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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1호]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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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혁명의 서막]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진짜 주범은 위안화?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2021-11-04 오전 8:03:56

▲ 일본의 한 주식 투자자가 닛케이지수 전광판을 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세계는 1930년대 대공황 이래 4차례의 큰 환율전쟁에 휩싸였다.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촉발된 1차 환율전쟁,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를 붕괴시킨 닉슨쇼크로 촉발된 2차 환율전쟁, 1985년 플라자합의로 촉발된 3차 환율전쟁,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4차 환율전쟁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4차례 환율전쟁의 공통점은 모두 미국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그간 모든 환율전쟁은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로 인해 달러의 실질가치는 1934년 이래 ‘의도적’으로 98% 이상 훼실(毁失)됐다. 1934년 온스당 20.67달러였던 금값이 지금은 1800달러 언저리에서 형성되고 있으니 말이다.
   
   플라자합의가 촉발된 환율전쟁의 결과 두 배 이상 절상된 엔화가 결정적으로 무너진 계기는 중국 위안화의 공격이었다. 중국이 4차례에 걸쳐 300%라는 위안화 대폭 평가절하 공격을 가하자 엔화는 재기불능의 상태로 휘청거렸다.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협공당한 일본은 제조업 공동화가 발생하고 수출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이로써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되었다.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일본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였다. 일본 정부는 급격한 엔고로 인한 기업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저금리 정책으로 전환했다. 일본 중앙은행은 수출경쟁력 저하와 불황이 우려되자 1986년부터 1987년 초까지 1년여 만에 정책금리를 5차례에 걸쳐 5%에서 절반인 2.5%로 떨어뜨렸다.
   
   
   땅값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일본인들의 신념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금리를 내렸으면 엔화는 약세로 돌아서야 했다. 교과서에는 금리를 내리면 돈의 가치도 함께 떨어진다고 적혀 있으나 금리는 환율에 그다지 영향력이 없었다. 금리가 떨어지자 유동성은 증가하는데 엔화 강세는 그대로였다. 엔고는 수입물품 가격을 하락시켜 물가가 안정되면서 닛케이지수를 강하게 끌어올렸다. 도쿄 증시는 3년 새 300%나 뛰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부동산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1956년부터 1986년까지 30년 사이에 일본 땅값은 50배 이상 뛰었다. 반면 이 시기 소비자물가는 2배 올랐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땅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987년 10월 14일 미국의 9월 무역적자가 사상 최대로 발표되었다. 시장에 먹구름이 끼며 주식시장에서 달러 약세를 우려한 투자자들의 이탈이 속출했다. 결국 10월 19일 월요일 블랙먼데이 사태가 발생했다. 미국 뉴욕 증시가 전일 대비 22.6%나 폭락한 것이다. 일본은 블랙먼데이 직전 금리인상을 검토했었다. 하지만 블랙먼데이로 인한 세계적인 주가 하락에 제동을 걸기 위해 금리를 계속 낮은 수준으로 억제해야 했다. 이는 일본의 주가와 지가를 또다시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1987년 12월에는 국제결제은행의 바젤회의에서 일본 은행의 보유 지분 가운데 미실현 이익을 자본으로 인정하자는 예외조항이 마련되었다. 그러자 지급준비율에서 자유로워진 일본 은행들은 대출 규모를 늘려 땅값과 주가를 동시에 부양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일본의 거품경제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로 인해 유동성이 폭증해 일본 주가는 1980년대 초 6000포인트에서 1980년대 후반 약 3만8900포인트까지 6배 넘게 올랐다. 그 짧은 기간에 말이다. 일본 은행의 단기대출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가 되었다. 그만큼 투기가 극성을 부렸다. 일본 주식시장의 버블은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인 NTT의 주가만 보더라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1987년 2월 말 NTT 시가총액은 독일과 홍콩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을 합한 것보다 큰 50조엔 수준까지 솟구쳤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버블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누구도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버블로 정점을 향해 치닫는 일본에 결정타를 먹인 사건이 터졌다. 바로 1988년 7월 은행의 건전성 확보를 위해 BIS가 지급준비율을 8%로 제시한 것이다. BIS는 전 세계 은행들이 1992년까지 전체 대출액의 최소 8%를 지급준비금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이를 맞추지 못하면 부실은행으로 분류되어 외화차입이 불가능했다. 이는 국제금융시장과 무역시장에서의 퇴출을 의미했다. 당시 일본 은행들의 지급준비율은 6%에 불과했다. 이러한 조치는 세계에서 지급준비율이 가장 낮았던 일본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
   
