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군 하사 A씨를 처음 만난 건 준강간 사건을 겪은 지 불과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알몸인 채 자신의 숙소 홈캠 영상에 등장하는 선임을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든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로부터 건네받은 161개의 진료기록에는 자해 시도로 인한 치료, 세 차례 자살 시도로 인한 응급실 일지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A씨가 ‘말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도 믿기 어려울 수준이었습니다.지난주 주간조선이 보도한 ‘3명에게 성범죄 피해… 자살 시도까지 내몰린 여군 하사’ 기사에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를 잘 아는 인사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장 대표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괜찮은 사람’ ‘남의 얘기를 귀담아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드는 의문은 ‘안에서 봐야 괜찮은 사람이 야당 대표로 적합한가’란 것이다. 안에서만 괜찮은 사람이란 말을 듣고, 안 사람 얘기만 귀담아듣는다면 그가 지금 야권을 하나로 모아 내년 지방선거를 치를 만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대해 국민 중 60% 이상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검찰의 이른바 ‘대장동 항소 포기’에 따른 후폭풍이 거셉니다. 3심제 사법체계에서 1심에서 2심으로 가는 항소가 의무는 아니지만, 원고와 피고의 주장이 판결 결과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대개 불복하며 쌍방 항소로 이어집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죠. 특히 피고인에 대한 형량이 낮아지거나 무죄가 선고될 경우, 검찰의 즉시 항소 혹은 상고는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검찰 스스로 수사가 잘못됐거나 무리했다는 걸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검찰이 자기모순이자 자가당착에 빠지는 우스운 꼴이 되면서까지 대장동 개
‘대장동 항소 포기’라는 정권의 국정동력을 떨어뜨릴 만한 대형 이슈가 불거졌음에도 이번 주 주간조선의 커버스토리는 한 여성 하사가 당한 성범죄 이야기다. 두 사안을 접하며 세상에 변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있다는 절망이 밀려왔다.기사에 따르면 여하사는 임관한 지 1년도 안 돼 첫 성희롱을 당했다. 처음 당한 피해에 말도 꺼내지 못했던 그는 얼마 뒤 다른 상급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이로 인해 휴직과 치료를 반복했다. 그런데 복귀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또다시 유사한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 ‘계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결로 작동합니다. 다수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은 소수의 납득을 전제로 합니다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그럴 때 소수는 집회와 시위라는 방법으로 사회 전체에 조정을 요구합니다. 그 당위성이야 문제삼을 수 없겠지만, 설득력은 평가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명분과 요구 등을 놓고 이것이 과연 우리 공동체가 수용해야 할 요구인지 여론이 판단해야 합니다. 판단의 근거를 마련하는 건 언론입니다.지난해 연말 동덕여대에서도 학교 측의 일방적 공학 전환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저를 포함한 주간조선 기자 세 명이
마감날 뉴스를 보고 있다가 여야 정치인끼리 ‘배치기’ 한판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국민들이 폭언과 욕설에 익숙해져 본인들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니 육탄전으로 레벨을 끌어올린 느낌이다. 그들의 배치기를 보고 있다가 문득 몇 년 전부터 책을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주제인 ‘다리(bridge)’의 본질이 떠올랐다.다리는 본질적으로 ‘단절’을 막고 무언가를 ‘잇는’ 속성을 갖는 건축물이다. 다리는 공간과 공간을 이으며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다리가 가장 이타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라고 생
