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하면 바다와 오름의 색깔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 사이에는 또 다른 제주의 색깔이 있다. 제주를 찾는 객(客)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색깔이다. 사진작가 조의환도 다르지 않았다. 일 때문에 수십 년 제주공항 문턱이 닳도록 오갔지만 객의 눈으로 바라본 제주는 똑같았다. 10년 전 제주로 이사하고 제주도민이 된 그의 눈에 비로소 제주의 다른 풍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올레길을 벗어나 들판과 마을길을 누비던 어느 날이었다. 하얀 각선미를 드러낸 무가 수없이 널린 밭을 만났다. 출하 시기를 넘기고 버려진 무였다. 시골 출신인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한자의 형태는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둥글둥글 그림 같은 형태가 아직 남아 있는 서체는 전서(篆書)이고, 상형문자의 회화적 요소를 벗어나 문자의 기호적 요소를 완성한 것이 예서(隸書)이다. 예서가 현대 한자의 출발점인 셈이다. 철권통치를 했던 진(秦)나라 때 수많은 노역 죄수를 관리하기 위해 간편하고 쉬운 문자가 필요해 만들어진 탓에 노예 예(隸) 자를 써서 예서가 됐다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글씨체는 그 사람을 드러낸다. 옛 서예가들은 글씨에 혼과 마음을 담았다. 컴퓨터 키보드 두드리느라 손글씨의 감성을 잃어버
계절과 변화 사이, 별자리와 우주의 움직임, 가장 근원적인 선들, 수수께끼와 호기심…. 안현곤 작가의 기억 저장소에는 파편화된 단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를 사로잡는 언어들은 과학적 질서가 지닌 임의성과 자연의 우연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 언어들을 꺼내 캔버스에 풀어낸다는 것은 유쾌한 상상의 과정이기도 하고 신성한 의식이기도 하다.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내든 작가가 바라보는 지점은 자연의 변화와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들이다. 거기서 얻은 감흥들을 마음의 필터로 걸러내고, 그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것을 찾아낸다. 비밀스러운
팬데믹 시대,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거공간의 역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먹고 자는 곳을 넘어 집이, 정원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윤정숙 ‘하우스퍼즐’전형형색색 지붕에 자유분방한 형태의 집들이 퍼즐처럼 이어진 풍경이 동화 속 요정 마을 같기도 하고 중세시대 골목길 같기도 하다. 매일 축제가 열릴 것 같은 이곳에는 어떤 바이러스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 같다. 네모반듯한 아파트에 익숙한 우리에게 즐거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하우스퍼즐’의 작가 윤정숙의 그림이다.
가는 봄도 아쉽고 지는 꽃도 아쉽다면 도심에서 할 수 있는 색다른 꽃구경이 있다. 진달래, 모란, 유채…. 갤러리마다 화려한 꽃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로 지난해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기를 보낸 갤러리들이 어렵게 피워낸 꽃들이다.‘진달래 작가’의 축복, 김정수전[image1]올해도 고대하던 진달래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활짝 피었다. 봄이면 더 바빠지는 ‘진달래 작가’ 김정수의 ‘진달래-축복’전이 선화랑에서 5월 11일까지 열린다. 프랑스 파리에 살던 작가가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아 헤매다 찾은 것이 진달래였다. 진달래는
신석기시대에 한반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토기로 알려진 빗살무늬토기. 계란형 토기의 겉면에 빗살, 동그라미, 점 등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편의성에 미적감각을 더한 신석기시대 대표 유물 중 하나다. 오래전 한반도의 인류가 사용했던 이 토기에 현대적 해석을 더하는 도예가가 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김호정이다. 한반도 빗살무늬토기 특유의 길고 완만한 곡선을 모티브로 삼아 그 위에 다양한 색깔과 질감을 얹는다. 말 그대로 가장 한국적인 것과 가장 현대적인 것의 조화다.세계 도예시장은 작품의 가치를 빠르게 알아봤다. 지난 2월 독
깊은 바다에 들어와 있는 듯 하다. 수면을 뚫고 바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온 빛은 환상의 무대를 만든다. 무대 위로 무수한 물고기 떼가 지나간다. 유영하는 물고기 떼는 왕성한 생명력을 전해준다. 부드러운 듯, 에너지 넘치는 붓질의 흐름을 따라 가다보면 헤엄을 치고 있는 착각마저 든다. ‘바다’의 작가 이근화가 서울 도심 한가운데 바다를 펼쳐놓았다. 작가는 스쿠버다이빙을 통해 경험한 바다를 오랫동안 캔버스에 옮겨왔다. 인간의 시선이 미치지 못한 곳, 그 곳에서 바다 생물들이 벌이는 현란한 생의 에너지를 독특한 방법으로 선보여 왔다. 여
