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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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 속, 고아 200명을 줄지어 세운 뒤 한강을 건너 보금자리로 인도한 19살 청년이 있었다면 믿겠는가. 그 이야기를 묻자 선생은 소년처럼 웃었다. 1951년, 곧 73년 전의 일을 어제인양 떠올리던 장홍기(93) 선생은 6·25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의 터전이었던 서울 용산 삼각지 ‘경천애인사 아동원’의 창설 멤버로 이곳에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미국에서 2차대전과 한국전의 ‘영웅’ 대접을 받는 한국계 미군 김영옥 대령이 이곳을 남몰래 도왔던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은 곳이다.

그는 38선 이북의 강원도 철원에 살다 개전 이후 미군의 도움으로 한탄강을 건너 서울로 왔다. 이후 수습기자로 일하던 기독교신문사의 사장이었던 장시화 목사가 아동원을 창설하자, 서울에 흩어져 있던 전쟁고아들을 아동원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전쟁 후에는 공무원으로 봉직, 철원읍장까지 지내고 은퇴한 후 고향 철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얼마 전 ‘철원사람 장홍기의 옛이야기’라는 회고록을 낸 그를 찾았다. 아이들 수백 명을 데리고 한강을 건넌,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에서 누구보다 사랑받는 교사였던 그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그의 아들인 장혁 국방대학교 석좌교수(전 청와대 국방비서관)는 기자의 연락을 받고 “고령인 탓에 요즘 인터뷰 요청을 마다하고 계신다”고 귀띔했다. 기자는 공연한 걱정에 다음과 같은 청을 전해달라고 했다. “전쟁과 평화는 보통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요즘처럼 불안한 시국일수록 휴머니즘과 인간애의 이야기를 찾아 퍼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철원서도 고아들 돌보다 서울로 피란

장홍기 선생이 전쟁의 화를 피해 고향 철원을 등지면서 이야기가 열린다. 철원은 국군과 인민군의 격전지였다. 1950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전쟁이 터졌다. 선생은 인민군의 징집을 피해 숨어 다니다가 철원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자 다음해 목숨을 걸고 한탄강을 건넌다.

재미있는 것은 선생이 경천애인사 아동원을 창설하기 전, 철원에서 이미 고아들을 돌본 이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철원이 수복되자 총기를 지급받아 치안대로 활동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던 그는 철원제일감리교회에서 일하며 살다시피 했다. 하루는 주둔한 국군 연대장이 찾아와 “인근에 고아원이 있는데, 남자들이 죄다 도망갔으니 교회에서 맡아달라”며 “군에서 잠깐은 봐 줬지만 북진을 해야 하니 더는 그럴 수 없다”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과 가보니 100명이 될까 말까. 그런데 당장 식량이 없잖아.” 가보니 정말로 고아들이 옛 향교 건물에 모여 있었다. 공산 치하 고아원의 관리 책임자라는 ‘빨치산’(빨치산 출신이라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그는 곧장 치안대로 돌아가 총을 반납한 후 고아원부터 챙기기로 했다. 철원 시내 창고에 버려진 좁쌀을 걷어와 아이들을 먹이고, 땔감을 해와 겨울을 준비하며 아이들과 돈독한 정을 쌓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났을까, 당시 열여덟에 불과했던 장 선생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사건이 벌어진다. “향교 건물이라 마당도 있고, 그 앞에는 밭도 있고 큰 산도 있었어요. 아이들이 뛰어놀고 했었지. 그런데 UN군 비행기가 들어온 거요. (숨죽인 마을에)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으니 수상했던 모양이야….”

비행기는 고아원을 향해 기총사격을 하고 사라졌다. 당시 ‘빨치산’이 돌아왔다는 소문에 대들보로 올라가 숨어있던 선생은 빨치산이고 뭐고 따질 새도 없이 총소리를 듣자마자 뛰어내렸다고 한다. 선생은 “애 둘이 하나는 여기(허벅지), 하나는 여기(옆구리)를 맞았다”고 회상했다. 대여섯 살 되는 남녀 아이 둘이 총을 맞아 출혈이 심했다. 아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처치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는 약이 있어 뭐가 있어. 소금물에다가 소독을 하고, 그러다가 그만 그날을 못 넘기고.” 옆구리를 맞은 여자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이내 멈춰버렸다. 허벅지를 맞은 남자아이도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숨졌다. 선생도, 밖에 있던 아이들도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초겨울 얼어붙은 앞산에 땅을 억지로 팠다. 평온한 표정의 두 아이를 합장했다.

