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의 공매도 공격에 격분해 ‘게임스톱 사태’를 일으켰던 의리파 개미들이 있다. 이들은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Reddit)의 서브 채널인 ‘월스트리트베츠(Wallstreetbets)’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헤지펀드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이들 개인투자자들이 지난해 1월 말 난데없이 은 매입을 촉구하며 은 선물시장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들 개미들은 왜 은 매입을 촉구하며 은 선물시장을 공격하고 나선 것일까?이들은 은 시장 역시 게임스톱과 마찬가지로 일부 세력들에 의해 부당한 매도 공격을 받으며 가격이 짓눌리고 있다고 본 것이다
2012년 미국이 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스위프트) 국제결제시스템에서 이란 은행들을 차단하자 이에 놀란 러시아와 중국은 각자 루블화결제시스템(SPFS)과 위안화결제시스템(CIPS)을 개발해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달러 주도 결제시스템 독주 체제에서 결제시스템의 분권화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가상자산(암호화폐) 세계에서도 비트코인 기반 암호화폐 독주 체제에 대한 대항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비트코인 기반 파생 암호화폐들은 모두 비트코인과 같이 ‘오픈소스’로 운영된다. 비트코인과 같은 이념을 표방해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는 국가 간 자금거래를 위해 미국과 유럽 시중은행들이 1977년 설립한 기관으로 벨기에에 본부를 두고 있다. 세계 210여개국 1만1500여개의 금융기관이 SWIFT망을 통해 하루 평균 3800만건의 국제 간 송금이나 무역대금을 결제하고 있다.미국과 유럽연합(EU)은 2012년 3월 이란 중앙은행을 비롯해 30곳을 SWIFT에서 강제 탈퇴시켰다. 이어 미국은 같은해 7월 이란과 다른 나라의 금 거래도 막았다. 당시 이러한 조치는 이란 경제의 근간인 석유와 가스 수출에 치명타를 입혔다. 이란은 세수의 80
사토시 나카모토 등 암호화폐의 창시자들은 있는 자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통화시스템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그들이 ‘당사자 간 일대일로 운영되는 새로운 전자통화 시스템’을 생각하게 된 것은 화폐 중개인이 경제 권력이 되고, 그 경제 권력이 정치·사회 권력과 또 다른 관계를 맺는 현 금융자본주의의 병폐를 꿰뚫어봤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주의가 몰고 온 병폐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소득불균형이다. 있는 자들이 더 많은 이득을 취하면서 빈부격차가 자꾸 벌어지는 현 금융자본주의의 모순이 암호화폐라는 혁명적 통화 탄생의 또 다른 배경이 된 것이다.금
비트코인은 탈중앙화 방식으로 생성되고 운영되는 암호화폐이다. 곧 거래장부가 은행이라는 중앙 서버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다수의 컴퓨터에 분산되어 저장된다. 따라서 암호화폐는 특정 주인이 없으며, 동시에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인 화폐다. 어느 특정 국가에 속박받지 않고, 누구도 임의로 화폐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활용할 수 있다. 심지어 인터넷이 없어도 거래가 가능하다. 일례로 중국이 개발하고 있는 인민은행 디지털화폐는 인터넷이 없는 환경에서도 근거리 통신망만 있으면 휴대폰끼리 부
인류의 역사는 화폐 발명 이후 크게 두 방향의 흐름으로 진행되어 왔다. 첫 번째 흐름은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역할이다. 화폐의 발명으로 사람들은 원시경제에서 벗어나 협업과 분업으로 축적을 시작해,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하는 수렵·채취의 자급생산 경제에서 벗어났다. 이후 화폐는 인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두 번째 흐름은 화폐 사용의 생활화에 따른 사용영역의 확장이다. 화폐의 세계화 같은 개념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후 수천 년간 화폐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도구로서의 기능보다는 오히려 힘과 정보를 가진 자에게 봉
최근 변이 바이러스(오미크론) 사태를 맞아 가장 겁나는 것이 이른바 ‘더블딥’이다. 더블딥은 경기침체 후 잠시 회복기를 보이다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이중침체 현상’을 뜻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블딥이 오더라도 쓸 카드가 별로 없다. 미국의 경우, 고공 행진하는 인플레이션으로 더 이상 돈을 풀기가 힘들다. 이른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함께 오는 스태그플레이션이 가속화할 수 있다.게다가 기업의 수익이 악화되어 기업부채가 많아지고 부도 도미노현상이 발생해서 관련 파생상품에 탈이 날 경우, 세계경제를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트릴 위
