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강원도 철원은 북한 땅이었다. 현대무용의 선구자 최승희(1911~1967)는 북한 전역을 다니며 발레 꿈나무들을 뽑았다. 강원도에서도 두 명이 선택됐다. 그중 한 명이 다섯 살 여자 아이였다. 토슈즈는 아이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어떤 무대인지도 모르고 공연에 동원돼 무대 위를 훨훨 날아다녔다. 최승희는 아이의 끼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한국전쟁 통에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남한으로 넘어왔다. 아이의 가방엔 몰래 챙긴 토슈즈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토슈즈를 신을 기회는 영영 없었다. 엄마는 외동딸이 예술가가 아니라 평
8년 전, 나희경(31)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줄기차게 음악을 하고 싶어했지만 부모는 외동딸이 계속 공부하길 바랐다. 그나마 대학에서 음악인지심리학을 전공한 것은 그와 부모가 한발씩 양보한 결과였다. 유학을 결정한 후 그는 부모를 모셔놓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유학을 가서 석·박사를 마칠 경우 비용과 기간이 얼마나 드는지를 표, 관련자료 등을 동원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모를 설득했다. “유학 가면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전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음악을 딱 1년만 하게 해달라.” 간절함이 통했
문자 그대로 ‘작열하는’ 태양이 지면에 내리꽂히는 한낮, 이탈리아 베로나의 고대로마 원형경기장 앞에서 소프라노 여지원(38)을 만났다. 올해로 105년을 맞은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그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사랑에 목숨을 던지는 류(Liu) 역을 맡았다. 한국 출신 성악가로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주요 배역을 맡은 것은 이례적이다.“12년 전 이탈리아에 처음 왔을 때, 베로나 페스티벌을 봤어요. 제일 싼 학생표를 사서 낮 12시부터 줄을 섰지요. 하루 종일 햇볕에 달궈져서 따끈따끈한 꼭대기 돌 좌석에 앉아서도 너
분홍, 파랑, 노랑, 원색의 샹들리에가 화려하다. 하얀 공간에 총천연색 구름이 걸려 있는 것 같다. 가까이서 보니 샹들리에의 재료가 독특하다. 사람을 닮은 인형 수백 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인형들은 색깔도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구슬을 온몸에 감고 있는가 하면 파란색 털실 뭉치를 드레스처럼 걸치고 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희한한 모양의 플라스틱 모자를 쓰고 있는 인형도 있다. 핑크색 구슬이 두 눈에 박혀 있는가 하면 노란색 공이 머리 대신 붙어 있다. 인형을 치장한 재료들은 비닐, 구슬, 헝겊, 플라스틱 조각 같은 것들이다.
디바를 만나러 서울 서초동에 갔다. ‘디바 야누스’. 재즈클럽이다. 교대역 1번 출구 부근에 있다. 지난 2월 7일 오후 3시, 문은 잠긴 채다. 닫힌 유리문 너머로 컴컴한 무대가 보인다. 주변엔 의자가 흩어져 있다. ‘저녁 8:30 공연’이라 쓰여 있는 작은 흑판이 보인다. 클럽의 사장 겸 관리자 겸 출연자가 달려온다. 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재즈보컬 중 한 명이다. 1998년에 첫 음반을 냈으니 대중과 만난 지 이제 꼭 20년 차다. 클럽에서 노래하다 늦깎이로 낸 음반이다.앉자마자 물었다. “디바 야누스 운영하며 돈 좀 많이 버
최근 7~8년 사이 뮤지컬시장 규모는 4배 넘게 성장했다. 뮤지컬시장이 커지면서 창작뮤지컬은 항상 ‘뮤지컬의 미래’라는 기대를 받는다. 그러나 막상 창작뮤지컬시장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매년 쏟아지는 창작뮤지컬 작품 수만 해도 몇백 건이다. 이 중에서 무대에 올라가는 작품은 손에 꼽는다. 무대에 올라가도 금세 잊혀지는 작품이 대다수다. 관객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고 투자자를 끌어모으며 이듬해에 더 큰 무대에 서게 되는 작품은 극소수다.이런 상황에서 한 해 두 편의 창작뮤지컬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린 뮤지컬 작가가 있다. 뮤지컬 ‘
“왕릉 하면 뭐가 생각나세요? 저는 태릉갈비, 광릉불고기 같은 먹는 게 제일 먼저 생각났어요.” 청중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어요. 조선시대에는 소가 귀했잖아요. 아무 때나 소를 잡을 순 없었어요. 왕릉에서 제를 지내는 날이 거의 유일하게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이었어요. 그래서 능 이름 뒤에 소고기 요리가 붙은 거예요.”지난 12월 5일 저녁 7시 서울 노원구의 노원평생교육원. 강당에 청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김현정(29) 화가가 강연을 시작한 참이었다. 주제는 ‘한국화가 김현정의 조선왕릉