인민군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지자 그는 그날 밤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선생은 정이 든 아이들을 또다시 울려버렸다. “떠날 적에 아이들이 울고 나를 붙들고 야단을 했었지. 약속은 했어, 내가 꼭 온다고. 그래놓고서 못 갔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네.”

선생은 이후 미군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탈출했다. 마을 장정 10여명과 목숨을 걸고 한탄강을 건너자, 미 군용차를 탈 수 있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던 날 아버지가 폭격을 맞아 돌아가셨고, 그와 떨어져 서울로 먼저 출발했던 어머니와 가족들은 천호동의 피란민 연락소에서 만났다. 선생은 “미군은 철원 피란민들을 천호동은 물론 경기도 수원 등에 풀어놓았다”고 회상했다. “연락소에 물어 찾아가 보니 식구들이 어느 벽돌 공장 가마에서 지내고 있더군. 그래도 (거처가) 지붕이 있고 튼튼하니, 그래도 그게 제일 사정이 나았던 거지.”

 

장시화 목사와 함께 일군 ‘경천애인사’ 

가족들을 만났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선생은 종로통을 헤매다 ‘기독교신문사 전방지국’이란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간다. “기독교 신자인데 무슨 일이든 시켜달라, 좀 먹여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자기는 권한이 없고 사장님이 오시면 말씀드리라더군.” 쌓인 신문을 뒤적이던 그는 발행인이자 사장인 ‘장시화’란 이름을 찾아낸다. 그 역시 철원 출신의 목사이자 소설가로, ‘촌(村)’이란 소설로 유명했다. 선생 역시 어릴 적부터 마음 깊이 존경하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사무실로 들어선 장시화 목사는 그날로 그를 신문사에 취직시키고, 곧 수습기자 직함을 주어 업무를 맡겼다.

두 달쯤 지났을까, 장시화 목사는 신문사에 자주 드나들던 미국인 선교사 앤더슨씨와 나눈 얘기를 들려줬다고 했다. “고아원을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는 거요. 먹을 것은 미군 부대에서 동냥이라도 해서 책임을 지자고 하고.” 당시 천호동에 널려 있는 것이 전쟁고아들이었다. 그는 얼른 그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그런데 건물을 찾아야 하잖아. 그래서 서울을 며칠 빙빙 돌다 찾은 것이 삼각지의 한 병원 자리요. 그 위로는 일본식 사찰이 있었고. 병원은 입원실도 많고 절에도 공간이 충분했어요.” 장소가 결정되자마자 ‘경천애인사 아동원’이란 원명을 지었다. 당초엔 ‘고아원’이라고 했지만, 고향을 떠난 아이들이라면 부모가 있어도 받기로 했기에 ‘아동원’이라고 지었다. 사흘간 신문사 직원들과 함께 마당의 잡초를 제거하고 건물을 청소했다. 미군 트럭으로 구호물자도 실어왔다.

선생은 기자증이 있어 미군이 지키는 한강을 홀로 건널 수 있었다. 한강을 건너 곧장 천호동을 찾았다. 한탄강을 한 번, 한강을 또 한 번 건너야 했던 동향 사람들 수백 명이 흩어져 사는 곳이었다. 그 앞에서 선생이 외쳤다. “나는 철원읍 원시당 시계점의 둘째고, 형은 철원극장서 배우를 했습니다. 삼각지에 아동원을 만들고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이나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을 돌봐주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선생의 동생들을 포함해 아이들 200명이 모였다.

이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일만 남았다. 아이들을 4열 종대로 세우고 40명을 1개 조로 편성했다. 듬직한 아이들은 각 조의 앞뒤로 세워 동생들을 지키도록 했다. “참 나도 생각이 없었지. 어른들이 애써서 보내준 자식들을 대책도 없이 걸어서 데리고 갔으니까.” 열아홉에 불과했던 선생은 출발하자마자 당혹했다. 그래도 가야 했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광나루 초소에 닿으니 선생보다 더 아연한 것은 미군 병사들이었다. 이때 일어난 기적적인 에피소드를 선생의 육성 그대로 옮긴다.

