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바 ‘의정갈등’으로 인한 전공의 공백이 7개월 가까이 이어지는 가운데 의대 원로교수 39명을 포함한 명예교수 42명이 시국선언문을 통해 "정부가 추진 중인 의료개혁은 대한민국의 의료를 ‘공멸’의 길로 내몰고 있다"면서 우려를 표했다.
5일 명예교수 42명(의대 39명, 기타 과 3명)은 의료사태 관련 '시국선언문'을 내고 "6개월 이상 진행 중인 의료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원로교수들이 단합해 공식 입장을 낸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이들 교수들은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응급의료, 필수의료, 그리고 지역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의과대학과 수련 병원은 의대생 증원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으며 의대 정원 증원 시도는 법적·제도적·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 추진 중인 무리한 의대정원 증원을 중단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의사들이 필수의료과를 기피하는 이유에 "의료분쟁 위험이 높고, 보상이 낮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또 지방에 의사들이 부족한 이유로 "인구가 줄었고, 환자들이 대도시 대형병원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지방에서 응급실 뺑뺑이가 이어지는 데 대해 "단순히 의사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의료분쟁 책임 등 복잡한 문제에서 비롯한다"며 "의료분쟁제도를 개선하고 의료 보상을 현실화하는 것만으로도 개선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교수는 의대와 수련병원이 의대증원에 대해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들은 "학생 수가 65%나 늘면 이에 맞춘 교육 시설·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데도, 정부는 이에 대한 충분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의학교육은 강의실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내실 있는 임상 교육이 필수적"이라며 "지금처럼 환자 진료로 바쁜 교수들이 교육에 집중하기 어려워지고, 규모가 한정적인 병원에서도 늘어난 학생들을 다 수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들은 "서울대 병원이 수용할 수 있는 수련의는 1년에 100명 수준인데 정부방안대로 2000명으로 늘리려면 서울대 병원 약 20곳이 필요한 것"이라면서 "이는 우리사회가 인력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감당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즉 이같은 의대 증원 규모만큼 정부 지원을 비롯한 비용이 늘어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교수들은 의대증원으로 인해 이공계나 다른 분야 인재까지 빼앗길 상황도 우려했다. 이들은 "의대 정원이 과도하게 늘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해야 할 인재들이 의학 분야에만 몰려, 국가의 균형 있는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명분이 필요하다는 이들은 선언문에서 "현재 병원이 유지될 수 있는 건 전문의와 교수들이 환자에 대한 사명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들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지쳐가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결국 병원을 떠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선언문에 적시된 명예교수 42인은 △강윤구(울산대) △강무일(가톨릭대) △고윤석(울산대) △고일두(서울과기대 건축학) △김경효(이화여대) △김성규(영남대) △김시영(경희대) △김정구(서울대) △김중곤(서울대) △김종학(이화여대) △박경수(서울대) △박병주(서울대) △박영배(서울대) △서정욱(서울대) △성명훈(서울대) △성진실(연세대) △손대원(서울대) △신희영(서울대) △오승택(가톨릭대) △유석희(중앙대) △윤병우(서울대) △이경자(이화여대) △이덕환(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이미애(이화여대) △이순남(이화여대) △이승주(이화여대) △이종석(서울대) △이춘택(서울대) △임태환(울산대) △장성구(경희대) △장학철(서울대) △전선희(이화여대) △전용성(서울대) △정성은(서울대) △정현채(서울대) △정화순(이화여대) △조문준(충남대) △조보연(서울대) △조항범(충북대 인문대) △최인호(서울대) △허대석(서울대) △황영일(서울대) 등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의대 현실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는 원로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라면서 "국민들께서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