요즈음 부동산 때문에 다들 걱정이 많습니다. 보수는 이재명 정권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비판만 하는데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서울 도시 정책을 연구하는 ‘메가시티연구소’는 부동산전문가들이 모여 간담회 형식의 세미나를 매월 개최합니다. 보수 시각에서 바라본 해결책이 참신해 함운경 소장(국민의힘 마포구을 당협위원장)의 양해를 받아 보수가 생각하는 해결책을 소개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부동산은) 보수는 진보 정책을, 진보는 보수 정책을 써보자”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보금자리주택을 통해 ‘반값 아파
예전에 한 국내 대기업과 외국 기업이 국내에 공동 투자해 만든 특수목적법인의 경영권 분쟁에 대해 기사화했던 적이 있다. 이 외국계 기업은 국내에 큰돈을 투자해 사업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외국 기업이 사업을 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그때 알았다. 두 회사는 수십 건의 민형사 소송을 진행했는데, 그때 난 국내 대기업의 관련 사업 임원이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청 고위직과 골프를 친 사실을 보도했다. 수사기관 책임자가 이해 당사자와 골프를 친 셈인데, 적어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기사화했다. 대기업 측은 나를 향해 ‘외국계 기업의 편
“문 잠그세요. 빨리 갑시다. 출발합시다.”한국어를 단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운전기사에게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기사님은 급히 엑셀을 밟았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난데없는 추격전 이후, 간신히 몸을 실은 스타렉스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왜 도망가고 있나?’캄보디아 한인 납치 및 감금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현지 출장을 간 지 3일 차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범죄단지를 카메라로 촬영하는 과정에서 경비원이 이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습니다. 그 순간 도망간 이유는 한마디로 ‘살고 싶어서’였습니다.차
예전에 한 후배 기자의 정치 기사를 데스킹하다, 기사 안에 들어간 코멘트를 한 취재원이 누군지 물었다. 후배 기자는 ‘그걸 말씀드려야 하나요?’라고 되물었다. 연차가 어린 기자라서 그러려니 하며 “적어도 데스크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기사를 책임지지 않겠냐”고 설명했다. 여러 면에서 당황스러웠지만, 모든 기사는 실명 보도를 원칙으로 한다는 불문율이 언론사 내부에서도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 제일 당황스러웠다.독자가 읽는 최종 기사는 여러 사정상 익명을 사용할 때가 많지만, 적어도 데스킹 과정에서는 취재원이 누구인지 밝히
‘소’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철제 펜스와 컨베이어벨트, 귀에 달린 번호표.... 아마 푸르른 들판보다는 축사에 갇혀 있는 풍경이 더욱 익숙할 겁니다.네덜란드는 달랐습니다. 광활한 초원 위에서 소들이 네 발을 접고 엎드려 ‘식빵’을 굽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풀 위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던 소들은 바람 따라 꼬리를 흔들고, 문득 돌아누워 풀을 뜯었습니다. 염소나 돼지, 오리도 비슷했습니다.한국에서 ‘식빵을 굽는다’는 건, 고양이가 발을 접고 움츠린 자세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네 발이 사라진 고양이의 자세가 식빵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간조선이 창간 57주년을 맞았습니다. 1968년 10월 “깊이 있는 시사 주간지를 만들자”는 한 문장으로 출발한 이 잡지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 사이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취재나 언론 환경도 변한 지 오래입니다. 글보다 영상, 기사보다 쇼트폼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클릭 수가 진실을 앞서고, 알고리즘이 여론을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주간지 편집장으로서 계속 되뇌는 질문은 ‘글은 여전히 힘이 있는가’입니다. 디지털,
연휴 기간 미국 텍사스에 있는 친구 집에 들렀다가 실탄 사격을 할 기회가 생겼다. 신병교육대 K2 조교로 군 복무를 했다는 자부심 때문에 소싯적 혈기가 솟구쳐 올랐다. 사격장은 친구 집에서 10분이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총기 전문 몰 안에 있었다. 몰에 들어서는 순간 이 나라를 왜 ‘총기의 나라’로 부르는지 이해가 됐다. 영화에서 보던 총의 종류는 전부 있었고, 야구 배트 집듯 누구나 총을 만져볼 수 있었다. 권총 같은 경우 1000달러도 안 하는 가격으로 구매가 가능했다. 어떤 총알은 아예 반값 할인판매를 하며 구매를 유도했다.