IMF 당시 미국이 왜 한국 경제를 IMF 관리체제에 집어넣으려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IMF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풀렸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경제를 ‘팍스 아메리카나’로 일컬어지는 미국 주도의 경제 틀에 맞추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미국은 한국 경제의 체질을 ‘관치에서 미국식 경제체제, 곧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국 경제의 낡은 틀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IMF를 통한 관리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협상 끝에 IMF는 550억달러의 패키지 자금을
강대국의 통화팽창과 환율전쟁이 개도국을 어떻게 피폐화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1971년 8월 미국은 자기들이 주도해 만든 브레턴우즈 협정을 스스로 깨버리고 국제 외환시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세계 외환시장에 큰 충격을 준 이른바 ‘닉슨쇼크’이다. 미국은 금과의 고리가 끊어진 달러의 발행량을 1970년대 내내 매년 11% 이상 늘렸다. 방만한 통화팽창 정책은 결국 탈이 나고 말아 미국은 10년 동안 고인플레이션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게 된다. 경기부진과 물가오름세가 같이 나타나는 스테그플레이션의 공포가 미국을 덮쳤다. 동시에
세계는 1930년대 대공황 이래 4차례의 큰 환율전쟁에 휩싸였다.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촉발된 1차 환율전쟁,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를 붕괴시킨 닉슨쇼크로 촉발된 2차 환율전쟁, 1985년 플라자합의로 촉발된 3차 환율전쟁,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4차 환율전쟁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4차례 환율전쟁의 공통점은 모두 미국이 주도했다는 점이다.그간 모든 환율전쟁은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로 인해 달러의 실질가치는 1934년 이래 ‘의도적’으로 98% 이상 훼실(毁失)됐다. 1934
1980년대 들어 미국은 여러모로 힘들었다. 1970년대 기나긴 인플레이션과의 사투가 진행되면서 들이닥친 스테그플레이션에서 탈출해야 했다. 미국이 선택한 카드는 그간의 ‘케인스주의’를 버리는 것이었다. 대신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효율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다. 동시에 레이건 대통령은 소비 증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부자 감세정책을 들고나왔다.폴 볼커가 1980년대 들어 초강력 긴축으로 가까스로 인플레이션을 잡았을 때, 미국은 쌍둥이 적자, 곧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빠져들었다. 미국은 먼저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를 위해 교환의 매개체로 등장한 게 돈이다. 그런데 1971년 닉슨쇼크 이후 금과의 고리가 끊어진 달러 스스로가 자가증식을 통해 그 성장 속도가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 곧 세계 GDP보다 몇 배 이상 빠르게 불어났다. 이것이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를 잉태하게 된다.1970년대 이후 글로벌 금융자산의 증가 속도가 세계 경제성장률을 너무 크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 3~4%인 데 비해 세계 금융자산 증가율은 그 서너 배인 평균 15% 안팎이었다. 지나친 오버슈팅이었다.[image3]경
우리는 지난 호에서 아서 번스가 어떻게 연준의 독립성을 망가트렸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가 정치 세력에 휘둘려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과정에서 만든 게 근원인플레이션지수이다.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쓰지 않고 통화팽창정책을 지속하려니 인플레이션 수치를 가능한 낮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변동성이 큰 식음료와 유가를 제외시켜 탄생한 게 근원인플레이션지수이다.(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집값 상승이 물가를 부풀린다면서 이마저 근원인플레이션지수에서 제외시키고 자가임대비를 대신 넣었다.) 이후 근원인플레이션이 허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는 기존의 패권적 통화금융 시스템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영원히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기존 통화금융 세력이 기득 체제에 복무한다고 보았다. ‘복무(服務)’한다는 의미는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임무에 힘쓴다는 뜻이다. 곧 통화금융 세력의 임무는 통화시장을 안정시켜 국민경제, 특히 서민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플레이션이나 금융위기의 위험이 있을지라도 통치 세력과 통화금융 세력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일한다는 의미이다.이는 화폐론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도 우려하는 사안이다. 존 케
