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1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제3차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1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제3차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달아오르고 있는 대선 정국을 지켜보는 과학계의 입장이 몹시 난처하다. 어수선한 대선 무대에서는 경제·외교·국방·안보·교육·산업·복지와 같은 국가의 핵심 의제들이 모두 자취를 감춰버렸다. 당연히 과학기술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19금 수준의 ‘X파일’과 낯 뜨거운 ‘바지 타령’이 국민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여’와 ‘야’, ‘보수’와 ‘진보’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정말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런 대선주자들이 밀실에서 만들어낼 공약에 대한 기대는 버릴 수밖에 없다. 오히려 대선후보에게 과학기술을 절대 선무당급 ‘점령군’에 맡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

반세기의 성과가 부정, 퇴출당했다

우리도 ‘과학기술입국’과 ‘과학기술중심사회’를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 최악의 빈곤에서 우뚝 일어서고, IMF 환란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이 모두 그런 노력 덕분이었다. 어색하지만 ‘녹색성장’과 ‘미래창조’를 외치기도 했다. 비록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겠다는 각오만은 가상했다. 과학기술을 홀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푸념은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렇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려졌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시작한 과학기술계가 반세기 동안 땀 흘려 이룩한 성과들이 통째로 부정·퇴출당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이 그렇고, ‘정유·화학산업’이 그렇다. 국민 안전을 지켜주고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알량하고 비현실적인 명분을 앞세운 ‘탈원전·탈석탄’과 ‘화평법·화관법’이 원전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의 퇴출을 강요하고 있다. ‘공정’과 ‘정의’로 포장된 내로남불식 기업 정책에 국가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 산업도 흔들리고 있다.

과학기술 정책의 거버넌스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이제 짧지만 화려했던 ‘부총리’ 부서의 기억은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 정체불명의 교육과학기술부·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미래창조과학부를 거쳐 등장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허울뿐인 부처로 전락해버린 현실이 훨씬 더 엄중하다. 정부 부처에서 존재감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과학기술계에 실질적 리더십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생뚱맞게 되살려놓은 부총리 시절의 ‘혁신본부’는 잘못된 인사로 시작부터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대통령이 의장을 맡고 있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나 청와대의 과학기술보좌관도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사실 대통령이 과학기술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현실에서 자문회의나 보좌관에 대한 기대는 부질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목소리가 사라진 지리멸렬 과학계

과학기술 분야의 정부출연연구원을 총괄·관리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도 대선캠프 출신의 코드 인사에 이은 리더십 공백으로 기능 상실 상태에 빠져버렸다.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목표도 애매하고, 전문인력도 부족한 현실을 무시하고 바이러스 기초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를 유치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학기술계도 지리멸렬한 상황이다. 후쿠시마원전 사고로 ‘2016년 3월 현재 1368명이 사망했다’는 괴담으로 시작한 ‘탈핵국가’ 선언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공식적인 반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2월 코로나19 진단키트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과학기술계의 놀라운 성과를 엉뚱하게 ‘민주주의’와 ‘투명성’으로 포장해버린 외교부 장관의 망언에 대한 반론도 없었다. 코로나19의 4차 확산에서 과학기술은 온전하게 사라져버렸다. 기재부가 총대를 메고 시작했던 소재·부품·장비 자립화 노력도 황당하다. 소부장의 자립은 단순한 아이디어나 의욕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기술력·자본력과 함께 ‘생산시설’이 필요한 일이다. 아파트가 그렇듯이 소부장도 ‘밤을 새워서 구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순도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일본의 스텔라케미파의 합작회사인 솔브레인이 당진에 공장을 짓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수출 규제 이전의 일이었다. 인터넷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팩트다. 화학기업들의 자발적 협력의 성과를 정부의 성과로 포장하는 일은 이제는 버려야 할 낡은 관습이다.

과학기술계가 정부의 비현실적인 ‘탄소중립’에 대해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안타깝다.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탄소중립은 외면할 수는 없는 중차대한 일이다. 그런데 탄소중립은 어설픈 정치적 구호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탄소중립은 사회학을 전공한 환경론자가 어설프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 과학기술계의 책임이고 의무다.

민주화 이후의 경험을 냉정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민영화를 외치던 문민정부는 지금까지 고질병으로 남아 있는 출연연의 PBS(성과주의예산제도)를 도입했고, 국민의정부는 정체불명의 6T(IT·BT·NT·ET·ST·CT)를 앞세운 벤처·창업 열풍으로 대학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참여정부는 낯선 코드 인사로 ‘황우석 사태’라는 국제적으로 부끄러운 대참사를 일으켰다. 어설픈 부총리급 격상이 과기부를 아예 정부 조직에서 퇴출시키는 빌미가 돼버렸다.

아담한 입자가속기를 기반으로 하는 물리학자의 소박한 은하도시의 꿈을 거창한 ‘과학비즈니스벨트’로 뻥튀기해서 만들어놓은 기초과학연구소(IBS)는 지금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알맹이 없는 녹색성장과 4대강 사업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불신을 키워놓기도 했다. 창조경제와 탈원전·소득주도성장 때문에 국민들이 과학기술을 불신하게 된 것도 안타깝다.

과학기술계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선 대선주자들의 어설픈 주장에 절대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현재 언론에 소개되는 후보들 중에서 진심으로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진 후보는 없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 후보들이 밀실에서 은밀하게 만들어낼 ‘대선 공약’에 일희일비할 이유도 없다. 부총리 부서 승급처럼 과거의 실패한 경험을 되풀이하겠다는 후보의 어설픈 구상은 믿을 이유가 없다.

과학기술계가 모든 후보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연구도 하지 않고, 정책 수립에도 참여하지 않던 변방의 어쭙잖은 인사들에게 과학기술정책을 맡겨버리지 않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아야 한다. 과학기술이 더 이상 어쭙잖은 점령군에 시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실제 그동안의 폐해가 여간 심각하지 않았다. 세계적 과학자였던 KAIST 총장과 유전자편집 전문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도 그런 깜짝 스타였고, 출연연에 300년 전 지구 반대쪽의 낯선 ‘르네상스’의 부활을 강요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과학기술의 진정한 발전에는 선무당급 깜짝 스타가 필요한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확실한 전문성과 오랜 경륜을 가진 과학자가 현장에서 갈고닦으면서 가지게 된 현실적 비전이 필요하다. 과학기술계가 그런 사실을 후보들에게 확실하게 일깨워줘야 한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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