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한파가 덮친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한 시민이 담요를 뒤집어쓴 채 거리를 걷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2월 한파가 덮친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한 시민이 담요를 뒤집어쓴 채 거리를 걷고 있다. ⓒphoto 뉴시스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민주국가인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비교적 온화했던 겨울의 끝자락에 찾아온 폭설·한파에 미국의 부끄러운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한파 관련 사고로 전국에서 70여명이 사망했다. 특히 텍사스에서는 450만가구에 전기·수도·가스 공급이 중단되어 40여명이 사망하고, 190억달러의 피해가 발생했다. 빌 게이츠가 기후변화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폭설을 쏟아부었다는 황당한 음모론도 퍼지고 있다. 후진국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재난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코로나19의 방역에 참혹하게 실패했다. 전 세계 감염자의 25.5%와 사망자의 20.7%가 미국인이다. 단연코 세계 최악이다. 방역을 포기하고도 연임에 실패해버린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도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폭도들이 폭력적으로 의사당에 난입하는 ‘폭동’도 벌어졌다. 허황한 트럼프주의와 시대착오적인 백인우월주의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는 극우단체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결국 요란하고 떠들썩했던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는 속 빈 강정이었던 셈이다.

선벨트를 덮친 겨울 폭풍

지난 2월의 미국 날씨는 몹시 거칠었다. 태평양에서 발달한 강력한 저기압이 미국 대륙을 빠른 속도로 횡단하면서 북극의 냉기를 끌어내렸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2월 10일부터 열흘 사이에 폭설을 동반한 겨울 폭풍이 3차례나 연이어 발생했다. 북극의 찬바람이 미국의 70%에 이르는 지역을 덮치면서 1억7000만명의 주민이 한파에 시달렸고 1000만명이 정전(停電)으로 불편을 겪었다.

사실 미국에서 겨울 폭풍은 일도 아니다. 무작정 지구온난화 탓이라고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다. 특히 캐나다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중서부와 동북부 지역에서 폭설과 한파를 동반한 겨울 폭풍은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평소 겨울 추위에 익숙한 주민들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 누구나 난방 설비를 점검하는 것이 상식이다. 폭설에 대비해서 도로의 제설 준비를 단단히 갖추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물론 겨울 날씨가 온화한 남부 지역은 사정이 다르다. 겨울에도 최저기온이 섭씨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문 디프사우스의 선벨트에서는 난방설비가 무용지물에 가까운 사치다. 눈 구경이 소원인 상황에서 굳이 적지 않은 비용을 낭비하면서 제설차량이나 제설제를 마련해둘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선벨트가 추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미국의 최남단인 플로리다에도 가끔씩 ‘한파’가 찾아온다. 물론 폭설이 내리거나 강과 호수가 꽁꽁 얼어붙는 수준의 한파는 아니다. 그러나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주민들에게는 섭씨 0도 정도의 냉기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느낀다. 주민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렌지와 같은 아열대성 과수에도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한다. 드넓은 농장의 오렌지 나무를 살려보겠다고 장작불을 피워놓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다행히 그런 ‘한파’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남부 지역에 지난 2월 15일 30년 만의 최강 한파가 몰려왔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폭설이 쏟아졌고 사흘 동안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다. 온화한 겨울 날씨에 익숙해 있던 주민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난방설비를 갖추지 않은 이동식 주택(트레일러)에서 잠들었던 어린아이가 아침에 깨어나지 못하는 참혹한 일도 벌어졌다.

어설픈 에너지 전환과 경제 논리

그런데 텍사스 주민 2900만명을 괴롭힌 진짜 주범은 폭설과 한파가 아니었다. 블랙아웃에 가까울 정도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한 정전이 훨씬 더 큰 문제였다. 깨끗하고, 편리하고, 안전한 전기에 모든 것을 의존해왔던 주민들에게 정전은 그 자체가 재앙이었다. 갑자기 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통째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가로등도 꺼져버렸다.

정전은 시작일 뿐이었다. 보온에 신경을 쓰지 않고 설치해놓은 수도관이 얼어 터지고, 가스관도 막혀버리면서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텍사스 주민의 절반이 먹을 물도 구할 수 없고 음식을 조리할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화재 진압에 쓰는 소방전도 얼어버렸다. 미국의 석유와 가스의 대부분을 생산해서 ‘미국 에너지의 심장’으로 알려진 텍사스의 주민들이 전기와 가스가 없어서 생명을 위협받는 현실은 역설적이었다.

텍사스 정전 사태는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것이었다. 공화당 출신의 주지사 그레그 애보트가 처음에 밝혔듯이 풍력·태양광설비가 폭설과 한파에 얼어붙어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천연가스(LNG)발전소도 얼어붙고, 원전 3기 중 1기가 고장나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기습 한파로 전력 수요가 치솟으면서 46기가와트의 전력이 부족해졌지만 주 정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텍사스의 블랙아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2011년에도 전력공급에 심각한 문제를 경험했었다. 텍사스는 전력공급에 관한 한 미국에서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는 ‘전력섬’이기 때문에 반복되는 재앙이다. 텍사스 전역의 전력공급을 관리하는 텍사스전기신뢰성위원회(ERCOT)는 미국을 동부·서부로 구분해놓은 광역 송전망과의 연계 운영을 거부해왔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송전망의 안정성보다 민간 전기사업자들의 자율성·독립성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텍사스는 강력한 에너지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는 중이다. 석탄을 줄이고 풍력과 태양광을 집중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전체 전력공급의 40%를 차지하던 석탄화력을 18%까지 줄여버렸다. 원전의 비중도 11%로 낮아졌다. 그 대신 천연가스가 44%로 늘어나고, 풍력도 23%로 확대되었다. 전체 전력공급의 27%를 차지하는 태양광을 포함한 신재생의 간헐성을 극복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전기는 독특한 특성을 가진 재화(財貨)다. 모든 발전사와 모든 소비자가 하나의 송전망으로 연결되어야만 하고, 생산과 소비가 반드시 실시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일반적인 자유시장에서의 자율적 경쟁 원리가 끼어들기 어려운 구조다. 소프트웨어적 경쟁은 의미가 없다. 변동요금제로 싼 요금을 강조하던 전기공급 업체가 소비자에게 300배가 넘는 요금폭탄을 떠안기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쟁을 강조하는 경제 논리가 전력망의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운영과 충돌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결국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만고의 진리는 전기의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텍사스 정전 사태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우리도 겨울철 전력 수요가 위험할 정도로 치솟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혹시라도 깊은 야밤에 강력한 시베리아 북풍이 덮쳐오면 우리의 전력공급 상황도 갑자기 불안정해질 수 있다. 정부가 무분별하게 확대하고 있는 태양광·풍력도 시베리아의 북풍한설(北風寒雪)에 무용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도 정전이 되면 추위를 극복할 수단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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