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출입해 논란이 된 경복궁 내 건청궁 곤녕합(坤寧閤) ‘옥호루(玉壺樓)’의 이름이 잘못 표기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근 윤 전 대통령 내외가 2023년경 출입한 사실이 알려진 건청궁은 구(舊)한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 내 고종임금 내외의 관저로 조성된 ‘궁 안의 궁’이다. 이 중 윤석열 전 대통령 내외가 10분간 머문 것으로 알려진 ‘곤녕합’은 왕비인 명성황후가 기거한 곳이다.
‘옥호루’는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에 달려 있는 서루(書樓·책방)로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일본이 들여보낸 낭인들의 칼에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의 명칭이 ‘옥호루’가 아닌 ‘옥곤루(玉壼樓)’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주장을 제기한 사람은 1882년 임오군란 때 구식군인의 난을 피해 51일간 궁궐 밖에서 피난생활을 한 명성황후의 일기인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를 한글로 완역한 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이다. 박 위원은 최근 출간한 저서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에서 ‘옥호루’가 ‘옥곤루’인 이유를 조목조목 밝혔다.
논란이 되는 ‘병 호(壺)’자와 ‘대궐 안길 곤(壼)’자는 글자 가운데 ‘덮을 멱(冖)’자 아래 가로획 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다. 건청궁은 한·일병합 전인 1909년경 일제의 경복궁 공원화 계획에 의해 철거됐는데, 현재 사진으로 전해오는 과거 곤녕합 옥호루에 걸려 있는 한자를 흘려 쓴 초서(草書)체 편액만 놓고 봐서는 글자를 제대로 구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2007년 건청궁을 약 100년 만에 복원하는 과정에서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새로 쓴 ‘옥호루’라는 한자 편액을 걸어둔 상태다.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역시 해당 전각을 ‘옥호루’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면서 “옥호(玉壺)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란 뜻이지만 ‘옥호빙(玉壺氷)’의 준말로 ‘옥병 안의 얼음’이란 뜻을 갖는다”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 말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왕창령(王昌齡)의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부용루에서 신점을 보내며)’이란 시에서 유래했다”고 적고 있다. 해당 시에는 ‘일편빙심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이 옥 호리병 안에 있다)’라는 시구가 있는데, 여기서 따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해당 전각이 ‘옥호루’가 아닌 ‘옥곤루’라는 주장이 제기된 만큼 학계의 재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건청궁 앞 경복궁 향원정에 놓인 다리인 ‘취향교’는 6·25전쟁 이후 복원이 잘못 됐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2021년경 다리의 위치와 재질 등을 재고증해 건립 초기 형태에 맞추어 재복원한 바 있다. 다음은 지난 11월 17일 건청궁 곤녕합에서 만난 박광민 위원과의 일문일답.

- 왜 ‘옥호루’가 아닌 ‘옥곤루’인가. “옥곤루는 명성황후의 주거공간이자 침소인 곤녕합 한쪽에 붙어 있는 서루다. ‘옥곤루’를 곤녕합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곤(壼)’은 시경 ‘대아-기취’에 ‘그 복은 어떤 종류인가, 궁중 안길에 임금께서 만년 동안 복받아 자손들 번창하리’라고 하여 궁중의 안쪽 길을 뜻한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여인의 의범을 뜻하는 곤훈(壼訓), 곤범(壼範), 곤덕(壼德)이나 여인의 거주 공간인 곤각(壼閣), 곤오(壼奧) 등의 뜻으로 쓰였다.”
- ‘시경’ 외에 또 다른 근거가 있나. “내가 한글로 완역한 ‘임오유월일기’ 7월 26일자 기사에 ‘같은 달 19일에 전 감찰 심의순이 ‘환정곤위사(還正壼位事)’로서 중궁전하(명성황후)를 위한 정문(탄원서)을 청나라 오장경 제독에게 보냈다’라고 했다. 민진후의 신도비문에도 ‘갑술년에 중곤(中壼)께서 복위되셨다’고 했다. 여기서 말한 ‘곤위’나 ‘중곤’은 모두 ‘중전’을 지칭한 것이다.”
- 명성황후가 직접 남긴 근거는 없나. “여주의 명성황후기념관에 가면 ‘일편빙심재옥곤(一片氷心在玉壼)’이란 명성황후의 친필 휘호 복사본이 전시돼 있다. 명성황후의 휘호는 당나라 왕창령의 ‘부용루송신점’ 중 ‘일편빙심재옥호’를 차용해 쓴 것이다. 즉 ‘얼음처럼 깨끗한 내 마음은 ‘옥곤루’에 있다’는 뜻에서 ‘호’를 ‘곤’으로 바꿔 쓴 것이다. 왕창령의 ‘일편빙심’은 벗을 향한 변함없는 우정이지만, 명성황후의 ‘일편빙심’은 왕을 향한 깨끗한 마음인데, ‘자기 마음이 술병에 담겨 있다’고 쓸 수는 없지 않나.”
- ‘옥호’라는 이름은 다른 데는 없나. “‘옥호’라는 이름은 순조의 장인 김조순의 별서(별장) 명칭에서 보인다. 김조순은 북악산의 한 봉우리인 백련봉 아래 별서를 마련하고 ‘옥호동천’이라 했다. 호리병 속같이 호젓하게 자리 잡은 곳에서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유유자적하고 싶다는 집 주인의 희망을 담은 명칭이다. 또 조선말 정부 기록에서는 ‘일성록’에 동빙고의 얼음 수량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옥호루’가 보인다. 동빙고의 ‘옥호루’ 또한 왕창령의 시 ‘일편빙심재옥호’에서 가져온 것으로 얼음창고(빙고) 명칭으로 적당하다. 하지만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침전에 붙어 있는 서루 명칭에 나라의 얼음창고 명칭을 가져다쓰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 건청궁을 복원하면서 ‘옥호루’라고 적었는데. “본래의 ‘옥곤루’ 편액과 복원 후의 현재 ‘옥호루’ 편액, 본래의 옥곤루 편액 글씨를 컴퓨터로 깨끗하게 다듬은 자료의 초서 자형을 비교해 보면 복원 후 다시 써서 걸어놓은 ‘옥호루’ 편액의 초서와 원래의 ‘옥곤루’ 편액 초서는 자형이 다르다. 서체를 비교해 보고, 여러 기록과 자료를 통해 논증한 결과 ‘곤녕합’ 건물의 같은 지붕 아래, 침전에 이어서 누마루 형태로 만든 서루는 왕비의 뜻을 가진 ‘옥곤루’가 정확한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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