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4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사의를 표명한 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을 떠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4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사의를 표명한 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을 떠나고 있다. ⓒphoto 뉴시스

대선 시즌이 되면 주요 후보자의 신상을 다룬 문건이 여의도 정가에 은밀히 돌아다닌다. 장점보다는 단점, 강점보다는 약점, 미담보다는 험담이 주로 실린다. 이런 유의 문건은 정치적 관음증을 격하게 자극한다. 반면 유통은 제한적이다. ‘금배지’들도 구하기 힘들다. 여론조사에서 밀리는 후보자의 표정이 밝다면, 경쟁자의 X파일을 입수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험담의 전파 속도는 미담의 전파 속도보다 열 배는 빠르다. 사람들은 ‘앞담화’보다 ‘뒷담화’를 즐긴다. 앞에서 띄워주고 뒤에서 흉본다. 선거전의 네거티브 캠페인은 바로 인간의 이러한 속성을 파고드는 전략이다. 선관위의 공익광고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멈추고 정책 경쟁을 하자고 호소하지만 효과는 회의적이다. 초등학교 1학년 ‘바른생활’ 교과서의 “철수야 영희야 착하게 살자” 캠페인과 비슷하다. 인간의 속성이 바뀌지 않는 한 네거티브 캠페인은 멸종되지 않을 것이다.

최근 여의도 정가에 ‘윤석열 파일’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북한의 대외선전 매체 ‘통일의 메아리’가 언급한 부인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이나 장모의 요양병원 부정수급 의혹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검사 윤석열’의 비위 의혹을 정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일에는 윤석열 검사가 수사하면서 특정 피의자를 친소(親疏)관계 때문에 봐주는 등 사건처리를 엄정하게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심지어 재벌 비위 수사를 뭉갰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내용 못지않게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이 파일이 목격된 장소가 야당 의원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야권의 누군가가 이 문건을 생산한 것일까? 단언컨대 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왜? 야당에는 이럴 정도의 정보수집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법무·검찰의 내부정보를 획득해야만 각색을 통해 생산 가능한 ‘작품’이데 그 주인이 야당이라는 추론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당연히 생산지는 여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생산능력뿐만 아니라 이런 문건을 만들어야 할 절박한 필요성 또한 여권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건이 왜 야당에 있는 것일까? 생산자의 공급 의도 때문이다. 추미애의 윤석열 때리기는 자승자박의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때릴수록 윤석열은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권발 제2라운드를 쉽게 결행할 수 있을까. 제2라운드도 실패하면 네거티브 캠페인이라는 선거전의 전략무기를 아예 잃어버릴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마침 야권에서도 윤석열 때리기의 수요가 발생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윤석열을 제쳐야 하는 사람들 또한 윤석열을 무너뜨릴 비책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들이 ‘여권발-야권행 X파일’을 마다하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는 것보다 몇 곱절 힘들다.

이 파일을 야권에서 먼저 써주는 게 좋은 이유는 또 있다. 여권발 정치공작이 아니라 야권발 내부검증으로 보기 좋게 포장되기 때문이다. 같은 메시지라도 메신저가 바뀌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제품의 원산지는 이렇게 변경된다.

36계(計) 중 최고의 계략은 이간계다. 비용이 가장 적게 들면서도 성공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 자기 손에 피 묻히지 않고 상대를 제거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차도살인(借刀殺人)은 최고급 전략이다. 만약 성공하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실패하더라도 야권 내부에서 나온 것이라며 본선에서 재활용하면 된다. 요컨대 예선에서는 야권의 경쟁자들이 1차 소비자가 되고, 실패할 경우 본선에서 여권 경쟁자가 2차 소비(재활용)하는 그림이다.

이런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경선으로 평가되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 측은 “전과자가 대통령이 되게 놔둘 수는 없다”며 BBK, 도곡동 땅 의혹 등으로 이명박 후보를 맹공하였다. 결국 목적달성에 실패했지만 그 콘텐츠는 정동영 후보 측으로 이전되어 재활용되었다. 필자는 당시 친박의 이명박 공격 재료가 노무현 정권에 의해 제공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영 전체의 이익을 갉아먹는 행위였음에는 분명하다.

얼마 전 칼럼에서 필자는 여권의 ‘윤나땡’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썼다. 처가 문제로 흔들어 봤자 역풍을 자초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윤석열 본인의 검사 시절 행각에 초점을 맞춘 업그레이드된 버전이 등장했다. “윤석열이 공정의 대변인인 양 행세하지만 사실은 불공정의 화신이었다”는 인식을 퍼뜨리겠다는 심산이다.

이번 작품은 ‘윤나땡 전략’의 효력이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진화한 일종의 변이 바이러스라 할 수 있다.

‘윤석열 파일’에 들어 있는 의혹들이 사실인지는 정밀 검증될 것이다. 그중에는 “윤석열이 윤중천의 원주 별장에서 수차례 접대를 받았다”는 한겨레신문의 대형 오보와 같은 것들이 꽤 있을 것이다. 검사 이규원이 작성한 것은 수사 보고서가 아니라 픽션이었다. 그런데 쉽게 진위가 가려지지 않아 지루한 공방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생산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관철되었다고 봐야 한다.

진위 공방보다 정치적 파장이 큰 것은 사용자의 소속이다. 아무리 적의 적은 친구라는 비정한 논리가 횡행하는 정치판이라지만, 진영 내 경쟁자를 제압하기 위해 적대 진영이 생산한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명백한 이적행위다. 소리(小利)를 위해 정권교체라는 대의(大義)를 저버리는 반역행위다.

최근 보수우파 네티즌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공간에 “윤석열은 좌파다”라는 댓글이 부쩍 늘고 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보기에는 표현의 강도나 떼지어 몰려다니는 행태가 예사롭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윤석열 파일과 흐름을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권의 향방이 결정되는 시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이번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주주의 종식과 자유민주 진영으로의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은 누가 적과 내통하여 내부의 경쟁자를 제거하려 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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