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타협 않고 인권변호사의 길
변호사회관 로비에 법조 사상 첫 흉상 세워져

6·3사태에 정면 도전 “계엄선포는 위법” 건의서 배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로 시국사건 맡아 법정 투쟁
 ⓒphoto 이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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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당(心堂) 이병린(李丙璘)은 ‘한국 법조계의 의인(義人)’으로 추앙받아 왔다. 그는 제3공화국 공화당 정권의 비상계엄령 등에 맞서다 두 번이나 구속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정면대결하여 법조인의 기개를 지킨 용기있는 변호사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2003년 이병린을 ‘변호사로서 일관된 활동을 통하여 의로운 법률가상을 뚜렷이 보여준 인물’로 선정하였다.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로비에 그의 흉상을 세웠다. 한국 법조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병린은 1911년 2월 3일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에서 한의사 이명구(李鳴九)와 의병대장 유인석의 증손녀 유영랑(柳寧) 사이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한문을 깊이 공부한 인물이었으나 나라가 망하자 염세증으로 술만 마시다가 48세에 숨졌다.

“외가 하나는 잘 타고났습니다. 어머니는 의암 유인석의 증손녀여서, 한국 부인으로는 모범될 만한 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또 남궁억씨의 당질이었습니다. 우리 고조할아버지가 대학자이시고.”(신동아 1982년 12월호 최일남과의 인터뷰)

그는 어린 시절 장난꾸러기였다. 길 가던 사람이 걸리면 넘어지라고 길가에 풀로 올가미를 만들고, 남의 논에 들어가 모조리 모를 뽑아버린 적도 있었다. 그 대가로 소에게 절을 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이병린은 잠시 연천에 살면서 1925년에 연천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이듬해 부친의 권유로 최유순(崔庾順)과 결혼하고 1930년에 경기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졸업한다. 고교 동기로는 유홍렬 전 서울대 총장서리, 김갑수 전 대법관, 배성기 전 국회의원이 있다.

학창 시절 그는 갖은 고생을 했다. 학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겨울에는 내의 없이 광목셔츠로 추위를 견뎠다.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해서 동아부인상회(화신백화점 자리) 뒤 시민도서관에 처박히다시피했다. 하루는 바지 궁둥이가 뻥하게 뚫린 채 친구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훗날 이병린이 차리고 있는 변호사 사무실로 돈을 빌리러 왔었다. 이병린은 두말 않고 꾸어주었다.

“의뢰인 선물 받았다” 호통

이병린은 집안에 돈벌이를 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범학교로 진학하였다. 1931년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안성공립보통학교·서울매동공립보통학교·경성상업실수학교(덕수상고)에서 교사를 했다.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건 1940년이다.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창씨개명을 하고,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해서 일인들의 멸시와 박해가 점점 심해집니다. 그런 판국에서 그래도 한국인으로서 좀 해볼 만한 직업이 무얼까 하고 궁리하다가 변호사를 택했지요. 독학이었습니다. 남대문로에 있던 총독부 도서관에 개근을 했지요. 아침 10시에 나가서 밤 10시에 돌아오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전차삯이 궁하기는 했으나 한시도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현저동에 살 때였는데 전차 속에서 책을 보다가 종점까지 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최일남과의 인터뷰)

처음에는 예비시험(작문)에서 떨어졌다. 생계를 위해 마포에서 장작 장사를 시작했다. 1940년 두 번째 시험에 합격했다. 그것이 일제강점기 변호사 시험으로는 마지막이었다. 1942년 함북 청진에서 개업을 했다.

이병린은 1957년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총무를 맡아 대한변협과의 인연을 쌓아간다. 그는 1960년 3·15부정선거로 빚어진 마산소요사건 때에는 대한 변협의 일원으로 진상조사에 앞장선다. 4·19혁명 직후에 서울지검 검사장으로 발탁될 기회가 있었으나 거절했다. 그는 시종일관 재야법조인으로서 법치주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항상 깨끗한 생활을 솔선수범했다.