   이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음모론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미국이 일부러 일본 은행의 지급준비율을 낮추도록 1987년 말에 국제결제은행 바젤회의에서 일본 은행 보유지분 중 미실현 이익을 자본으로 인정해주는 예외조항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 은행들의 대출규모가 확대되어 지급준비율이 형편없이 낮아지자 미국의 압력을 받은 국제결제은행이 7개월 만에 판을 뒤집었다는 주장이다. 그럴듯하지만 음모론을 부정하는 시각도 있다. 당시 미국 은행들이 무더기 도산하던 때라 일본이 목적이 아닌 미국 은행의 건전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부동산 대출 금지로 정책 급선회
   
   일본 은행은 과열을 해소하고 지급준비율을 맞추기 위해 대출을 억제할 필요를 느껴 서둘러 금리를 올렸다. 1989년 5월 한 번에 0.75%의 금리인상을 시작으로 1990년 8월까지 1년여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무려 3.5%나 인상해 2.5%에서 6%로 금리가 단기간에 두 배 이상 올랐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각종 부동산 규제와 더불어 부동산 세금을 강화하고 ‘부동산융자 총량 제한’ 도입으로 부동산 대출을 금지했다. 경제사에서 보면 언제나 이러한 급선회 정책이 문제다. 일본 역시 이것이 일본 장기불황의 서곡이었다.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이자율을 일곱 차례 잇달아 올렸다. 그러자 부동산 시장이 침체해 일본인 부동산 투자가들이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70%를 미국 은행에서 융자받고, 나머지 30%는 일본 은행이 보증한 투자여서 별안간 닥친 높은 이자율은 부동산 가격을 20%나 급락시켰다. 미국 은행은 그 20%를 보전하라며 일본 투자가들에게 현금을 요구했다. 한 부동산을 담보로 다른 부동산 2~3개를 문어발식으로 매입한 일본인들은 현금 요구를 이행하지 못해 미국 내 부동산을 헐값에 되팔아야 했다. 지금까지 저금리에 푹 빠져 있던 일본 내 개인투자자들도 단기간에 6%까지 치솟은 금리 때문에 부동산을 팔기 시작했다. 증시에도 몰락의 서곡이 울렸다. 금리가 급격히 인상되자 주식수익률이 장기국채수익률을 밑돌면서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서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후 부동산 가격이 꺾이자 부동산 담보대출을 시작으로 부도 도미노가 이어졌다.
   
   그 무렵 일본 상장주식 시장 가치는 전 세계 주식 가치의 42% 이상이었다. 이때 일본 경제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파생상품이 등장했다. 모건스탠리와 살로몬브라더스 같은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은 색다른 파생상품과 새로운 금융기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가지수 풋옵션(put option)’이라는 신상품을 개발해 일본에 판매했다. 이 상품은 일본의 주가상승에 베팅하는 상품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치솟는 주식가격은 버블이 아니라 탄탄한 일본 경제의 힘에 의한 성장세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본의 자신감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닛케이지수가 상승하면 상승하는 만큼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주는 상품이었다. 반대로 주가지수가 하락하면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보는 상품이었다. 상품은 날개 돋친 듯 판매되어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지수가 3만8915를 돌파하면서 일본 투자자들은 큰 이익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1990년 1월 12일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 등 미국 투자은행들은 ‘닛케이지수 풋워런트(put warrant)’라는 신상품을 팔았다. 이는 일본의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상품이었다. 일본에서는 일본 주가지수가 상승하면 일본 투자자들이 큰돈을 버는 ‘주가지수 풋옵션’을 판매하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닛케이지수가 폭락하면 큰돈을 버는 ‘닛케이지수 풋워런트’를 판매해 미국 투자은행들은 양쪽에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다.
   
   닛케이지수 풋워런트가 인기를 끈 지 한 달 만에 공매도에 시달린 일본 증시는 결국 무너졌다. 5년 동안 4배나 급등해 4만포인트 가까이 올랐던 주식시장이 하루아침에 폭락하면서 1992년에는 1만5000포인트까지 떨어졌다. 일본의 대형 금융기관들은 망가지고 1995년 일본의 불량자산이 50조엔을 넘었다. 일본은 미국의 금융 공격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현재도 일본이 유대계 금융인들을 곱게 보지 않는 이유이다.
   
