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5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photo 뉴스1
지난 6월 25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photo 뉴스1

의료 파업을 마친 전공의들이 병원으로 하나둘 복귀하고 있다. 지난 10월 필수과와 비필수 진료과의 전공의 복귀율은 각각 70.1%, 88.4%에 이르렀다. 정부는 1년8개월 만에 비상 진료 체계를 해제하며 의료 대란을 공식 종료했다. 하지만 의정 갈등 이후 병원 풍경은 조금 달라졌다. 전국 상급종합병원 47곳은 모두 구조전환 지원 사업에 참여하면서 병상을 축소한 상황.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 서울성모병원, 삼성서울병원 등 서울 ‘빅5’에서 감축한 일반 병상만 1157개다. 전공의 복귀가 긴 의료 공백을 채워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장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빅5 병원의 한 관계자는 “일손이 부족한데도 오히려 전공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류가 형성됐다. 병원에선 전담 인력이 전공의들이 어려움은 없는지 살핀다. 재이탈 우려가 있다 보니 간호사, 전문의들도 전공의에게 섣부르게 지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전공의의 공백 동안 교수들은 진료지원(PA)과 손발을 맞추는 데 익숙해졌다. PA들은 수년씩 근무하는 반면 전공의는 여러 파트를 거쳐 수련을 하다 보니 근무 기간이 짧게는 3개월에 불과하다. 전문의 입장에선 인수인계를 반복해야 하는 구조라, 사실상 끊임없이 신입을 맞이하는 상황이다. 빅5에 근무 중인 병원 관계자는 “전공의 인력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시적’ 인력이라는 것. 예를 들어 혈액종양내과에서 레시피를 배운다고 치면, 1년에도 수차례씩 가이드라인이 바뀌는데 짧은 기간 수련하는 전공의는 이걸 배워봤자 실무에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PA들은 아무리 짧아도 2~3년을 떠나지 않는다. 전공의에 비하면 의학적 판단 등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오히려 실무에선 손발이 맞아 선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병원이 전공의 눈치를 보는 건 장기적으로 병원의 경쟁력과 직결될 수 있어서다.

PA 상당수는 전공의가 병원을 떠난 동안 의료 공백을 메워왔지만, 복귀가 결정되고 부서 이동이나 업무 축소를 통보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대한간호협회가 PA 간호사 74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41.1%(305명)가 전공의 복귀 이후 ‘원치 않는 부서 이동’(7%·52명)이나 ‘업무 조정’(34.1%·253명)을 겪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사전 협의나 동의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병원 관계자는 “원래는 전공의가 없어서 PA 간호사로 메워났더니 이제는 비켜달라고 하는 상황이다. PA 급여가 무조건 낮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비싼 전공의를 다시 투입해야 하니 병원의 부담이 커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25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내 전공의 전용공간. photo 뉴스1
지난 6월 25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내 전공의 전용공간. photo 뉴스1

대법원 “전공의는 근로자” 판단

전공의의 지위를 ‘근로자’로 규정한 판결도 병원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지난 9월 11일 대법원은 최근 아산병원에 전공의 3명에게 1인당 1억7000만원의 초과 근무 수당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업무수당·상여금·당직비 등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지급된 수당은 통상임금으로 산입하고, 실제 주 40시간을 초과한 근로에 대해 임금 및 가산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공의는 병원에 상주하면서 전문과목을 배우는 의사다. ‘레지던트(Resident·거주자)’로 불리는 이유다. 주 평균 근로시간은 80시간으로 설정돼 있고, 응급 의료가 발생할 경우 최대 8시간을 추가 근무할 수 있다. 추가 근무 사유를 보고하면 추가 급여를 지급한다. 고강도 노동이지만 ‘교육생’이기 때문에 감수하는 과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전공의의 지위가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주 40시간을 기준으로 초과근무수당을 산정할 경우, 야간까지 24시간 근무하는 응급의료과 등에서는 기존 연봉의 두 배가 넘는 수당이 필요해진다. 전공의의 평균 연봉은 7000만~8000만원 수준이다.

병원 내부 인력 구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복지부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성과에 따라 ‘1조원+α’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현장은 여전히 우려가 크다. 병원이 선뜻 전공의 임금에 손을 대기는 어려운 탓이다. 월급을 낮추면 우수한 전공의를 유치하기 어렵고, 전공의 지원율이 떨어지면 정부 지원이 줄어들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 전공의 포괄임금제 이슈로 줄소송이 이어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일부 전공의들은 이번 판결에서 지급액이 억대에 달한 점에 주목해 노조에 소송 관련 문의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청한 한 전공의는 “판결 이후 전공의 원고단을 모집하는 로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개인적으로 자문을 구하는 전공의도 꽤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소송을 준비하는 전공의는 있겠지만, 자료 수집 과정이 쉽지 않고 이번 판결 역시 특수성이 있어 향후 흐름을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만약 유사 소송이 각 병원으로 확대될 경우, 병원은 천문학적 재정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

다만 의료계 상황을 종합하면 해당 판결이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데다 병원마다 계약 형태가 각기 다른 만큼 아직 수련병원을 상대로 한 줄소송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임금 채권의 소멸 시효는 3년이라는 점, 승소 전공의들이 응급의학과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대규모 소송으로 번질 가능성은 작다는 관측도 있다. 아산병원의 경우 소송 제기 이후인 2018년부터 포괄임금제를 폐지하고 전공의를 근로자로 인정해 근로기준법에 따라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병원 관계자는 “2018년 이후 포괄임금제를 폐지했고, 현재 진행 중인 전공의 임금 지급 소송은 없다”라며 “병원마다 전공의 계약과 급여 지급 방법에 차이가 있어 상황은 조금씩 다를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 전공의 근무시간 축소 시범사업

정부는 전공의 주당 근무시간을 기존 80시간에서 72시간 이내로 단축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전공의 교육의 질이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의 한 병원장은 “72시간 체제에서 충분한 수련이 이뤄지려면 수련 기간을 늘려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병원의 부담이 너무 크다. 전문의 양성은 국민건강을 위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로 정부가 수련병원에 위탁해온 기능”이라며 “전공의들의 인식, 의료 환경이 전과 달라진 만큼 교육에 대한 정부 지원이 단계적으로라도 전체 진료과로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전공의노동조합(전공의노조)은 지난 9월 출범했다. 전공의노조는 “헌신을 의무로 치부당한 대한민국 모든 전공의를 대신해 이번 판결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관행적인 불법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단 전공의라는 특수성이 3~4년 후 신분이 바뀐다는 점에서 노조의 지속력에 대한 의구심도 뒤따른다. 내년 초 복지부의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이 종료되는 만큼 전공의 처우를 두고 병원의 혼란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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