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래플스호텔 싱가포르 제공
photo 래플스호텔 싱가포르 제공

먹고, 자고, 놀고, 타는 것들에 대한 유튜버와 사진작가, 소셜미디어(SNS)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진 시대에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라 불리는 신문과 방송은 적어도 이 분야에 있어서 더 빠르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 시장의 논리에 따라 레거시 미디어가 프레스투어에 초청받는 일도 예전에 비해 대폭 줄었다. 그래서 이름도 생소한 ‘래플스호텔 싱가포르’에서 초청장이 왔을 때 의아했다.

유명 여행작가, 사진작가와 함께 레거시 미디어의 기자를 초청자 명단에 넣은 이유를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수십 분의 동영상, 1분 남짓의 숏폼, 몇 장의 멋진 사진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 오래된 호텔의 매력은 글이 더해져야 비로소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느꼈다. AI(인공지능) 시대에 없어질 직업으로 시인과 소설가 등이 꼽히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인간만이 창작할 수 있는 영역의 속성을 래플스호텔은 갖고 있었다. 이 호텔은 1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듯 곳곳에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은 각 객실마다 이런 회랑 아래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은 각 객실마다 이런 회랑 아래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100년 전 원목 바닥의 삐걱임도 전통

래플스호텔의 바닥은 지금도 대부분 100년 전에 사용했던 원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산인데, 여전히 잘 보존하고 있다. 약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지만 호텔 측은 이 소리마저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해 그대로 놔둔다고 한다. 정겨운 이 소리는 결코 디지털 디바이스가 담아낼 수 없다. 호텔 곳곳은 이처럼 100년이 넘은 유물로 가득하다. 100년이 넘은 벽시계, 축음기 같은 물건부터 100년이 넘은 식당까지…. 2019년 호텔 측이 전면 복원 작업을 할 때 기존의 오래된 건물의 프레임은 유지하면서 벽 사이사이로 전선을 넣어 현대의 디지털적인 요소를 어떻게 첨가할지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싱가포르 정부는 1987년 래플스호텔을 싱가포르 국가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렇다고 이 호텔에서 디지털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객실 내의 모든 시설이나 룸서비스, 요청 사항은 침대 옆에 있는 태블릿PC 하나로 해결된다. 전통은 살리면서 디지털을 융합하기 위한 호텔 측의 고민이 모두 담겨 있는 것처럼 어느 호텔보다 이 태블릿PC의 인터페이스는 친절하다.

래플스호텔에서 머문다는 것은 마치 오래된 박물관에서 투숙하는 느낌인데 여기에 ‘버틀러’라고 불리는 집사의 서비스가 더해져 투숙객에게 최상의 만족감을 준다. 체크인을 하면 버틀러가 방으로 찾아온다. 버틀러는 객실 구석구석을 설명함과 동시에 조심스럽게 일정을 묻기도 한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욕실에는 알맞은 온도의 온수에 거품이 잔뜩 띄워져 있다. 동시에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편지를 통해 투숙객을 맞는 그들의 진심을 전한다. 

대화 중에 카페라테를 좋아한다고 하면 기억했다가 라테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 놓기도 한다. 이런 놀라운 세심함은 수백 개의 객실을 가진 세계적인 호텔 체인은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오직 115개의 객실만 운영하는 래플스호텔 싱가포르에서만 가능하다. 버틀러들은 24시간 대기하고 있는데 첫날 밤 늦은 시간 베개가 불편하다며 전화를 건 기자에게 푹신한 베개와 딱딱한 베개를 모두 들고 와서는 편한 걸 사용하라고 건네고 갔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메인 빌딩의 로비.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메인 빌딩의 로비.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의 히스토리안으로 불리는 레슬리 수카르가 100년 넘게       호텔 로비에 있는 오르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 동그란 쇠판이 천공카드로,       쇠판이 돌아가면서 음계판과 맞닿아 소리가 난다. photo 박혁진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의 히스토리안으로 불리는 레슬리 수카르가 100년 넘게 호텔 로비에 있는 오르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 동그란 쇠판이 천공카드로, 쇠판이 돌아가면서 음계판과 맞닿아 소리가 난다. photo 박혁진

2024년 세계 최고 호텔 6위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싱가포르의 호텔은 마리나베이샌즈다. 세 개의 빌딩에 배 모양 건물을 하나 얹은 마리나베이샌즈는 우리나라의 쌍용건설에서 지어 더 유명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회담을 했던 센토사섬의 카펠라호텔도 싱가포르의 유명한 호텔이다. 하지만 정작 전 세계적으로 싱가포르 ‘원톱’으로 꼽히는 호텔은 ‘래플스 싱가포르’다. 래플스호텔은 2024년 세계 50대 최고 호텔(The World’s 50 Best Hotels) 시상식에서 6위로 선정됐다. 2012년 당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윌리엄 왕세손 부부가 싱가포르를 방문할 때 숙소로 래플스호텔을 선택하자 “래플스에 머무르는 김에 싱가포르도 둘러봐라”라고 말했다.

