리들의 새 캐롤린 시대(our new Carolean age)’라고 명명했다. 그러면서 찰스 3세에 대한 충성(loyal service)을 약속했다. 캐롤린 시대의 ‘캐롤린’은 찰스의 라틴어 어원. 튜더, 스튜어트, 조지안, 빅토리안, 에드워디안, 하우스 오브 윈저 왕조로 이어져 내려오는 영국 역사가 새 시대를 열었다는 맥락이다.하지만 트러스 총리는 찰스 3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는 칭송도 잊지 않
어느 국가, 어느 민족이든 한두 명의 ‘국민가수’는 갖고 있다. 이런 가수들은 조건이 있다. 우선 활동하면서 모든 연령대와 성별에 걸쳐 인기가 있어야 한다. 또 사후에도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랑받아야 한다. 영국에는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한 명의 명실상부한 국민가수가 있다. 바로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1912~1953)다. 페리어는 올해로 탄생 110주년, 영면한 지 69년을 맞는다. 하지만 아직도 영국인의 사랑을 받으며 음반이 꾸준히 발간되고 팔리는 ‘현역’ 가수이다. 탄생 110주년임에도 ‘현역’ 가수인 이
얼마전 런던에서 출발해 ‘혀’라는 이상한 이름을 지닌 영국 최북단 해변마을 ‘텅(Tongue)’을 돌아오는 긴 여정을 소화했다. 차로 7박8일간 달린 1970 마일(3152㎞)의 길은 필자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행 코스 중 하나이다. 당초 이번 여행에서는 스코틀랜드 북부지방인 하이랜드(Highland)와 하이랜드 서부 해안의 연륙섬인 스카이(Skye)섬이 주 목적지였다. 하지만 거기에다 욕심을 좀 더 내서 호수지방(Lake District)과 하워스(Haworth)가 속한 요크셔 지방도 더했으니 가히 영국 전역을 7박8일에 섭
한 나라를 전적으로 움직이는 특정 대학, 특정 학과가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대답은 ‘영국에는 있다’이다. 옥스퍼드대학교의 ‘철학·정치·경제 융합전공(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과목이 그렇다. 이 학과는 영국을 이끌어간 전·현직 총리를 비롯해 온갖 사회지도층의 산실이다. 현재 진행 중인 집권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보수당 소속 하원의원들에 의해 최종 후보로 선정된 리즈 트러스(47) 현 외무장관과 리시 수낙(42) 전 재무장관 모두 이 PPE 학위 소지자들이다. 둘 중 누가 총리가 되든
영국인들은 2008년 보리스 존슨의 런던 시장 취임 이후 매일 어떤 식으로든 그의 덥수룩한 금발을 보지 않고는 하루를 지날 수가 없었다. 그가 언론에 등장하지 않으면 모두들 궁금해할 정도였다. 그만큼 존슨 총리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영국 정치 역사상 희대의 풍운아이다. 그런 그가 연이은 정치 스캔들 끝에 결국 측근 반란으로 지난 7월 5일 사임을 발표했다. 배반과 음모와 권력투쟁 사태로 이어진 추락의 과정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맥베스’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존슨의 몰락은 지난 6월 7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보수당 소속 일부
영국에서 새로운 형태의 주거 방식인 코리빙(coliving)과 코하우징(cohousing)이 인기를 끌고 있다. 영국 전역에 있는 9000여개의 코리빙마다 긴 대기자 명단을 갖고 있어 입주하려면 상당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특히 코리빙 주민의 거의 4분의1이 노령층으로, 노인들이 이 새로운 형태의 주거 방식에 열광하고 있다. 영국 전역에 19개의 단지가 있는 코하우징도 60여개가 새로 건설되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코리빙은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코하우징은 한 주택 단지 안에 여러 가구가 사는 형태이다. 이 두 주거 방식이 기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