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8일 구속된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국내담당 차장. ⓒphoto 최순호 조선일보 기자
2005년 10월 8일 구속된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국내담당 차장. ⓒphoto 최순호 조선일보 기자

김은성씨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 차장 재임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DJ) 일가를 도·감청했다는 증언도 했다. 이는 DJ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도·감청 대상은 DJ부부와 세 아들(홍일·홍업·홍걸)이었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내게 ‘아들 셋을 도청해서라도 관리를 잘하라.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DJ의 세 아들 중 특히 삼남 홍걸씨는 이희호 여사의 친아들이라 특별관리 대상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대통령이 미국 유학 중인 홍걸씨와 전화 통화하는 걸 감청했다. 대화의 분위기를 보니 홍걸씨가 돈을 보내달라는 것 같았다. 당시 DJ는 ‘네가 미국에서 그 정도로 가치 있는 공부를 하고 있냐. 2만달러 이상은 절대 안 된다’며 그 청을 거절했다.”

김은성씨는 “세 아들에 관한 정보 중 안 좋은 부분이 올라오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어려웠던 적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대통령과 영부인에게 자녀 험담을 하는 것 같아 부담이 됐다는 것이다. 대통령 자녀 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는 바람에 신건 국정원장과도 사이가 매우 껄끄러웠다고 한다. 당시 권력 내부에선 김은성을 ‘김홍일계’로, 신건을 ‘김홍걸계’로 분류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평행선을 달렸다. 이에 대해 그는 “김홍일씨와 가까웠던 건 사실”이라며 “내가 도·감청을 하고 대통령에게 비밀을 직보도 하니까 신건 원장이 고깝게 봤던 것 같다. 그래도 김 대통령은 내 손을 들어줬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에서 일했던 전직 국정원 간부들은 그가 국정원장 못지않은 파워를 가졌었다고 평가했다. 한 전직 간부는 “임동원·신건 국정원장도 김은성 차장에겐 존대를 할 정도로 함부로 못 했다. 김 차장이 원장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정보를 제일 많이 갖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김은성이었다”고 말했다.

셋째 딸의 편지

이처럼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의 위상에 낙조가 드리우기 시작한 건 2001년 ‘진승현 게이트’가 터지면서다. 당시 그는 진승현씨가 부회장으로 있던 MCI코리아의 금융감독위 조사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진씨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이후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2년 11월 가석방됐다. 법원은 그의 혐의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돈을 유용하지 않은 점을 참작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했다. 그는 당시 진승현씨로부터 받은 5000만원의 용도를 묻는 질문에 “국정원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정권을 보호하는 것인데, 5000만원은 그런 용도로 쓰였다. 내 전임자 때부터 해왔던 일”이라고만 답했다.

그는 자신을 두 번째 영어(囹圄)의 몸으로 옭아맸던 국정원 도청사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국정원 도청사건이란 국정원이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로 국내 주요 인사들의 전화 통화를 불법 도청한 사건이다. 노무현 정권 출범 후 검찰은 김은성씨가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의 지시로 정치권과 언론계 인사 다수를 불법 도청했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건·임동원 전 원장과 함께 구속됐고, 그의 후임자였던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이 자살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던 2006년 7월 결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셋째 딸이 “아빠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국정원이 도청했다’는 사실을 당시 법정에서 인정한 자신의 상사에 대해 울분을 터트리며 “국정원의 도·감청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봤을 때 정당한 행위인데 (모 국정원장이) 이를 인정하는 바람에 유죄를 선고받았다. 일국의 정보기관 책임자가 그걸 인정하면 어떡하나. 내 딸의 죽음에 그도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치소에 수감돼 있느라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세상을 뜬 셋째 딸이 검찰 조사를 받으러 떠나는 그에게 쓴 손편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편지에는 단정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아빠를 정금같이 쓰기 위해 연단하신다는 것 꼭 믿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힘들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하고. 또 그렇게 기도하고. 지금 아빠를 믿지 않고 나쁘게 누명을 씌우는 사람들은 나중에 정말 많이 후회할 거야. 아빠가 싫어할 테니까 원망은 안 할게. 오히려 그 사람들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지. 그치?”

