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 12월 2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2년 신년 특별사면 발표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 12월 2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2년 신년 특별사면 발표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1973년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탄핵 요구 여론이 들끓자 닉슨은 이듬해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자동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미국의 정치체제상 당시의 부통령인 제럴드 포드는 얼떨결에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억세게 운이 좋았던 포드는 부패범죄로 사임한 전임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의 자리를 이어받아 부통령으로 취임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닉슨 대통령까지 사임하면서 초고속 승진을 한 셈이다. 벼락출세를 했던 만큼 포드는 정치적 기반이 불안했다. 바로 1976년에 있을 재선 도전에 빨간불이 켜진 포드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한 결정을 내리는데 그것이 바로 사면이다.

제럴드 포드는 공화당의 부활을 이끌었던 닉슨을 사면함으로써 공화당 내 닉슨의 지지기반을 흡수하고자 했다. 미국 대통령의 사면권은 독특하게 수사나 기소 이전에도 행사할 수 있어서, 마음이 급했던 포드는 수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은 닉슨을 일찌감치 사면하기에 이른다. 닉슨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채 가라앉지도 않은 상황에서 행사된 사면권이었기에 사회적 저항은 당연히 컸다. 이후 포드는 되레 정치적 기반을 잃고 1976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명분 없이 정치적 유불리만 따진 사면권의 행사가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이다.

2021년 1월 18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 걸린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요구 현수막.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사면 질문에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photo 뉴시스
2021년 1월 18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 걸린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요구 현수막.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사면 질문에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photo 뉴시스

처량해진 국민대통합 명분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기습적으로 사면했다. 전직 대통령 사면에 대해 줄곧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고, 당초 신년 사면 대상에도 박 전 대통령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청와대의 갑작스러운 사면 발표는 여야 모두를 당혹스럽게 했다. 실제로 이번 사면은 이재명 후보, 더불어민주당, 심지어 청와대 참모들조차 알지 못했을 정도로 긴급하게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또한 문 대통령은 일찍이 사면권을 남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고 특히 부패범죄에 대한 사면권 제한은 공약으로 국민들에게 약속한 적도 있다. 그렇기에 국민 누구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을 예상하긴 어려웠다.

불과 1년 전에 벌어진 일을 생각해보면 대통령의 사면 결정은 더욱 의아하다. 2021년 1월 1일 이른 아침, 동작 서울현충원 참배를 마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카드를 꺼냈다. 여당 대표가 신년 벽두부터 꺼낸 일성이 사면이라는 점에서 언론은 들썩였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야권은 긴장하기 시작했는데, 4월에 치러지는 재보궐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논의가 본격화되었을 때 그 찬반을 두고 야권에 심각한 내부 균열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전 국민적 공감대와 수감 중인 전직 대통령들의 대국민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거절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은 완고했고, 청와대도 이낙연 개인의 의견으로 치부하며 선긋기에 나섰다. 그랬던 문재인 대통령이 딱 1년 만에 그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스스로 파기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신년 사면의 대의명분으로서 국민대통합을 내세웠다. 그러나 거창하게 걸어놓은 간판과는 다르게 이번 사면의 목적이 야권의 분열과 국민 갈라치기라는 것은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형기나 범죄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박 전 대통령 사면에 대한 찬성 여부와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차별대우를 두고 국민의힘에서는 벌써부터 견해가 엇갈린다. 심지어 민주당 내에서조차 문 대통령의 사면 결정에 대해 강한 불만이 터져나온다. 이재명 후보 역시 대통령의 결정인 만큼 어쩔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사면에 찬성하는 국민들과 반대하는 국민들 사이에서 갈등도 불거지고 있다. 사면 발표가 난 직후 주말의 식당가에서는 이번 사면 결정을 두고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문 대통령의 정치적 안방은 물론 전국에서 다툼이 격화되는 지금, 국민대통합이라는 명분이 처량할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한명숙 전 총리는 사면보다 더 큰 특혜인 복권 결정을 받았다. 한명숙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었으며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자신의 ‘진실’을 담은 책까지 출판했다. 자신에 대한 형사처벌을 정치적 보복으로 여기고 있으며, 당연히 추징금도 제대로 납부한 적이 없다. 내란선동과 횡령의 죄로 복역 중인 이석기는 ‘개선의 여지’라는 가석방의 요건조차 갖추지 못했음에도 가석방이 이뤄졌다. 대통령 자신이 내세운 사면의 대원칙까지 배신해가며 내린 결정에, 그 어떤 합의나 공감대는 없었다. 명분이 사라진 졸속사면에는 자기 편 챙기기와 야권 분열을 노린 정치적 모략만 가득했다.

절대군주의 은사권(恩赦權)이 흔적처럼 남아 있는 제도가 사면권이다. 권력분립의 예외라는 점에서도 극히 제한되어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이었던 앤서니 케네디가 말한 것처럼 대통령의 사면권은 국민이 법과 제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사용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사면권은 정치적 상황과 사법적 판단이 충돌하는 경우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발동되어야 한다. 국민이 용인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사면권을 남용하는 것은 법 질서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사회를 분열시킬 뿐이다.

자기 편 챙기기와 야권 분열 꼼수?

‘촛불혁명’의 주체를 자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에 혁명의 ‘타도 대상’을 자기 손으로 사면했다. ‘촛불혁명’으로 비롯된 ‘촛불정부’의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5년 전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과 ‘이게 나라냐’를 외쳤던 국민들은 허탈감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분들은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범죄에 대한 뉘우침 없이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한명숙, 이석기에 대한 시혜 조치를 보며 과정이 공정하다는, 결과가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불신하게 됐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민들 중 누가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정녕 갈라치기의 명수였던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일까.

김재섭 국민의힘 전 최고위원·도봉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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