래플스호텔 2층에 자리 잡은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는 1887년 호텔이 설립된 이후 이곳을 방문한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윌리엄 왕세손 부부뿐만 아니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는 물론이고 마이클 잭슨, 레이디 가가,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연예인들도 모두 싱가포르에 오면 이곳에 머물렀다. 다만 수백 장의 사진에 한국인은 없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의 유명배우 찰리 채플린이나 가수 데이비드 보위 같은 인사들도 싱가포르에 오면 으레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어떤 방에는 그 방에서 머물렀던 유명 인사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다. 호텔 측에서는 그런 방들을 ‘데이비드 보위 스위트’ ‘조셉 콘래드 스위트’ ‘에바 가드너 스위트’라고 부른다. 그중 마이클 잭슨이 1993년 싱가포르에 와서 이 호텔에서 가장 큰 스위트룸에 묵으며 창문 너머로 팬들에게 손을 흔든 장면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 마이클 잭슨과 찰리 채플린이 묵었던  ‘퍼스낼러티 스위트’의 숙박가는 3000만원쯤 된다고 한다.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입구의 도어맨. 호텔이 생긴 이래 시크교도들만       이 도어맨을 할 수 있다. 시크교도들은 세계에서 가장 용맹한       용병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photo 박혁진
래플스 호텔 싱가포르 입구의 도어맨. 호텔이 생긴 이래 시크교도들만 이 도어맨을 할 수 있다. 시크교도들은 세계에서 가장 용맹한 용병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photo 박혁진

시크교도 도어맨도 100년 전통

래플스호텔은 싱가포르의 중심지 비치로드(Beach Road)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 주소 역시 비치로드 1번이다. 막상 가보면 바닷가와는 거리가 있다. 과거에는 이 호텔 정면이 바닷가였으나 싱가포르의 계속된 간척 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과거 바다가 있던 곳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간척사업 탓에 온통 세계적 호텔 브랜드가 지은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있지만, 3층에 불과한 이 호텔이 내뿜는 존재감은 남다르다.

호텔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투숙객을 맞는 사람은 시크교도인 도어맨이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싱가포르에서 래플스호텔의 도어맨은 반드시 시크교도만 할 수 있다. 시크교도는 인도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퍼진 ‘시크교’를 믿는 집단이다. 19세기 중반 시크교 창기병대는 세계 최강의 군대로 불렸다. 시크교도를 고용하는 것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대영제국 시절 식민지 지역에서 시크교도는 주로 경찰이나 군인의 역할을 해왔다. 이런 용맹함 때문에 호텔 측은 100년 넘게 시크교도를 도어맨으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의 잔재라는 논란이 일 법하지만 이런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싱가포르만의 문화라고 여겨진다. 과거부터 이 호텔에는 시크교도 10명이 도어맨으로 일하는데 한 명이 그만두면 호텔 담당자는 새로운 시크교도를 채용하기 위해 시크교 사원까지 찾아간다고 호텔 측은 말한다. 2024년의 그들은 상냥하기 그지없다.

로비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하다. 3층 천장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화려함과 어울리지 않게 로비 곳곳에 1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높이 1.5m로 된 직사각형 모양의 오래된 나무상자들이 눈에 띈다. 하나는 벽시계, 하나는 오르골, 하나는 축음기인데 모두 지금도 음악이 흘러나온다. 물론 수동이지만.

싱가포르는 유명한 쇼핑 아케이드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창이공항의 쇼핑 아케이드부터 마리나베이샌즈의 아케이드까지 널리 알려진 곳들은 모두 깔끔하고 시원한 실내에 자리 잡고 있다. 래플스호텔은 다르다. 래플스호텔의 구조는 가로, 세로 약 150m 정도 되는 정방형 대지를 지상 3층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안쪽에 중정이나 바(bar)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호텔들은 호텔 방문을 열면 에어컨이 나오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와 정문 밖을 나와야 싱가포르의 습한 공기를 마주할 수 있지만 이 호텔의 방문 밖은 모두 싱가포르의 하늘을 볼 수 있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싱가포르의 끈적한 기운이 방안으로 숨어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수 있지만, 이 덕분에 객실은 더 쾌적하게 느껴진다.