“그때 배워놓은 말이 있었어. 오퍼니스(orphanage), 고아들이라는 뜻이야. ‘우리는 삼각지로 간다, 거기 큰 아동원이 있어서…’ 손짓발짓 해가면서 설명을 하니 미군 하나가 전화를 하더군. 조금 기다리니 지프차가 와서 통역관이 내려요. 그랬더니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야, ‘어린애들을 갖다가 걷게 한다는 거요?’ 그러더니 초소에 들어가서 전화통을 한참 돌리는데 지프차(선생이 ‘트럭’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두 대가 왔어. 미군 지프차가… 그걸로도 안 돼서 또 오고. 그래서 총 다섯 대인가 해서 탔어. 그렇게 삼각지까지 온 거야. 하나님이 도와주신 거지.”

이번에도 울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선생을 미군들도 연신 손을 잡거나 안아주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동원은 고아들을 먹이고 재울 뿐 아니라 학교까지 보내주었다. 부인 김정옥(89) 여사도 그래서 아동원에 와서 생활했다. 여사는 장홍기 선생과 철원 동향으로, 어릴 적부터 친밀한 사이였다. 김 여사는 뒤늦게 아동원에 합류했다. “우리 식구는 큰언니가 병원에 취직해 먹는 걱정은 없었어요. 그런데 학교를 가고 싶었지. 아동원에 가면 학교를 보내준다고 했거든. 그래서 신광여중, 중앙여고를 다녔어요.” 선생을 비롯한 아동원 교사들은 대부분 철원의 같은 교회 출신이었다. 한마음으로 고아들을 위한 대책을 짜내려 머리를 모았다. 구호물품으로 오는 어른 옷을 물물교환해 식료품으로 바꿔 오고,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어 크리스마스에 미군부대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아동원은 날로 번성했다. 부인 김 여사는 “우리 아동원이 좋다는 소문이 나서 애들이 한때는 500명까지 늘어났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7사단 소속이던 김영옥 대령도 조용히 이곳을 도왔다. 김 여사는 “미군 소속이었던 김영옥 대령이 무슨 오해를 받을까 걱정했던지 직접 오지는 않았고, 부하 장교를 상주시키다시피 하며 무엇이 필요한지 확인해 갔다”며 “구호물품을 정말 많이 보내주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전쟁 중이던 나라에서 선생도 국방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동원이 개원한 지 1년이 지난 어느날, 용산경찰서 병무 담당자가 선생을 찾아왔다고 한다. 구호물품으로 오는 옷을 몇 벌 얻어 입자는 것이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더니, 그는 웃으며 “후회할 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며칠 후 입영 영장이 나왔다. 한 번은 앤더슨 선교사의 도움으로 무마했지만, 영장이 계속 나와 선생은 입대를 결심했다고 한다. 용산역에서 입영열차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아이들이 “선생님”을 찾으며 달려왔다고 한다. 아이들이 바지통을 붙들고 소리치며 울었다.

선생이 1957년 제대하자 아동원은 소문없이 사라져버린 채였다. 사찰 소유권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귀속재산이었을 일본식 사찰을 아동원이 불하받지 못한 것이다. 소속 아이들은 북한산 교양원 등 다른 고아원으로 나뉘어 수용된 후였다. 다행히도 선생 내외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 아동원 출신 아이들이 있다고 전했다.

지금 서울 용산구 삼각지성당(한강대로62다길 17-54) 앞에는 ‘경천애인사 아동원 터’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다. 장홍기 선생은 경천애인사 아동원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지금도 새벽기도를 하며 옛 생각이 나면 그때를 상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우린(아동원 교사들) 욕심도 없었고, 서로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도둑질을 해 달라는 경찰관도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용기가 있었어.” 어린아이 200명을 데리고 한강을 건넌 열아홉 소년의 얼굴이 그의 얼굴에 어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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