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10일 갖은 설화(舌禍)로 논란을 부르던 임현택 의사협회장이 탄핵됐다. 취임한 지 고작 6개월 만이다. 표면적 이유는 그가 숱하게 한 ‘막말’로 협회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규모 의대 증원 정책 발표를 기점으로 벌어진 의정(醫政) 갈등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책임론이 더 컸다. 의사를 포괄하는 법정단체 대표지만 의료대란의 핵심 당사자인 대학병원 전공의 대표는 물론, 동맹휴학을 진행 중인 의과대학 학생 대표들과도 갈등을 빚어 의료계 내부의 대표성조차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상황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눙쳐서 ‘의료대란’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현재 사태의 핵심은 대학병원 기능 마비다. 대학병원의 핵심 인력은 ‘교수’가 아닌 전문의 취득을 위해 수련과정을 밟는 중인 ‘전공의’들이다. 이들이 대규모 의대 증원에 반대해 대학병원을 떠나자 대학병원의 의료 역량은 반토막이 났다.
그런데도 막상 현재 시민들이 체감하는 불편의 정도가 그리 크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대학병원 교수들이 연구에 할애하던 시간을 헐어 진료에 나서며 전공의 인력 공백을 일정부분 벌충했다. 실제로 올해 9월까지 꼽아보더라도 대한의학회지(JKMS)에 실리는 논문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00편(약 25%) 이상 줄어들었다. 의료 현장의 혼선을 줄이는 대신 의학 연구 역량을 희생한 셈이다. 두 번째는 대학병원 내에서 의사 업무를 일정부분 분담하는 진료지원인력(PA) 간호사들의 존재다. 올해 새로 제정된 간호법을 계기로 이들 PA 간호사들은 과거의 불법적 영역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의사 업무 대체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현재 불편보단 장기영향이 뇌관 될 수도
여기에 환자들의 대응도 겹쳤다. 대학병원의 진료 대기가 지나치게 길어지니 예년 같으면 종합병원에서 받았을 진료를 주변 중소형 병원에서 받기 시작했다. 환자들이 대거 이동한 덕분에 이들 중소형 병원들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물론 중소형 병원에서 진료하기 어려운 위중증 환자들은 여전히 긴 대학병원 대기를 감내해야만 하고, 대형 수술은 인력 부족으로 인해 한없이 밀리고 있으나 당장 일상을 사는 환자들이 겪는 불편은 어느 정도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의료대란의 진짜 뇌관은 현재의 불편이 아닌 장기적 영향 속에 숨어있다는 게 문제다. 일차적으로는 대학병원의 수련 과정에서 이탈한 전공의들이 문제다. 신규 전문의 공급이 최소 1년 이상 멈춰 서게 되었다. 복지부의 추산에 따르면 2035년까지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는 70세 이상 의사는 약 3만2000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전문의인 걸 고려하면 국내 전문의 숫자는 의료대란이 지속되는 기간 내내 계속 감소할 수밖에 없다. 수련을 마치고 새로 전문의가 될 전공의가 남아있질 않아서다. 그런데 이들 인력이야 의료대란이 마무리되면 벌충할 수라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가장 문제를 일으킬 부분은 되레 휴학 중인 의대생들이다. 동맹휴학이 장기화하다 못해 1년을 꼬박 채우게 되니 남자 의대생들이 학업을 중단할 결심을 하고 일반병으로 입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9월 23일 기준 1059명의 의대생이 군 입대 사유로 휴학 허가를 받았다. 전국 40개 의대 중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3개 의대는 제외한 수치다. 작년인 2023년에 군 휴학한 의대생이 162명, 그 직전 해인 2022년의 군 휴학생이 138명 수준인 걸 고려하면 평년의 6배가 넘는 수치다.
통상적인 남자 의대생들은 의과대학 졸업 후 의사면허를 취득한 뒤 군에 입대하거나, 수련 과정을 모두 마친 다음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에 입대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이들의 입대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국내에서 군의관과 공중보건의 인력을 충당하는 유일한 인재풀이 남성 의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면허 취득 전에 일반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면 그만큼 군의관과 공중보건의로 복무할 의사가 줄어드는 효과가 난다. 당장 작년의 공중보건의 신규 발령 인원이 1106명이다. 그에 준하는 수의 예비 의사들이 일반병으로 복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의료대란 사태가 길어질수록 그 숫자는 늘 수밖에 없다. 수백 명의 인구가 공중보건의사 1인에게 의존하는 의료취약지역은 총체적 의료 공백 위험에 놓인 셈이다.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협상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다. 의료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의제는 당연히 올해인 2025년 의대 증원부터 백지화해야 한다는 것인데, 각계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증원을 물리기엔 이미 실기(失機)를 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많다. 당장 올해 수능이 치러졌고 이미 전형이 진행된 수시모집의 경우 12월 13일에 합격자 발표가, 12월 18일에는 수시모집 합격자 등록이 끝난다. 연말인 12월 31일부터는 수능 응시 결과를 토대로 정시모집 원서 접수가 진행되고, 내년 2월 7일에는 정시모집 합격자 발표가 이어진다.
2025년도 증원 백지화 아닌 차선 찾아야
물론 각 대학 수시모집 요강에는 ‘모집단위 및 모집인원은 학생 정원 조정 결과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이를 최대한 선해(善解)하더라도 수시모집 합격자 발표와 등록일인 12월 중순 이전에는 협상이 마무리돼야 한다. 증원 결정을 되돌리는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는 것 이전에 물리적으로도 지나치게 빠듯한 일정이라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양쪽이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협상 카드를 찾는 게 현재의 의료대란을 종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다만 처음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과 의대생들의 동맹휴학을 끌어낸 게 급격한 의대 증원 정책이었던 만큼, 최소한 복귀를 저울질하는 이들이 돌아올 수 있을 정도의 명분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의료대란의 종식은 어렵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공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과 필수의료 종사자의 법적 부담을 완화하는 법령 개정을 연말연시에 매듭지을 것이라 밝혔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의료대란의 시작점이 정원 문제였듯, 해법도 정원으로 풀 수밖에 없어서다. 2025년도 정원을 조정할 시기는 이미 놓쳤다고 하더라도 2026년도 정원부터는 합리적으로 조정할 방안을 새로 구성될 의협 지도부와의 협력을 통해 마련해야 한다. 역사가 평가할 것이란 대통령의 개혁 의지가 오점으로 기록되지 않으려면 정부가 먼저 협조적 태도를 보이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