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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7호] 202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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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혁명의 서막]‘인플레이션 해결사’ 폴 볼커, 달러를 소생시키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2021-10-05 오전 8:09:44

▲ 폴 볼커 전 연준 의장 photo 뉴시스
우리는 지난 호에서 아서 번스가 어떻게 연준의 독립성을 망가트렸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가 정치 세력에 휘둘려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과정에서 만든 게 근원인플레이션지수이다.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쓰지 않고 통화팽창정책을 지속하려니 인플레이션 수치를 가능한 낮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변동성이 큰 식음료와 유가를 제외시켜 탄생한 게 근원인플레이션지수이다.(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집값 상승이 물가를 부풀린다면서 이마저 근원인플레이션지수에서 제외시키고 자가임대비를 대신 넣었다.) 이후 근원인플레이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달러는 무제한 발행되었다.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의 폭등이었다. 이러한 고(高)인플레이션을 잡은 사람이 폴 볼커이다.
   
   미국 경제학자들은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의 연준 의장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한 사람으로 폴 볼커를 지목한다. 미국 경제가 최악의 국면에 빠져 있을 때 연준 의장이 되어, 인플레이션을 잡고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미국 경제는 암울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베트남 정글에 수십만 미군이 갇히는 패전도 기록했다. 이 와중에 전비를 조달하느라 돈을 많이 찍어내어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다. 1971년 8월 닉슨쇼크로 금과의 고리가 끊어진 달러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양껏 발행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뜩이나 휘청거리는 경제에 오일쇼크는 치명타가 되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는 단숨에 4배로 치솟았다. 이는 당연히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다. 이때 긴축정책을 써서 시중 유동성을 흡수해야 함에도 연준은 재선을 꿈꾸는 닉슨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하여 통화정책을 거꾸로 시행했다. 곧 긴축을 해야 할 마당에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통화팽창 정책을 고수한 것이다.
   
   아서 번스 연준 의장 재임기간인 1970~1978년 9년 동안 평균 물가상승률은 9%였다. 물가 통제로 기업의 수익성은 악화되고 실업자는 늘어났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인플레이션 13.3%까지 치솟아
   
   1979년 2월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전복되고 그들이 반미 노선을 강화하자 유가는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2차 오일쇼크다. 1980년 4월 유가가 39.5달러까지 올랐다. 아서 번스가 근원인플레이션 지수를 만들어 식음료와 유가를 지수에서 제외했지만 이러한 유가 폭등이 다른 상품에 미치는 영향까지 완벽히 제외한 것은 아니라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그간 연준과 정부가 돈을 너무 많이 풀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재정적자도 두 배로 늘어났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 경제는 엉망이었다. 세 차례나 경기침체에 빠지는 트리플 딥을 겪으며 장기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물가가 뛰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 특히 1979년의 미국 경제는 최악이었다. 그해 인플레이션율은 13.3%나 되었다. 베트남전쟁 패배의 후유증도 컸지만, 연준 스스로가 인플레이션보다는 성장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손해 보는 계층은 근로자와 소시민들이다. 임금 인상이 높은 인플레이션 상승률을 쫓아가지 못하고, 갖고 있는 현금과 예금의 가치가 인플레이션 상승률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당시 금값은 1971년 온스당 35달러에 비해 20배 이상 올랐다. 이는 곧 경기침체에 대한 실망과 달러에 대한 불신의 결과였다. 금은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이자 달러를 대신하는 대체자산이라 누구나 달러 대신 금을 소유하고자 했다.
   
   그 무렵 리처드 블루멘털 재무장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인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윌리엄 밀러 당시 연준 의장은 통화정책에 이상이 없다며 긴축에 반대했다.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재무장관과 통화정책 책임자 사이의 역할이 바뀐 얄궂은 상황이었다. 1978년 카터에 의해 지명된 법률가이자 기업가 출신인 밀러는, 불행하게도 경제와 금융에 관한 지식이 연준 의장직을 수행하기에는 짧아 보였다.
   
   두 책임자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1976년 1000선을 돌파했던 다우지수는 800선으로 내려앉았다. 통화정책에 대한 갈등은 월가 투자자들의 신뢰를 상실했다. 카터 대통령 스스로도 “정부가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미국이 남미형의 만성 인플레이션 경제로 추락하거나, 아니면 1930년대와 같은 대공황에 빠져들 것”이라고 비관했다. 밀러는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재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준의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폴 볼커였다.
   
   1979년 8월에 취임한 폴 볼커는 물가와 경기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 중 한 마리만 잡겠다고 방침을 굳혔다.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금리를 올려야 했고 경기부양을 위해서는 금리를 내려야 했다. 그는 연준 의장으로서 미국 경제를 내리누르는 인플레이션을 긴축을 통해 잡기로 작정했다. 긴축정책을 쓰면 단기적으로 경기침체가 심해져 대중과 정치인이 반발하게 마련이다. 볼커는 1979년 10월 6일 ‘경기침체 상황임에도’ 기준금리를 15.5%로 4%포인트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를 당시 언론은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렀다. 그러자 일반 은행금리는 무려 20% 가까이 뛰어올랐다.
   