   1990년 들어 버블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하자 일본 경제는 버블 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1990년 여름에는 주가 하락으로 부패 금융 스캔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수많은 투기꾼이 파산했다. 일본 기업들이 사들였던 해외자산들은 다시 헐값에 되팔려 나갔다. 또한 버블 기간 동안 일본 기업의 설비투자가 과잉투자로 드러나면서 일본 경제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부동산 가격은 무려 80% 폭락했다. 일본 정부는 경제와 증시 부양을 위해 1995년 9월 재할인이자율을 사상 최저수준인 0.5%까지 낮추었지만 이미 기차는 떠난 뒤였다. 결국 경기부양에 실패하고, 은행과 증권사의 도산 사태가 이어졌다. 1989년 말 3만8957포인트를 찍은 닛케이지수는 2019년 말 2만3840 부근에서 맴돌고 있으니 최고점 대비 61% 정도만을 회복한 수준이다.
   
   일본은 중국 위안화에도 심하게 당했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에 유명한 백묘흑묘론을 내세우며 중국의 개방화와 세계화를 선언했다. 흑묘백묘론이란 ‘고양이 색깔이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뜻이다. ‘실질적인 것에 따라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같은 의미이다. 중국의 환율정책이 바로 그랬다. 중국은 개방 초기에 수출기업에는 달러당 2.8위안, 외국인 직접투자나 관광객 그리고 민간에는 달러당 1.5위안으로 환전해 주었다. 일종의 수출보조금제도 성격이었다. 당시 암시장 환율 등 3개의 환율이 동시에 존재해 외국인들을 힘들게 했다.
   
   

   덩샤오핑 위안화의 평가절하 단행
   
   그 무렵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국 지도부는 중국이 수출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위안화의 평가절하가 긴요하다고 보았다. 위안화의 가치가 쌀수록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강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술과 자본이 없는 후진국의 경제 발전이 대부분 그렇듯 중국은 값싼 인력을 무기로 세계의 공장을 자임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이 전략의 핵심요소가 환율이었다.
   
   중국은 1981년 위안화 암시장을 양성화해 ‘외환조절센터’를 설립했다. 이로써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결정하는 공식환율인 ‘공정환율’과, 외환조절센터에서 기업 간 외환거래로 형성된 ‘조절환율’을 함께 사용하는 이중환율제도가 시작되었다. 이는 사실 중국 정부가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무역 거래와 비무역 거래에 적용하는 환율을 다르게 하면서 궁극적으로 중국의 수출진흥을 위한 환율정책이었다. 시장 환율인 조절환율이 크게 절하되기 시작하면서 공정환율을 견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위안화의 가치가 싸질수록 임금이 싸져 외국 기업의 중국 투자가 늘어났다. 중국 정부는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인해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역시 위안화 공정환율의 평가절하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84년 달러당 2.8위안이었던 것이 1986년에 달러당 3.2위안, 1989년에는 4.7위안, 1990년 5.2위안으로 연속적으로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경상수지 흑자국으로 돌아섰다.
   
   이렇게 위안화는 계속 계단식으로 평가절하되다가 1990년대 들어 조절환율과 공정환율 간에 격차가 벌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3년 6월 말 공정환율은 1달러당 5.7위안인 반면 시장 조절환율은 10.8위안으로 거의 배 차이가 났다.
   
   경쟁국들은 중국이 수출 시에는 조절환율을 적용하고 원자재를 수입할 때는 공정환율을 적용해 수출에 대한 편법적인 보조금 정책을 쓰고 있다고 중국을 비난했다. 중국 정부는 공정환율로는 위안화 가치가 과대평가돼 시장의 수급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자 1994년 1월 1일을 기해 이중환율을 일원화하고 환율 결정이 시장의 수급 상황을 일부 반영하도록 하는 관리변동환율제도를 도입했다.
   
   환율일원화 결과 1993년 말 달러당 5.8145위안이던 공정환율이 이듬해 관리변동환율제를 도입하자 수직상승해 1월 25일 8.7319위안까지 급등해 한 달도 안 되어 무려 49.8%나 평가절하되었다. 1984년 달러당 2.8위안이 10년 만에 무려 300% 이상 평가절하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점차 하락해 1997년 9월에는 8.28위안대에서 안정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확보하고 수출을 늘리는 동시에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덩샤오핑의 국가적 작전이었다.
   
   중국의 4차례에 걸친 약 300%라는 대폭적인 위안화 평가절하는 달러 기준으로 볼 때 인건비가 3분의1로 줄어든 셈이었다. 제조업은 인건비가 싼 나라로 몰리는 법이다. 외국인 투자자본 유입과 공장 이전 덕분에 중국은 경제 규모에서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300% 위안화 평가절하가 선물한 ‘골디락스’
   
   1997년 말 아시아에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위안화에 대한 절하 압력이 거세지자 중국은 오히려 위안화를 달러화에 고정시키는 페그제를 도입해 사실상의 고정환율제도를 운용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환율은 2005년 중반까지 1달러당 8.28위안으로 미국 달러에 고정되었다.
   