데이비드 차움은 1985년에 ‘신분 노출 없는 보안: 빅브라더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거래 시스템’이라는 논문으로 사이퍼펑크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어 1988년 ‘추적 불가능한 전자화폐’라는 논문을 통해 인터넷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추적 불가능한 디지털화폐를 제안했다. 세계 최초로 암호학이 적용된 익명성 디지털화폐를 제안한 것이다.차움은 이를 개발하기 위해 1990년 네덜란드에 ‘디지캐시(DigiCash)’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미국 정부의 견제를 피해 해외로 나간 것이다. 그는 1982년 발표한 백서를 토대로 ‘e캐시’
닉 재보(Nicholas Szabo)는 1998년 웨이 다이(Wei Dai)가 고안한 비머니(B-Money)의 암호화기술을 참고해 같은 해에 ‘비트골드’를 제안했다. 비트골드의 메커니즘은 금본위제 통화 발행 원리를 구현해 인플레이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것이었다. 비트골드가 실제 발행되어 사용된 적이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비트골드가 비트코인의 모태라고 이야기한다. 이유는 둘의 구조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비트골드는 참가자들이 암호화된 퍼즐을 풀어 얻게 되는 구조인데, 퍼즐이 조금씩 어려워지기 때문에 비트골드를 얻는 것도 점차
원래 인터넷은 군사용으로 개발되었다. 1960년대 미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ARPA)의 연구용 네트워크가 시초이다. 처음에 미 국방부는 중요 군사정보를 철벽 요새를 구축한 뒤 그곳에 중앙 서버를 두고 중앙집중형으로 관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핵미사일의 요새 공격에 대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 서버를 분산 설치한 뒤 이를 서로 연결하면 일부 서버가 공격당하더라도 나머지 서버들로 관리할 수 있다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이로써 대학 4곳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아르파넷
1960년대 중반 들어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중동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전쟁의 계속된 실패와 강제징집으로 불안한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징집을 거부하며 반전운동을 벌였다. 시위가 점점 격해져 징집영장 불태우기, 전쟁규탄 농성까지 벌어지자 미국은 벌집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더 나아가 기존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자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젊은이들도 출현했다. 도덕과 이성보다는 자연스러운 감성,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두며, 인간성을 중시하고, 물질문명을 부정하며 즐거움을 추구
1971년 닉슨쇼크 이후 달러 가치가 떨어지자 그 영향이 산유국에까지 미쳐 원유가격을 대폭 끌어올리는 빌미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아랍권의 패배로 끝난 이후, 석유수출국기구(OPEC)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로 쓰려던 참이었다. 산유국들은 석유 수출을 줄여 원유가격을 인상했다. 1973년 10월 1배럴당 3.01달러였던 원유가격은 3개월 만에 11.65달러로 387%나 뛰어올랐다. 세계경제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석유파동으로 1974년 주요 선진국들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1944년 7월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영국 대표 케인스가 제안했던 세계화폐는 거부되었고 미국의 의도대로 달러 중심의 금환본위제도가 확립되었다. 35달러를 금 1온스로의 금태환을 보장하고 각국 통화가치를 달러에 1% 범위 내에서 연동시켰다. 브레튼우즈 체제 초기인 1947년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는 전 세계 금의 70% 이상을 갖고 있었다.그러나 이후 일본과 서독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무역증대로 세계 무역에서 미국의 위상은 점점 축소되었다. 게다가 베트남전쟁으로 늘어난 국가채무, 통화팽창 등으로 달러가치는 1960년대 들어 심각하게 떨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