정치가 가족을 갈라놓은 지 오래다. 오랜만에 가족이 만나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부모와 자식이 적이 되고, 남편과 아내도 적이 된다. 요즘은 80대 할아버지와 이대남 손자가 한 편이 되어 50대 아버지와 논쟁을 벌이는 공동전선도 형성된다고 하니 가볍게 웃고 넘길 일만은 아니게 됐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피보다 진한 게 정치인가 싶다. 이번 추석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과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후 맞는 첫 명절이다. 이번 추석 밥상에 이런 얘기들이 오른다면 그 식탁은 지난 4월 초 헌법재판소 앞 풍경의
요즘 ‘피클볼’이란 운동의 매력에 빠져 있다. 토요일 새벽이면 ‘패들’이라고 불리는 라켓을 들고 집 근처 피클볼 경기장에서 레슨을 받은 지 오래다. ‘요즘 피클볼 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피클볼’이 뭐냐고 되묻는다. ‘테니스와 배드민턴, 탁구를 섞어놓은 라켓 스포츠’라고 설명하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휴대폰을 꺼내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면 ‘아 이런 거구나’ 하지만 표정은 ‘이런 운동은 왜 하는 거냐’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피클볼은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미국 내 급성장 스포츠’ 1위에
9월 1주 차 한국갤럽이 발표한 이재명 대통령의 직무수행평가 결과를 보면 ‘잘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월등하게 높은 세대가 40대와 50대다. 특히 40대에서는 그 비율이 81%까지 치솟는다. 40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내 주변에는 실제로 이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지인들과 만나 얘기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단 객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김어준의 뉴스공장’ 같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점이다. 어떤 플랫폼, 어떤 콘텐츠를 통해 세상을 보든 그건 본인들 자유다.
8월의 마지막 주에 태어난 내게 가을은 냄새에 실려 찾아온다. 세기가 바뀌기 전만 해도 생일 전후로는 항상 가을 냄새가 났던 걸로 기억한다. 내게 가을의 냄새란 건 소나기와 초록 잎의 냄새가 묘하게 섞인 여름의 냄새도, 갈색으로 변하는 나뭇잎을 훑고 온 싸늘한 냄새도 아니다. 내가 느끼는 가을 냄새는 오래된 책의 눅눅한 냄새, 밤새 타고 남은 숯의 재 냄새 같은 것들이 묘하게 섞여 있다.가을 냄새는 내 세포 속 기억을 되살린다. 몇 년 전 정선 민둥산의 억새밭의 풍경도, 라라랜드 어느 해변에서 자전거를 타며 맞았던 바닷바람도 모두
스포츠팬들의 냄비근성은 정치 팬덤과 다르다. 정치 팬덤은 내로남불이란 비판을 들어도 지지하는 정치인을 감싸고 돌지만, 스포츠팬들은 보내는 지지만큼이나 비난도 거세고 변덕스럽다. 특히 소속팀 선수들을 향한 팬들의 비난은 살벌한 수준이다.이번주 주간조선 야구 기고에는 소셜미디어(SNS) 악플에 시달리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고통이 담겼다. 팬들의 인기를 먹고사는 선수들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비판은 감내해야겠지만, 댓글의 수준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걸로 보인다. 반려견을 독살하겠다는 악플도 그중 하나인데, 요즘은 반려견도 또 다른 가족이니
1994년 체결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Budapest Memorandum)’는 소련 해체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국제 문서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 규모인 1900여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영국·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주권과 영토 보전을 보장받는 안전보장 약속을 얻었다. 이 약속이 명문화된 것이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다.양해각서에서 서명국들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주권·영토 보전 존중’ ‘무력 사용 또는 위협 금지’ ‘경제적 강압 금지’ ‘침략 시 유
윤석열 전 대통령이 특검 소환에 불응하고, 내란 관련 재판에도 나가지 않는 모습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속옷만 입고 버텼다든가, 교도관들 손에 들려나가다가 낙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뉴스를 보면서 윤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들대로 이 현실이 드라마 같다고 생각한다.지금의 이 현실이 마냥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여권 인사들이다. 최근에 만난 더불어민주당의 한 인사는 윤 전 대통령의 이러한 침대축구에 “나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