   볼커는 1927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소신과 검약 등의 신조를 물려받았다. 프린스턴대 경제학과와 하버드대 행정대학원,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연구원을 지낸 볼커는 1952년 경제분석가로 연준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뒤 1957년 체이스맨해튼 이코노미스트로 자리를 옮겼다. 닉슨 대통령 시절인 1971년에는 미 재무부 국제경제담당 차관으로 달러의 금 태환 폐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1975년부터 4년 동안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거쳐 연준 의장에 발탁되었다. 카터가 볼커를 연준 의장에 임명한 것은 그가 연준 산하의 가장 핵심 지역인 뉴욕연방은행을 맡고 있는 데다, 보수적이며 월가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볼커의 고금리정책에 대해 카터 행정부는 몹시 불쾌해했다. 카터 대통령도 처음에는 국민들에게 “신용카드를 이용한 과도한 소비를 억제하라”고 호소하며 인플레이션 억제 캠페인을 벌였으나 금리가 유사 이래 최고 수준이라는 평을 받는 20%까지 올라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경기를 악화시켜 유권자의 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업률은 5%에서 10%로 늘었고, 주식시장은 폭락했다. 1980년에 접어들면서 금리의 급상승으로 미국 경제는 더욱 깊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카터는 대통령이었지만 연준의 독립성을 지켜주기 위해 볼커의 정책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는 ‘신자유주의와 감세정책’을 대선공약으로 들고나온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결정적 패인 가운데 하나가 볼커의 고금리 정책이었음은 물론이다.
   
   
   볼커 의장에게 힘 실어준 레이건
   
   레이건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볼커는 고금리 정책을 더욱 독하게 밀어붙였다. 1981년 6월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무서운 결단이었다. 볼커 의장은 ‘철의 볼커’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통령을 포함, 누가 뭐라고 해도 소신을 꺾지 않고 강력한 금리인상 드라이브를 걸었다.
   
   레이건 대통령도 ‘미국 경제가 장기불황에서 빠져나오려면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레이건의 막료들이 “볼커 연준 의장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카터처럼 연임에 실패한다”는 경고를 쏟아냈지만, 레이건은 “우리가 연준을 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며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경제가 제 길을 간다면 나중에는 훨씬 더 건강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볼커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커갔다.
   
   1981년, 빚더미에 앉게 된 미국 농민들이 대거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이들은 도심 한복판을 행진하고 연준 건물을 봉쇄하며 볼커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사상 초유의 고금리 직격탄을 맞고 소속 회사가 문을 닫자 앙심을 품은 한 남자는 연준(FRB) 건물에 무기를 들고 난입하는 소동을 벌였다. 키가 2m가 넘는 볼커는 재직 중에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정도로 온갖 시위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이자율이 20% 선으로 치솟으며 실업률은 10%를 넘어섰다. 이로 인해 미국인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소비는 급락했다. 자동차 회사들이나 건설회사 등은 파산 상태로 내몰렸다. 그러나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고서는 미국 경제는 장래가 없다는 것이 볼커의 생각이었다. 그는 1981년 기준금리를 21.5%까지 올렸다. 이렇게 고금리로 인한 고통은 3년이나 지속되었다.
   
   1981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행 예금이자가 높으니 돈들이 은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준금리 21.5%와 그 무렵의 인플레이션 14% 차이만 해도 7%포인트가 넘는 고금리였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율이 한 해 전의 14.6%에서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4%로 잦아들었고, 이듬해에는 2.36%까지 떨어졌다. 연준은 긴축통화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이겨냈다. 폴 볼커가 경제가 충분히 고통받았다는 판단 아래 긴축을 풀자 경제는 힘차게 되살아났다. 1980년 4월 817포인트까지 내려갔던 다우지수가 1983년 3월 1130포인트까지 상승했다.
   
   이제는 그가 인플레이션을 잡아 1990년대 경제 붐의 초석이 되었음을 누구나 인정한다. 연준이 인플레이션의 버팀목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도 그의 이런 고집 때문이다. 실제 미국 경제는 1982년부터 힘차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해 8월 17일에 다우지수는 4.9%나 상승했다. 역사적인 기록이었다. 미국 경제는 새롭게 태어났다. 볼커는 1987년까지 8년 동안 연준 의장을 지냈다. 그의 후임자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볼커가 이루어 놓은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토대로 경쟁력 있게 미국 경제를 이끌었다.
   
   이러한 불안한 시기가 지나자 시장은 미국 200년 역사상 최고라 할 정도의 강세장이 시작되었다. 주식투자자들은 꾸준히 늘어나 1985년 말에는 4000만명을 넘어서면서, 1987년 1월 8일에는 다우지수 2000선을 돌파했다. 1000선을 돌파하는 데 76년이 걸렸고, 2000선을 돌파하는 데는 14년이 걸렸다. 이때가 미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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