   평가절하된 위안화는 전 세계에 ‘골디락스’를 선물했다. 골디락스란 ‘중국의 값싼 상품이 인플레이션을 상쇄시켜 세계경제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알맞은 성장을 지탱해 주었다’는 뜻이다. 중국은 세계의 제조업을 낮은 가격으로 무력화시켰다. 중국 저가 제품은 주변국의 제조업을 비롯한 전 세계의 1차산업을 무너뜨렸다. 특히 일본이 직격탄을 맞았다. 일본은 미국의 플라자합의보다 중국의 위안화 절하로 맞은 상처가 더 깊고 아팠다. 1889년부터 1995년까지 1위안당 엔의 환율은 200엔에서 50엔으로 무려 4분의1로 추락했다. 이로써 세계에서 가장 제조업 경쟁력이 높았던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공장들이 속속 중국으로 옮겨가자 일본의 산업공동화가 본격화되었다.
   
   일본 기업들의 자이테크 몰두와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협공당한 환율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일본의 세계 수출시장에서의 비중 하락세다. 1990년 당시 일본의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은 8.2%였고 중국은 1.8%에 불과해 4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러나 1994년 중국이 위안화를 40% 평가절하한 이후 가격경쟁력에서 밀린 일본의 수출증가세는 급격하게 꺾이지만 중국의 수출증가세는 폭증하기 시작해 양국 간의 수출 비중은 드라마틱하게 역전된다. 2004년 중국은 일본을 앞서기 시작해 지금은 일본에 비해 4배나 많이 수출하고 있다. 그만큼 환율의 힘이 컸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과 닛케이지수 역시 지난 30년 동안 힘을 못 쓰고 오히려 후퇴했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 4만2516달러 이후 횡보를 거듭하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방사능이 누출되면서 다시 급격하게 꺾여 2019년 말 기준, 3만8100달러대에 머물고 있다.
   
   플라자합의 이후 환율 조정으로도 미국의 무역적자는 회복되지 않았다. 미국은 작전을 바꾸었다. 제조업 수출이 아닌 달러 수출, 곧 ‘금융’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미국은 다시 한번 선진 7개국 모임을 갖는다. 이른바 1995년의 ‘역플라자합의’다. 그리고 플라자합의와는 정반대로 달러 강세를 만드는 데 합의했다. 플라자합의 때는 약달러를 통한 무역적자 축소를 목표로 했지만, 역플라자합의에서는 강달러를 통한 기축통화 지배력 증대를 목표로 했다.
   
   ‘강한 달러화→미국으로 자본유입→주가상승·금리하락→소비증가·투자증가→수입증대→경상수지 적자확대→전 세계 동반성장’이라는 금융 중심의 글로벌 성장 패러다임을 미국이 선진국들의 협조를 얻어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미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주식시장을 타깃으로 정했다.
   
   이후 미국 달러가치가 50% 이상 올랐다. 강세 통화로 돈이 몰리는 법이다. 미국으로 달러 유입이 급증하면서 나스닥이 5000포인트까지 상승해 금융시장이 호황을 맞았다. 호황으로 소비와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자 그린스펀은 금리를 빠르게 올렸다. 그러자 금리폭등과 IT 버블붕괴로 나스닥은 5000포인트에서 1000포인트까지 수직낙하했다.
   
   위안화의 대폭 평가절하 이후 위안화가 너무 저평가되어 있다는 인식이 퍼지자 조금씩 절상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역풍이 불었다. 외국인 자본이 일본과 아시아의 신흥국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급속히 이동했다. 이런 유동성의 이동은 일본 경제에 치명타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이러한 외국인 자본의 급속한 중국 이전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달러가 중국으로 빨려들어가자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발했다.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 등 일부에서는 “아시아 금융위기는 위안화가 대폭 평가절하되어 발생했다”고 말했다. 동남아 외환위기에 이어 우리나라도 그 불똥을 피하지 못했다. 1997년 한국의 IMF 사태가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말하면서 한국도 비슷한 과정을 따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몇 가지 간과하는 것들이 있다. 일본 경제가 잘나가자 일본 기업들이 자이테크라는 돈놀이에 빠졌으며 여기에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심하게 환율전쟁 공격을 당해 빈사상태에 놓였다. 게다가 1987년 루브르합의 이후 내수경기를 부양한답시고 부동산 담보대출비율을 120%까지 높이며 부동산 경기를 부추겼다. 이렇게 내부적으로는 ‘자이테크’라 불린 돈놀이와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환율 공격 그리고 바젤과 파생상품 공습이 오늘날 일본 경제를 망가트린 주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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