역대 국내 미술전시회 사상 가장 비싼 보험료를 낸 전시는? 2015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전시이다. 보험사가 산출한 작품 평가액은 2조5000억원. 보험평가액이 비싸다는 말은 그만큼 작품값이 비싸다는 말이다. 매년 최고가 기록 경신이 이어지는 미술경매 시장에서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 ‘넘버 6’는 2100억여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 ‘톱 5’에 들어 있다.두 번째로 보험가액이 비싼 전시는? 오는 12월 2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현대조각의 거장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
지난 11월 2일 다큐멘터리영화 ‘올드마린보이’가 전국 70여개 스크린에서 관객을 맞았다. 그리고 2주째 ‘올드마린보이’는 스크린에서 하나둘 내려지고 있다. 흥행 참패다. 다큐영화가 관객 1만명을 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의외의 결과는 아니다. 그렇지만 진모영(47) 감독의 영화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의 전작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는 800개가 넘는 스크린에 올라 관객 480만여명을 불러모았다. 역대 다큐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하며 그해 겨울을 뜨겁게 달궜다. 그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만큼 3년
1391년 4월,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방산사기장 심룡(沈龍)은 극비리에 백자 네 점을 빚었다. 방산에서 나는 백토로 만든 사발 모양의 백자들이었다. 심룡은 백자에 특별한 염원을 담은 발원문을 새겼다. ‘대명 홍무 24년 신미 4월 일에 소원을 빕니다’로 시작하는 발원문이었다. 만일 그 내용이 알려지는 날에는 삼족을 멸할 일이었다.조선 건국 1년4개월 전의 일이다. 사발 두 개에 173자와, 83자로 음각한 발원문은 이성계와 그의 추종자 1만명이 ‘새로운 미륵세상’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심룡은 한 개의 그릇 바닥굽에 ‘신미년4월일
웹툰작가 윤서인(44)씨는 이념 전선의 최일선에서 우파 쪽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이다. 윤 작가 웹툰의 대부분은 좌파세력을 겨냥한 비판이다. 그의 페이스북에선 이를 둘러싼 공방이 치열하다. 페이스북 팔로어만 3만명에 달해 그의 페이스북은 이념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윤 작가도 자신을 비판하는 네티즌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전사(戰士)로 만들었을까?지난 10월 21일 서울 수유동 그의 집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윤 작가의 첫인상은 앳된 소년 같았다. 이력에서도 우파의 전사란 느낌을 받기 어려웠다. 건국대 산업디자
독일 쾰른 성 베드로 성당은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쿤스트 스타치온(Kunst-Station), 예술정거장이라는 뜻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아니쉬 카푸어, 신디 셔먼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전시회가 열리고 수시로 음악회가 열린다. 의자도 평소엔 치워놓는다.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에 들어서면 텅 빈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흰 돌로 만들어진 제대이다. 어느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반듯한 제대가 아니라 추상 조각 같다. 현대조각의 거장으로 불리는 에두아르도 칠리다(1924~2002)의 작품이다.미사 때마다 이 제대에 올
말렛(마림바를 연주하는 스틱)을 쥔 손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두 개의 말렛이 나무 건반을 두드리고 지나가자 공명관을 통해 투명하고 맑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말렛과 손이 마치 하나처럼 움직인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속도가 빠르고 강렬한 곡이다. 마치 건반 위를 벌떼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지난 9월 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근처 연습실, 마림바 연주자인 전경호(29)씨를 만났다. 오는 9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독주회를 앞두고 있다. 이번 독주회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마림비스트로서 본격적인
‘자나깨나 강다니엘’ ‘내 사랑 방탄소년단’을 외치는 아이돌 광팬들은 5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있었다. 시골 5일장에 광대패들이 떴다 하면 구름처럼 팬들이 몰려들었다. 흙마당에 세워진 가설무대였지만 흥만큼은 잠실경기장 아이돌 콘서트 못지않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장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광대들의 친구 김철호(71)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평생 광대들을 쫓아다닌 그의 ‘덕후질’은 요즘 세대들도 두 손 들 만큼 유난스럽다. 다시 태어나면 소리꾼이나 굿 무당이 되고 싶다는 그의 삶은 신명에 울고 웃는 광대와 다름이 없었다.