DJ 정부 실세 A씨 이야기

최고권력자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 내부의 가장 은밀한 곳을 들여다본 탓에 그는 견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DJ 정부의 최고 실세 중 한 명이었던 전직 국회의원 A씨와의 관계가 특히 삐걱거렸다는 게 그의 회고다. A씨는 DJ 정부에서 공천헌금을 받는 등 정치자금의 ‘중간 다리 역할’을 했다고 의심받았던 인물이다. 김은성씨에 따르면 DJ 정부 초창기만 하더라도 자신과 A씨와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멀어진 결정적 계기는 A씨가 인사에 개입하는 듯한 정황을 그가 포착하면서부터다. 그의 회고다. “하루는 A씨가 해외 출국을 위해 공항 VIP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A씨가 기자들 앞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큰소리로 ‘이번에 국정원 국내 차장 갈 준비해’라고 말한 사실을 국정원 IO(정보담당관)가 내게 보고해왔다. 내 권위를 누르겠다는 게 A씨의 의도였던 것 같다. 나는 A씨와 친한 박지원씨(현 국민의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A씨에게 가만 안 둔다고 전하라’고 했다. 당시 박씨가 ‘내가 (A씨에게) 잘 말할 테니까 김 차장이 참으라’며 달래더라.”

김씨는 자신이 모셨던 DJ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DJ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모두를 말했다. 그가 DJ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8년 대통령직 인수위에 파견근무하면서였는데 그때 DJ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IMF로 온 나라가 고생하던 그때 김 대통령이 외국 기업에 직접 전화를 걸어 돈을 달라고 사정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IMF를 빨리 극복하자고 공무원들을 다그치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날이 추운데 난로도 안 피우고 일했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며 DJ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IMF를 빨리 극복한 것은 DJ 덕이다.”

그는 “DJ는 소위 말하는 ‘빨갱이’는 아니다. 좀 래디컬(radical·급진적인)한 분이지 용공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다만 DJ는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그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DJ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에 대해 사상적 의구심이 제기될 때 국가보안법 개정·폐지와 관련해 ‘보수적’인 입장의 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DJ는 “그럼 나하고 국정원장을 국보법상 잠입 탈출죄로 감옥에 보내면 되지 않느냐”는 말을 했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는 “‘내 말 잘 들어라. 그러지 않으면 네가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 같았다”고 회고했다.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는 그로서는 자신이 보좌했던 대통령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듯이 보였다.

그가 10시간 가까운 인터뷰 중 털어놓은 비화는 다양했다. 그는 자신이 국정원(안기부)에 근무하면서 정당을 만드는 데도 두 번이나 개입했다고 밝혔다. 2000년 초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 국정원 대공정책실장으로서 ‘재야인사와 386운동권을 신당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는 5공화국 초 ‘관제 야당’이라 불렸던 한국국민당도 자신이 배후에서 조종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김은성씨는 인터뷰에서 최근 국정원을 겨냥한 이른바 ‘적폐청산’ 수사에 대해서는 거세게 비판했다. 특히 그는 국정원 수퍼컴퓨터의 ‘메인 서버’에 외부인(국정원 적폐청산위원회 측)이 접속한 사실과 관련해 “국장 이상이 사인을 안 하면 접근을 못 하게 돼 있는 걸로 아는데 이들이 어떻게 접근했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 시장·군수·도지사들의 정보가 수퍼컴퓨터에 다 입력돼 있다”며 “국정원 정보가 권력의 입맛에 맞게 악용되면 앞으로 모든 선거는 하나마나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 정보를 그런 식으로 악용했기 때문에 정보기관이 정치사찰, 정보정치의 오명을 뒤집어쓴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對共 인력, 지금도 부족”

지난 11월 29일 국정원은 대공수사권을 타 기관에 이관하고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 불고지죄와 관련된 정보 수집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는데 그는 이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하려다가 국정원 내부 반발에 부딪혀 못 했는데 이 정부가 해버렸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국정원과 기무사의 대공 업무 인력은 지금도 많이 부족하다”며 “국정원과 기무사에는 10% 정도 예비 대공 업무 인력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응전자유화 계획’ 때문이라고 한다. ‘충무계획 3300’ ‘충무계획 9000’ 등으로 구성된 ‘응전자유화 계획’은 북한에서 대규모 난민이 남하할 경우를 대비해 세워둔 일종의 난민구호 계획이다. 대규모 난민이 남하할 때 국정원과 기무사가 대공용의점이 뚜렷한 북한 주민들을 예비검속해야 하는데, 그 임무를 수행할 예비 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국정원이 무력화되면 북한 급변사태 시 응전자유화 계획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거듭 비판했다.