석과불식(碩果不食), 주역의 64괘 가운데 박괘에 나오는 말로 ‘마지막 남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높은 가지 끝에 위태롭게 달려 있는 한 개의 큰 과일이 종자가 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자신의 퇴임 강연에서 ‘석과불식’을 우리가 지켜야 할 희망의 단어로 제시하고 “석과는 먹히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은 꺾이지 않는다’는 의지를 담은 신영복 교수의 ‘석과불식’이 30년 동안 외로운 작업을 이어온 무명작가의 전시장에서 싹을 틔웠다.서울 예술의전당 한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그 집,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갈 때 되면 그제야/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연탄’, 시인 이정록 (‘진심, 아버지를 읽다展’ 전시작품 중에서)“이런 게 진짜 문학작품 아닌가요.” 김정현 작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래 홀로 지내다 돌아가신 어느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일기 한 대목 앞에서였다. ‘시래기를 삶았다. 된장국을 끓이려고. 어머니 생각이 난다.(2월 11일)’ ‘재석이
한·중 양국의 풍경을 담은 ‘신수묵’이 한국을 찾는다. 노주 주칭준 작가 특별전이다. 신수묵(新水墨)은 이름 그대로 새로운 수묵화다. 기존의 수묵화에 다양한 기법과 소재를 도입해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풍을 뜻한다. 도시의 풍경을 담거나, 수묵에 채색을 가미하는 식이다. 2012년 이래 중국 미술계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폴리, 가디언 등 중국 국내 미술 경매에선 신수묵 작품들이 여러 번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치바이스 같은 전통 수묵의 거장을 넘어 신수묵에까지 컬렉터들의 관심이 넓어졌단 얘기다.주칭준(73) 작가는 장쑤성 출신으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 들어가면 해금강이 펼쳐진다. 벽 한 면을 가득 메운 작품 ‘총석정의 파도’다. 김성근 화백이 그렸다. 파도를 잘 그려 ‘김파도’로 불리기도 한 이다.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등 평양을 찾았던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바로 그 그림이다.[image2]요즘 서울 삼청동 한벽원미술관에 가면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해금강 파도를 볼 수 있다. 변형 500호 크기의 캔버스에 파도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 그림은 김성근 화백이 아닌 한태순 화백의 ‘파도’다. 한태순도 북한에서 유명한 화가다. 김성근, 한태순
석가모니의 생몰연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남방불교에선 기원전 624년으로, 북방불교에선 기원전 1026년으로 태어난 해를 추정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경우는 확실하다. 기원전 356년에 태어나 기원전 323년에 생을 마쳤다. 세기를 넘어 두 인물이 조우했다. 간다라 지방에서다. 이 만남은 ‘불상’을 낳았다.[image1]간다라(Gandhara)는 간다리족이 사는 땅이란 뜻이었다. 왕조들의 흥망성쇠를 거치며 특정 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시대별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분지 일대를 가리킨다. 스물
계기는 뉴욕타임스 문화면에 실린 ‘레드카펫’ 기사였다. 눈에 익은 스타들이 등장하는 현란한 패션 화보가 신문 전면에 실려 있었다. 연예계 스타들을 모델로 등장시킨 패션쇼는 21세기 모바일 셀피 시대의 단골 눈요기다. 수백만 팔로어를 거느린 스타들이 연출하는 나르시시즘 퍼포먼스의 광경은 언제나 비슷하다. 무대에 서는 스타도, 팔로어들도 자기에 도취해 사진을 찍어댄다. 이런 패션쇼를 심드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특별히 의상 디자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특별할 것이 없는 천편일률적인 쇼라고 느낀다.레드카펫 관련 기사를 대충 넘기
상하이의 꽃내음이 서해를 건너온다. 1843년 개항 이후 100여년간 중국 상하이는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중국 문화의 중심지를 무대로 활약한 화가들을 ‘상하이파’ 혹은 ‘해상화파’라고 부른다. 조지겸, 임백년, 오창석 등이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상하이파 화풍은 현재까지 이어져온다. 이 중 40점이 한국을 찾는다. 양정신, 궁지셴, 천치,황아중 등 상하이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이다. 대부분이 화조화다. 꽃·새·나무를 현대적 감성의 수묵채색화로 흥미롭게 해석했다. 봄날에 마주하니 마음이 들뜬다. 전시는 상하이시 대외문