‘보름이는 학교를 가는 대신 아버지가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매일 미싱을 돌린다. 보름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모든 것을 투자하면서 딸의 교육은 관심이 없다. 기계처럼 매일 공장만 지키는 보름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한다.야채가게를 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형식.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양아치처럼 살던 그는 부잣집 아들을 혼내주려다 그만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티나는 한 번도 한 곡을 끝까지 연주를 한 적이 없다. 도중에 꼭 실수를 하고 만다. 티나는 그것이 자신의
낮술을 부르는 날씨였다. 오락가락 비가 내리고 후텁지근했다. 지난 7월 31일 정오께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있는 사진작가 배병우(68)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소문난 와인 매니아이자 미식가이다. 자신이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남들 먹이는 것도 좋아한다. 그의 작업실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손님을 치를 때면 그의 고향인 여수와 제주에서 싱싱한 해산물이 상자째 올라온다. 무거운 카메라에 단련된 근육질 팔뚝으로 해산물을 해체하고 요리를 하는 것도 즐긴다.작업실을 찾는 손님들은 다양하다. 젊은 제자부터 명사들까지, 그의 음식은 나이·지위
대동여지도에 숨어 있는 우리 땅, 우리 역사가 156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대동여지도는 실측지도 이전에 나온 조선시대 최고의 지도로 꼽힌다. 철종 12년(1861)에 제작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 대동여지도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설사 지도를 들여다본다고 해도 한자 투성이에 암호 같은 기호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누구나 쉽게 보고 읽을 수 있는 ‘해설 대동여지도’(진선출판사)가 나왔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한자 지명은 1만1680개. 모든 지명 옆에 한글을 덧붙이고, 지도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 ‘헬로우뮤지움’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어린이미술관을 표방하는 헬로우뮤지움은 산동네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도로변 상가 틈새, 이런 곳에 미술관이 있을까 싶은 곳에 있었다. 번듯한 건물에 화려한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동네미술관’을 내세운 헬로우뮤지움은 미술관에 대한 일반적인 예상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헬로우뮤지움의 김이삭(41) 관장이 한국박물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자랑스러운 ‘젊은’ 박물관인상을 수상했다. 한국박물관협회는 매년 원로·중
지난 5월 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아트토이컬쳐 2017’ 전시장. 장난감 전시에 몰린 관람객은 아이들보다 어른이 훨씬 많았다. 20~30대가 대부분이었지만 40~50대 중장년층도 눈에 띄었다. 국내 최초의 아트토이 페어인 ‘아트토이컬쳐’는 올해로 4회째. 5월 3일부터 7일까지 한국 대표작가 쿨레인을 비롯해 일본, 홍콩, 프랑스 등 180개 팀이 참가한 행사에는 5일간 8만여명이 몰렸다. 일본 작가 데하라의 한정판 피규어를 사기 위해 개막 3시간 전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예술을 입은 장난감, 아트토이가 새로운
수퍼 히어로들이 총출동해 지구를 구하는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는 숨은 영웅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을 배경으로 한 ‘상암혈투’ 장면, 전투기가 날아오르는 가운데 빨간 사각 프레임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손가락을 마주하고 있는 푸른색의 거인들이다. 출연진 명단에도 없는 정체불명 거인들은 유영호(51) 작가의 조형작품 ‘미러맨’이다.미러맨이 지구 반대편 에콰도르로 날아갔다. 지난해 4월 대지진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에콰도르 국민들을 위로하는 것이 미러맨의 임무이다. 미러맨과 함께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