“1961년 초여름에 그가 귀속재산소청심의위원으로 있을 때 귀속재산 관리권 문제로 다투던 한 목재회사에서 공정히 심의해 주었다는 뜻으로 송이버섯 한 상자를 보내왔다. 그의 사무장이 별 생각없이 받아 두었는데, 이 변호사가 호통치는 바람에 주인을 찾아 돌려주느라고 닷새 동안이나 고생했던 일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을 일은 남기지 않으려는 강직한 그의 성품이 엿보이는 일화다.”(‘한국의 법률가’ 최종고)

이병린은 1963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으며 이듬해 5월 대한변협회장에 취임한다. 그해 3월 24일 서울대생들의 데모를 시발로 한·일회담반대와 학원사찰을 규탄하는 성토대회와 시위, 단식이 대학가에서 3개월 동안 파상적으로 전개되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무장군인 13명이 5월 21일 새벽 서울형사지법에 난입하여 소동을 벌였다. 무장군인들은 이어 전날 숙직판사였던 양헌 판사의 집으로 몰려가 영장발부를 강요하기도 했다. 사법부는 공개적으로 들고일어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끓고 있는 상황에서 변협이 앞장서 문제를 제기했다. 이병린은 사건이 터진 4일 뒤인 5월 25일 ‘무장군인 난입사건은 사법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중대한 문제’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소동을 벌인 군인들을 군형법과 형법에 규정된 특수소요공무집행방해 및 특수주거침입죄 등의 경합범에 해당하므로 진상과 배후를 철저히 규명하여 관련자를 엄중처단하라고 촉구했다. 이 사건은 7월 10일 관련자 5명이 3~5년의 선고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변협회장 신분으로 첫 구속

1964년 6월 3일 밤, 서울 시내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른바 6·3사태였다. 반정부시위는 6월 3일 절정에 달해 ‘박정희 정권 타도’라는 구호까지 나오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2만여명의 대학생이 청와대를 눈앞에 둔 효자동 입구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까지 빚자 계엄령이 선포됐다. 서슬이 시퍼런 계엄군이 출동해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판에 대한변협은 6월 22일 ‘인권에 관한 건의서’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언론에 배포했다.

5개항으로 된 주요 골자는 불법적인 비상계엄 해제와 6·3사태 관련 구속자 석방 등이었다. 당시 계엄법 제4조는 비상계엄선포 요건을 ‘전쟁이나 사변에 있어서 적에게 포위된 때’로 규정하고 있었다. 변협은 바로 이 조문을 들이대며 6·3사태는 전쟁도 사변도 아니며 적에게 포위된 상태도 아니므로 계엄선포는 위법조치라고 주장하며 권력에 정면 도전했다.

이병린은 이 건의서와 관련하여 대한변협사무장 김동주와 함께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영장 없이 구속된다. 이 사실은 당시 7월 5일자 신문에 처음으로 발표되었으나 구속 사실만 보도되었을 뿐 건의서 내용 등은 보도에서 제외되었다. 통제하에 있는 언론이 보도할 수 있는 한계였다. 이병린은 건의서를 만들기 위해 6월 20일 변협 상무회의를 주재해 계엄사령관의 집회금지조치를 위반했고, 계엄당국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은 채 건의서 100부를 등사해 대통령·국무총리·계엄사령관에게 등기우송하는 한편 언론기관에 배부한 것 등이 계엄포고령 위반사항이라고 했다.

“재판받고 나가겠다” 석방 거부

이병린은 구속되자 “건의서를 내기로 결의한 변협 상무회의는 당초부터 6월 초에 열기로 예정되어 있었는 데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인 6월 9일에는 변협회의도 집회허가를 얻어야 되느냐고, 계엄당국에 질의하였으나 회답이 없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는 “6월 9일에는 포고령으로 집회금지를 완화하는 조치를 내려 관공서·회사·조합 등의 회의는 무방하게 되었다”면서 “대한변협은 일개 조합만도 못하다는 말이냐. 어떤 근거로 변협이 직무집행사의 집회조차 열 수 없다는 것이냐”고 항의했다.

이병린 등이 6월 30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회부되자 130여명의 변호사들은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법정투쟁에 나섰다. 변협회장이 구속된 것도 처음이었고 130여명의 변호인단이 구성된 것도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변호인단은 이병린에 대한 구속적부심사를 신청하였고, 기각되자 즉시 항고를 하였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계 당국은 변협이 건의한 내용을 취소한다는 성명만 내주면 이 회장을 풀어주겠다는 뜻을 비쳐왔습니다. 동료 변호사 몇 사람과 함께 구치소로 이 회장을 찾아가 이런 뜻을 전하면서 우선 구속이 풀려야 할 것 아니냐고 말했지요. 이 회장은 대뜸 ‘당신들이 변호사냐.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의지가 약하냐’면서 화를 냈어요. 그는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단을 받아보겠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강순원 변호사 ‘법에 사는 사람들’)

이병린은 7월 28일 계엄이 해제되자 공소가 취하되어 공소기각 결정을 받고 출감하기까지 32일간 옥고를 치른다. 그는 석방되는 순간에도 “죄가 있다고 구속되었으니 재판을 받아보고 나가겠다”고 고집하다가 계엄령 해제에 따른 자동석방이란 얘기를 듣고서야 구치소 문을 나섰다.