‘동쪽에서 온 사람’. 셰르파의 원뜻이다. 셰르파는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돕는 등반 안내자의 의미로 흔히 쓰인다. 정확히는 네팔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사는 민족을 가리킨다. 이들만이 쓰는 언어인 셰르파어도 따로 있다. 셰르파족 아이들을 포함한 9명의 네팔 아이들이 동쪽의 끝, 한국을 찾는다. 엄홍길휴먼재단(이사장 이재후)이 초청했다. 엄홍길휴먼재단은 2008년 탄생했다. 엄홍길 대장이 히말라야 8000m 16좌 완등이란 위업을 달성한 이듬해다. 재단 창립 직후부터 히말라야의 셰르파 마을에 학교를 짓고 있다. 12개는 완성했고 3곳은
영국의 테이트미술관은 파리 퐁피두, 뉴욕 모마(MoMA)와 함께 세계 3대 현대미술관 중 하나다. 테이트미술관은 영국 곳곳에 자리한 네 개의 갤러리로 이뤄져 있다. 런던에 있는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런던,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 영국인이라 해도 테이트미술관의 모든 컬렉션을 보기 힘든 이유다. 미술관은 20세기와 21세기의 기억을 풍경, 정물, 역사, 누드로 분류했다. 이 중 ‘누드’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한국으로 외출 나왔다. 테이트 런던, 테이트 모던, 테이트 리버풀의 소장품 중 총 122점을 선정했다. 피카소, 마
올해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37년 9월 21일, 러시아 극동지역 고려인 18만여명은 스탈린 긴급명령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강제수송열차에 실렸다. 열차가 설 때마다 짐짝처럼 내던져진 강제이주 행렬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를 시작으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으로 이어졌다. 그 길을 다시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다. ‘아리랑 로드 10만㎞ 대장정’ 답사대이다.답사대는 대장 이정면(92) 유타대 명예교수, 부대장 류승호(75), 사진가 류승률(69), 작가 서용순(57·이지출판 대표) 등 4명이다. 고려인들의 삶 속에
[image1]대나무를 쪼개 벽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올렸다. 벽 시늉만 냈을 뿐 얼기설기 얽어놓은 대나무 사이로 바람과 햇빛이 숭숭 드나든다. 건물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이곳은 학교다. 과학실, 컴퓨터실, 도서관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화장실은 대나무와 양철로 둘러놓은 수준이다. 흙먼지가 날리는 교실에는 책상 몇 개와 낡은 칠판이 전부다. 책상이 부족해 아이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한다. 건기(乾期)는 그나마 다행이다. 우기(雨期)가 되면 비가 들이치고 불어난 강물이 등굣길을 막아 걸핏하면 휴교를 해야 한다.인도 동북부
[image1]그림을 한참 들여다봤다. 몇 걸음 떨어져서 보고, 코를 박고 보고, 좌로 보고 우로 보고, 그림인지 사진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내고 발을 잡는 데 작가는 일단 성공했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백색도시는 마치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미래도시 같다. 유리상자 속 경주 안압지 모형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림은 낯익은 풍경이지만 새롭다. 사실적인 하늘과 가장 비현실적인 건축 모형을 대비해 놓은 화면은 가상과 실제의 경계가 모호하다. 사진 같은 그림은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정소연(49) 작가
198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미술대전(미전)의 위상은 대단했다. 신인작가들의 등용문이었던 미전의 대상 수상자는 청와대에 초청받아 대통령과 함께 만찬을 즐길 영예가 주어졌고 남자의 경우 병역면제 혜택이 주어졌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국가대표급 대접이었다. 부상으로 해외여행 특전도 따랐다. 조각가 정대현(60) 서울시립대 교수도 병역 미필이다. 그는 1984년 미전에서 조각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구상 조각으로 데뷔한 그가 최근 전시를 갖고 40년 넘게 찾아 헤매던 방황의 결과물을 내놓았다.정대현 개인전(5월 30일까지)이 열리는 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