1892년 생긴 티핀룸은 북인도 스타일의 요리를 하는 전통 인디안 레스토랑이다.
1892년 생긴 티핀룸은 북인도 스타일의 요리를 하는 전통 인디안 레스토랑이다.
‘라이터스바’(Writter’s Bar)
‘라이터스바’(Writter’s Bar)

‘싱가포르 슬링’이 태어난 롱바

외관상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1층에는 싱가포르의 다른 아케이드에서 볼 수 없는 고급 숍들이 입점해 있다. 브랜드 하나하나가 래플스호텔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세계 최고가 시계 브랜드인 파텍 필립, 초고가 카메라 브랜드 라이카, 싱글몰트 위스키의 상징이 되어버린 맥캘란 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 VVIP를 위한 라운지 ‘센추리온하우스’도 래플스호텔 아케이드에 있다. 단언컨대 싱가포르의 어떤 곳을 가도 이런 브랜드가 한꺼번에 입점한 곳은 없다. 어떤 브랜드들은 싱가포르에 유일한 매장이고, 또 어떤 브랜드들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매장이기 때문이다. 샴페인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돔페리뇽’은 자사에서 직접 컬래버를 하는 레스토랑을 지정하는 ‘갑 중의 갑’인데, 래플스호텔 2층에 있는 ‘부처스 블록’이라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도 그중 하나다.

이곳 아케이드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롱바(Long BAR)’다. 롱바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한 칵테일인 ‘싱가포르 슬링’이 태어난 곳이다. 싱가포르 슬링은 진과 파인애플 주스를 넣어 만드는 핑크빛 칵테일이다. 한 잔에 3만원 정도 하는 이 롱바를 마시기 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선다. 롱바 역시 10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데 싱가포르 슬링은 1915년 처음 만들어졌다. 무엇을 마시든 땅콩을 먼저 바에서 제공하는데, 딱딱한 땅콩 껍데기는 바닥에 그냥 버린다. 이것 또한 100년 넘은 전통이라고 한다. 예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이렇게 땅콩 껍데기를 바닥에 버리는 오래된 펍에 간 적이 있었는데, 유럽의 이런 오랜 문화들이 대영제국 지배 기간 싱가포르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롱바 이외에도 호텔 내부에는 역시 100년이 넘은 인도 레스토랑인 ‘티핀룸’, 그리고 유명 중식 셰프 제레미 렁이 이끄는 중식당 ‘이(藝) 바이 제레미 렁’, 부처스 블록 등 유명 레스토랑과 ‘달과 6펜스’를 썼던 서머싯 몸, 키플링, 네루다 등 래플스를 방문했던 작가들을 기리는 ‘라이터스 바(Writter’s Bar)’ 등이 있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바를 찾아 쿠바의 하바나까지 가는 세상이란 걸 고려하면 이곳의 진입장벽은 훨씬 낮다고 할 수 있겠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이곳의 파인다이닝 요리들은 요즘 한국 파인다이닝 물가에 비하면 결코 비싸지 않다고 느껴진다.

싱가포르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있다. “한국 여행객은 잠은 마리나베이샌즈에서 자고, 롱바에 와서 ‘싱가포르 슬링’을 마신다.” 이런 말에는 두 가지가 담겨 있다. 하나는 래플스호텔에서의 숙박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고, 다른 하나는 싱가포르에 오면 반드시 싱가포르 슬링이라 불리는 칵테일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자는 오해고, 후자는 진실이다. 래플스호텔의 숙박가가 싱가포르에서 가장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객실이 스위트룸이란 걸 감안하면 결코 넘사벽은 아니다. 이것은 래플스호텔의 가격 정책 때문이 아니라 마리나베이샌즈같이 한국에 잘 알려진 호텔들의 가격 정책 때문이다. 투숙객이 몰리자 조금씩 가격을 높인 이 호텔들의 숙박료는 어느 새 래플스호텔 근처까지 왔다. 하지만 신혼여행이나 특별한 경험을 위해 일생에 한두 번 싱가포르를 찾는다면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문득 이 호텔의 숙박비가 궁금해 구글맵을 켰다. 11월 26일부터 11월 27일까지 얼리버드 요금이 87만원(환불불가, 스튜디오스위트 더블, 래플스호텔 공식홈페이지 기준)이었다. 생각난 김에 같은 기간 마리나베이샌즈 숙박비도 알아봤다. 크기가 같은 샌즈 프리미어 룸이 90만6000원(공식 홈페이지 기준)이다. 래플스호텔은 엔데믹 이후 한국 시장을 타깃으로 마케팅 활동을 활발하게 펴고 있다. 

이번 방문 기간에 묵었던 객실은 중정인 팜코트(Palm Court)에 바로 접해 있는 팜코트 스위트다. 객실 앞 회랑 아래 놓여 있는 의자에서 초록빛 중정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호사를 누리는 느낌이었다. 그 초록빛, 버틀러의 세심함, 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 세계 최강 용병 집단이었던 시크교도 도어맨의 따뜻한 미소… 이런 것들을 어떻게 디지털 디바이스로 설명할 수 있을까. 최신 시설의 신식 호텔들이 유튜브라면 이 호텔은 유명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될 만한 소설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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