이병린은 변협회장 임기가 끝난 뒤인 1969년 9월 12일에는 3선개헌을 반대한다는 호헌선언문과 국회의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동료변호사 30여명과 함께 서명하여 발표한다. 그는 또 개헌안이 국회에서 변칙통과되자 그해 10월 6일 김명윤·성태경·신순언·신태악·주도윤 변호사 등 5명과 함께 개헌안 무효 선언서를 발표한다. 서명한 변호사는 32명이었다.

김지하 필화사건 맡아

이병린은 1971년 4월 19일 결성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공동대표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다. 김재준·천관우씨도 함께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수협은 이해 4월 5일 이병린과 천관우·양호민·조향록·이병용·강기철·남정현·김정례씨 등 11명이 모여 발족을 결의하고 선언문 작성과 연락책임 등을 이병린과 천씨에게 일임한 데서 출범한다. 4월 8일 각계 인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하고 4월 19일 민수협 결성대회를 개최한다. 5월 18일 민수협은 서울대·고려대 학생구속사건, 10월 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선포사건 등 불법적인 정치권력행사로 인한 사건들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고 법정투쟁을 벌인다.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다. 이병린은 민수협이 국회와 대통령에게 낼 청원서와 건의서를 만들어 우송하려다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4일 동안 고초를 겪는다. 건의서 등의 문안은 이병린이 기초하여 운영위원회에서 수정·통과된 것이었다.

1972년 8월 15일 오후 2시쯤 이병린과 장준하 등 운영위원들이 청원서와 건의서를 우송하러 안국동우체국으로 가던 중 종로경찰서에 연행되고 유인물은 모두 압수된다. 이병린만 중앙정보부로 넘겨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풀려났다. 정보부에 다녀온 후로 심리적 충격이 커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고 약 6개월가량 야당 지도자들과 접촉을 끊는다.

그러나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의 변론을 한다. 특히 두드러진 사건은 강신옥 변호사와 김지하씨 필화사건이었다. 이병린은 1974년 11월 27일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선언문에 서명한다. 12월 25일 창립총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았던 이병린은 개헌청원 서명운동과 개헌문제 강연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무산된다.

국민회의 대표직 사임 압력에 맞서 구속

이어 1975년 1월 17일 이병린은 간통 혐의로 구속된다. 서울 종로2가 M 일식집 마담과 호텔에서 수차례 밀회를 한 게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심당은 부인과 사별한 데다 사귄 여인도 남편과 사실상 이혼한 상태였다. 권력기관이 여인의 남편을 꼬여 사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권력기관이 이병린으로 하여금 국민회의 대표직을 사임하도록 회유했는데 이 압력에 맞서다 구속되고 말았다. 22일 만에 석방된 이병린은 지방으로 내려가 안동, 김천 등에서 변호사 활동을 했다. 1986년 8월 21일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된다.

변호사회관 로비에서 4남 해영씨와 차녀 경자씨, 사위 정규상씨(왼쪽부터)가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 이병린 흉상은 대한변협이 ‘의로운 변호사’로 선정해 건립했다.
변호사회관 로비에서 4남 해영씨와 차녀 경자씨, 사위 정규상씨(왼쪽부터)가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 이병린 흉상은 대한변협이 ‘의로운 변호사’로 선정해 건립했다.