그는 국정원이 무력화되면 “간첩 수사 등 대공 수사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간첩 수사의 경우 국정원이 오랫동안 시간을 두고 수사해야 성과가 나온다”고 주장했다. 통상 간첩은 국내에 암약하는 경우가 많아 행적을 오랫 동안 사찰한 뒤 증거를 수집해야 검거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정보를 국정원이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간첩 수사를 제3의 기관이나 대민 업무가 많은 경찰이 전담하면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훈 현 국정원장에 대해서는 “내가 종합판단과장으로 있던 1980년대 초반 정규 과정 공채로 들어왔다. 당시 대학가의 데모를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었는데 매우 고생스러운 일임에도 참 잘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서훈 원장이 북한 문제에 관한 한 부국장급이 할 일임에도 ‘도맡아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기획한 능력을 인정받아 대통령에게도 신임을 받았다”는 주장도 폈다. 실제 서훈 국정원장은 1·2차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실무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이다. 1차 정상회담 때는 김보현 국정원 3차장-서영교 국정원 대북전략국장-서훈 국정원 대북전략조정단장 라인이, 2차 때는 김만복 국정원장-서훈 국정원 3차장 라인이 북한과 교섭했다는 게 정설로 알려져 있다.

김은성씨는 구속된 전직 국정원장 세 명(원세훈·남재준·이병기)에 대해서는 “일국의 정보 책임자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고 구속된 건 국정원으로선 망신스러운 일”이라면서도 “한 정권이 전직 국정원장 세 명을 감옥에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정보 책임자들을 이런 식으로 구속하면 우방인 미국은 한국에 절대 정보를 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국정원 퇴임 직전까지는 국내 정치 정보를 총괄했지만 초창기에는 대북·안보 관련 업무도 많이 맡았었다.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김일성 신년사, 북한군 동향 분석을 해왔고 안기부 시절엔 미국 CIA와 업무 협조를 하며 정세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들을 해왔다. 그 시절 그가 작성한 보고서는 이른바 ‘특상보고서’로 분류돼 대통령에게 보고될 만큼 빼어났다는 게 전직 국정원 간부들의 평이다. 그런 그에게 현재의 한반도 정세에 대해 묻자 “사실상 전면전에 돌입한 상황”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데프콘 3단계’에 해당하는 안보적으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다. 북한군은 완전 무장하지 않고 위장한 상태에서 남침하는 이른바 ‘경량화 훈련’을 받고 있어 그들이 빌딩이 많은 서울에 잠입·침투라도 하면 꼼짝없이 게릴라전으로 이어진다. 미군이 전면전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게릴라전에 대한 대비는 미흡한 것으로 안다. 우리도 허술하긴 마찬가지다. 북한의 장사정포보다 게릴라전이 더 우려된다.”

특히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한·미 관계에 파열음이 들리고 있다”고 했다. “현재 국정원의 여건상 미국 CIA 등과 북한 관련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대북 정보 수집이 불가능하다. 한·미 동맹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는 정보에 있어 완전한 장님이다.”

김은성은 누구?

30년 재직한 국정원맨 진승현 게이트,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두 번 옥고

1945년생인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은 서울 용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중앙정보부 공채로 들어가 30년간 재직한 정통 ‘국정원맨’이다. 대전지부장, 대공정책실장을 역임한 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4월 국내 정치를 담당하는 국정원 2차장에 임명됐다. 그의 본적은 서울이지만 선친인 김영천씨(전 대검찰청 차장)가 전남 장성 출신이라 호남 출신 동교동 실세들의 후원으로 국정원 2차장에 임명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김영천씨는 과거 오제도 검사 등과 함께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진승현 게이트와 국정원 도청사건에 연루돼 두 번의 옥고를 치른 탓인지 그는 많이 쇠약해 보였다. 그는 “심장 수술, 우울증, 공황장애 등으로 하루에 복용하는 약만 20여종”이라고 말했다. 그의 오른쪽 다리엔 보행 보조장치가 채워져 있었는데 무릎 연골이 망가져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발바닥엔 염증도 보였고, 몸 곳곳엔 백반증이 드리워져 있었다.

당초 그와의 인터뷰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에 관한 취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정부 권력 핵심에서 벌어졌던 각종 비화들을 이틀간, 총 10시간가량 포효하듯 쏟아냈다. 그중 일부는 너무 은밀한 사안이라 기사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자택 방 한쪽 책꽂이엔, 출소 후 정리한 각종 원고 바인더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안보 현안을 비롯해 그간의 소회를 담담히 적은 수필, 그리고 성경을 필사한 것들이었다. 그에게 “회고록을 쓸 생각이 없냐”고 물었더니 “국가를 위해 정사(正史)를 남길 생각은 갖고 있다”고 했다. 그의 회고록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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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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