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연금 폐지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2030 청년들이 많다. 여론조사를 할 때 왜 ‘연금 폐지’를 원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안 물어보나.”(손영광 바른청년연합 대표)
2030세대가 많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국민연금을 두고 ‘폰지사기다’ ‘하루빨리 국민연금 의무가입을 중단해야 한다’ ‘국민연금 그냥 안 내고 안 받고 싶다’ 등의 댓글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연금 개혁 관련 여론조사에선 ‘소득보장론’과 ‘재정안정론’만이 선택지가 됐다. 만약 여기에 ‘연금폐지론’이 더해진다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질까.
‘연금개혁청년행동’이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해 지난 10월 7~8일 만 18세 이상 국민 1001명을 대상으로 ‘적자 구조의 국민연금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물은 결과 청년 10명 중 3명이 국민연금을 폐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연령대별로 만 18세~20대의 29.4%, 30대의 29.0%, 40대의 31.8%가 국민연금 폐지를 주장했다. 50대(17.1%), 60대(6.7%), 70세 이상(10.5%)과 비교할 때 큰 차이다.
연금개혁청년행동은 바른청년연합, 자유시민교육, 한국청년입법연구회 등의 청년단체들이 연금개혁에 대한 MZ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지난 10월 초 만든 단체다. 지난 10월 22일 연금개혁청년행동은 박수영 의원실과 함께 ‘MZ세대가 생각하는 국가 미래를 위한 연금개혁 방향’ 토론회를 열었다. 22대 국회 들어 연금개혁 당사자인 청년들이 관련 단체를 조직하고 목소리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금 목소리 내기 시작한 청년단체들
연금개혁청년행동이 토론회에서 공개한 2차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젊은 세대일수록 연금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했다. “현재 국민연금 구조가 자녀 세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우는 ‘다단계 사기’ 혹은 ‘폰지사기’ 같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만 18세~20대 중 63.2%, 30대는 59.2%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위 여론조사는 앞선 1차 여론조사에 이어 지난 10월 18~19일 만 18세 이상 국민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것이다.
2차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만 18세~20대에서 연금폐지에 대한 찬성(45.7%) 답변이 반대(40%)보다 높았다. 30대에서도 48.3%가 찬성하고 45.6%가 반대했다. 40대 이상에서는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보다 높은 것과 대조적이다. 국민연금이 폐지됐으면 좋겠다는 민동환(26) 자유시민교육 연구원은 “내가 열심히 벌어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게 맞다”며 “부모님 부양도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 연구원처럼 연금폐지를 원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손영광(32) 대표는 “연금폐지론은 극단적인 재정안정론 중 하나”라며 “연금폐지는 소득 보장을 안 하겠다는 것이고, 걷지도 나눠주지도 않아 재정 적자가 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수영 국민의힘 연금특위 위원장은 “청년들 사이에서 국민연금 폐지 주장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국민연금 적자는 하루에 1480억원씩 불어나니 ‘내가 왜 내야 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폐지 목소리는 청년층의 국민연금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완전적립식 전환도 고려해봄직”
2030세대에선 ‘낸 만큼만 받는 것이 상식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AI 개발자 이충현(26)씨는 “보험요율은 현행 9%로 동결하고 소득대체율을 20% 내외까지 점진적으로 하향 조정해 낸 만큼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안정적인 노후를 위한 강제 저축의 의미만 남기자는 것”이라고 했다.
김상종(34) 자유시민교육 대표도 “보험요율은 수지 균형을 달성할 때까지 점진적으로 상향 조정하고, 소득대체율은 삭감해야 한다”며 “내가 냈던 보험료를 내가 연금으로 돌려받는 ‘완전적립식’으로 전환하는 방식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5차 국민연금 재정 추계에 따르면 소득대체율 40%를 유지하기 위한 수지 균형 보험요율은 19.8%다.
2004년 일본이 성공적인 연금개혁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연금제도를 그대로 방치하면 100년 뒤에 지급할 돈이 480조엔(약 4330조원) 부족하다’고 밝혔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2022년에 발표된 1735조원(국민연금연구원)과 지난해 나온 1825조원(연금연구회) 외에 미적립부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발표가 없다.
미적립부채는 연금충당부채(미래에 지급해야 하는 확정된 부채의 현재 가치)에서 적립기금을 뺀 금액이다. 앞선 2차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4%가 국민연금의 미적립부채가 약 1800조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재정안정론에 대한 찬성(58.3%) 여론이 반대(20%)보다 높았고, 소득보장론에 대한 찬성(25%) 답변은 반대(57.4%)보다 낮았다.
연금개혁청년행동은 “국민연금의 재정 상황을 알려준 뒤에는 재정안정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소득보장론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며 “공론화위는 부채 수준은 숨기고 고갈 시점만 알려줘 시민대표단을 현혹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제시된 소득보장안(보험요율 13%, 소득대체율 50%)의 기금 고갈 시점은 2061년, 재정안정안(보험요율 12%, 소득대체율 40%)은 2062년으로 1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4월 복지부가 발표한 ‘공론화 의제 대안 재정추계’ 결과에 따르면 소득보장안의 기금 소진 이후 미래 세대가 부담해야 할 필요보험요율은 43.2%(2078년 기준)이고, 2093년 누적 수지 적자는 현행 대비 1004조원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정안정안의 경우 필요보험요율은 35.1%이며 누적 수지 적자 규모는 현행 대비 4598조원 줄어든다.
회계사인 김상종 대표는 “국민연금 재무상태 알리미를 법제화해야 한다”며 “적자와 부채 규모, 부채 상환 계획 등을 국민연금 가입자와 수급자에게 정기적으로 공지해 국민들이 재정 상태를 파악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노한 청년들… 헌법소원까지?
연금개혁청년행동은 국민연금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도 검토하고 있다. 지난 9월 정부의 연금개혁안이 나왔지만 관련 논의는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 손영광 대표는 “현행 국민연금 제도에선 청년층 이하는 다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며 “이 구도가 이어져 특정 사람들에게만 어마어마한 빚을 지우는 현상은 위헌적”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1999년 국민연금 강제 가입·징수와 관련한 헌법 소원이 제기됐지만 헌법재판소는 2001년 “위헌으로 볼 수 없다”며 청구를 기각한 바 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청년들이 연합해서 연금 관련 단체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며 “청년들은 소득보장안이 말도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최소한 낸 만큼이라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