이병린은 최유순과 사이에 5남3녀를 낳았다. 장남 세영(사망·서울대 법대 졸업)씨는 1954년 서울대 입시에서 전체 수석을 하였다. 2남 태영(73·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거주)씨는 포항MBC 사장을 역임했으며 서정자(66·효성여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주현(미국 어번대 졸업)·은주(홍익대 건축학과 졸업) 두 딸을 두었다. 주현씨는 최시명씨(미국 어번대 졸업, 불루 크로스 보험사 근무)와 결혼하였으며, 은주씨는 박지원씨(홍익대 건축학과 대학원 졸업, 동하엔지니어링 근무)와 결혼했다. 3남 윤영(70·서울대 화공학과 졸업, 미국 아이오와대 화공학 박사)씨는 어번대 화공학과 교수로 목영화(63·서울대 미대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소연(미국 노스웨스턴대 법학대학원 졸업, 미국 앨라배마주립대 법학대학원 교수)·소정(미국 밴더빌트대 경제학과 졸업, 스타벅스 본사 근무) 두 딸을 두었다. 소정씨는 아론 브래디(미국 듀크대 졸업, 아마존닷컴 근무)씨와 결혼했다. 이병린의 4남 해영(63·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위생병원 안과과장으로 김혜영(57·외국어대 불어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정무씨(서울대 조선공학과 졸업, 대우조선 근무)를 낳았다. 5남 재영(58·서울대 화공학과 졸업, 미국 퍼듀대 화공학 박사)씨는 오혜근(57·덕성여대 영문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미국 뉴욕대학교를 수석 졸업한 지현(몬트리올 투자은행 근무)과 도경(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재학) 두 딸을 두었다. 이병린의 장녀 경영(79·배화여고 졸업)씨는 박지원(사망·연세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장남 상준씨(서울대 화공학과 졸업, 미국 어번대 화공학 박사)는 경원대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장정희씨(서울대 영문학 박사, 광운대 영문학과 교수)와 결혼하였다. 이경영씨의 장녀 박상미씨(이화여대 영문과 졸업)는 수원대 경상대학장인 배경일씨(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코넬대 경제학 박사)와 결혼하여 아들 정훈씨(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UBS HK 이사)와 딸 정민씨(서울대 영문과 박사과정)를 두었다. 이경영씨의 차녀 유미씨(서울대 영문과 졸업, 조지워싱턴대 영문학 박사, 조지타운대 여성학 교수)는 이종훈씨(미국 FTA 의학전문심사원, 병리학과 전문의)와 결혼하여 딸 미한을 두었다. 이미한씨는 예일대 인문사회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2005년 링컨기념관 개관식 에세이 대상을 수상한 재원이다. 이병린의 차녀 경자(66·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씨는 정규상(69·서울대 토목공학과 졸업, SK건설 전무 역임)씨와 결혼하여 3자매를 두었다. 장녀 정윤경씨(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시카고대 심리학 박사)는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로 윤도영씨(서울대 화공학과 졸업, 화공학 박사, 광운대 화공학과 교수)와 결혼했다. 차녀는 윤주씨(이화여대 무용학과·의상학과 졸업). 3녀 윤미씨(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프랑스 아시우세 MBA, 파리바은행 홍콩지점 근무)는 홍의제씨(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공인회계사, 골드만삭스 홍콩지점 근무)와 결혼했다. 이병린의 3녀 보영(61·연세대 영문과 졸업)씨는 최병곤(66·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하나은행본부장 역임)씨와 결혼하여 형제를 두었다. 장남 준기씨(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삼정회계법인 근무)는 이윤경씨(건국대 경영학과 졸업, 법무법인 주원 근무)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민기씨(서울대 화공학과 졸업, 변리사)는 에센특허법률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내가 본 심당 이병린

홍성우 변호사

나는 1974년 개업 3년차 때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심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분은 당시 앰네스티 한국지부장을 맡고 있었으며 나는 민청학련 사건을 맡으면서 동시에 그분이 하시는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양심범 지원, 사형 폐지, 고문 방지의 세 가지 모토를 가진 앰네스티 활동은 처음 해보는 것이라 신나고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하니까 회칙에도 없는 직함으로 감사를 맡기기도 하였다. 당시 이사 격의 지도부에는 부완혁씨, 계훈제씨도 있었다. 심당은 우리가 하늘같이 모셨던 분으로 법정활동 외에도 대한변협회장을 두 번 역임하면서 군부독재체제에 항거하며 민권을 옹호했고 그러다가 보안사에 끌려가서 엄청난 고문을 당한 적도 있다. 그분은 인권변호사의 사표이자 행동하는 법조인들의 표상으로 나는 그 밑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75년 선생께서 지방으로 내려가시면서 수전증에 떨리는 손으로 쓰신 서신을 나는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바로 이 편지는 한 시대를 활약하던 원로 법조인이 후배 세대에 인권변호의 일을 다짐하고 넘겨주는 승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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