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의료기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며 의료계 직역 갈등의 해묵은 뇌관이 다시 점화되는 양상이다. 해당 개정안의 핵심은 물리치료사,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같은 의료기사의 업무를 현행 ‘의사의 포괄적 지도’라는 종속적 개념에서 ‘의사의 처방 혹은 의뢰’라는 수평적·기능적 관계로 변경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탈출의 이유, 단독 개원
현행 ‘의료법’ 및 ‘의료기사법’ 체계하에서 의료기사의 법적 지위는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 이들은 독립적 의료주체가 아닌,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보조하는 기능적 인력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수행하는 모든 업무는 예외 없이 ‘의료기관 내’에서 그리고 ‘의사의 포괄적 지도·감독’이라는 수직적 전제하에서만 합법성이 인정된다. 물리치료사가 아무리 뛰어난 전문성을 갖추었더라도 병원 밖을 나서는 순간 불법이 되고, 임상병리사가 환자의 자택에서 검체를 채취하는 행위 역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재의 의료다. 그럼 개정안은 어떨까?
가장 먼저 독립 의지를 보였던 물리치료사 분야를 예시로 살펴보면 이렇다. 현재 우리는 병원에서 진료받으면, 통상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가 약을 조제 받는다. 의약분업 이후 굳어진 제도다. 그런데 그 외의 상당한 행위는 모두 의료기관 내에서 받는 게 일반적이다. 가령 정형외과나 재활의학과 같은 곳에 방문한다면, 의사의 진료에 따라 어떠한 물리치료를 받으라는 처방이 나오고, 원내에서 근무 중인 물리치료사가 환자에게 물리치료를 제공하는 식이다. 이걸 약국과 유사하게 ‘물리치료 처방전’을 발행하고, 원외에 존재하는 물리치료센터에서 받게 하자는 거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변화도 이런 제도 변경에 조금 우호적인 상태로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으며, 만성질환자의 재가(在家) 관리와 퇴원 후 지역사회 연계 치료의 필요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뇌졸중 환자가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매번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하고, 이들의 가정방문 재활 서비스 수요는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현실의 절박한 수요와 책상 위 법률 사이의 심각한 괴리가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의사는 물리치료 처방만 하고, 물리치료사들이 자택을 방문하는 식의 접근을 허용하자는 논리가 선다. 의료기사 측은 환자 접근성과 편의성을 내세우고 있고, 의사들은 의료의 질 악화와 환자 안전을 이유로 반대 중이다.
그렇지만 이런 명분론 아래의 실제 뇌관은 직역 간 업무 범위를 둘러싼 해묵은 다툼에 있다. 병원 입장에선 각종 검사와 치료가 수익의 요체다. 우리나라 의료체계상 진료나 상담보단 직접적 행위에 유독 가점을 주기 때문인데, 만약 원내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검사와 치료가 원외로 독립하게 된다면 병원의 수익성은 극도로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의료비 통제 고삐 풀릴 것
만약 개정안이 원안대로 통과된다면, ‘원외 시장’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의사의 처방전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독립 물리치료센터나, 혈액 채취 및 검사 결과를 통보하는 방문 검사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의료 연관 서비스 등장이 가시화될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과연 이 변화의 최종 수혜자는 누가 될까. 일차적으론 환자의 물리적 접근성이 향상될지 모르나, 최종적으론 건강보험 재정 악화가 발생해 환자들도 피해를 볼 개연성이 크다. 현재 우리 정부가 의료비를 통제하는 방식은 의사를 종속적인 의료체계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는 대신, 의사한테 목줄을 채워 관리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을 통한 ‘진료비 삭감’ 제도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물리치료의 상황을 예시로 살펴보자. 현재 구조에선 의사가 환자에게 특정 검사나 물리치료를 시행하면 그 비용은 추후 심평원의 엄격한 심사를 거친 다음, 건강보험공단을 통해 지급된다. 만약 심평원이 해당 의료 행위를 ‘과잉 진료’ 혹은 ‘불필요한 처치’라고 판단할 경우, 그 비용은 의사에게 지급되지 않는다. 이미 서비스를 제공하고도 돈을 받지 못하는 재정적 위험을 의사 개인이 고스란히 감수하는 구조다.
이러한 삭감 시스템은 당연히 의료계의 극심한 불만을 야기한다. 의사의 전문적 판단이 행정적 잣대에 의해 사후에 재단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 제도가 의사들의 의료 행위를 무한정 늘리는 것을 강력하게 억제해 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의료기사법 개정으로 ‘원외 처방’이 현실화하면 이런 핵심적인 통제 고리는 끊어질 수밖에 없다. 의사는 이제 물리치료를 직접 시행하고 비용을 청구하는 주체가 아니라, ‘물리치료 처방전’을 발행하는 역할만 맡게 된다. 환자는 이 처방전을 들고 독립된 원외 물리치료센터를 방문하고, 서비스 비용 청구는 해당 센터가 심평원에 직접 한다.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주체(의사)와, 서비스 제공 및 비용 청구를 하는 주체(물리치료센터)가 명확히 분리되는 것이다.
이 경우 의사는 굳이 처방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삭감의 위험이 더 이상 본인에게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환자가 요구하는 대로 혹은 관행적으로 처방전을 남발하더라도 그 재정적 책임은 고스란히 원외 센터와 건강보험 재정이 나눠 지게 된다. 심평원이 뒤늦게 원외 센터의 청구를 삭감한다고 한들, 이미 처방을 내린 의사의 행태를 통제할 실질적 방법은 사라진다. 결국 의사라는 단일 통제 지점이 무너지면서, 불필요한 의료 이용이 급증하고 건강보험 재정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개연성이 극도로 높은 것이다. 환자 편의라는 명분 뒤에 숨은, 더 큰 비용 청구서가 사회 전체에 돌아올 수 있다는 얘기다.
고령화 사회 앞의 두 가지 선택지
결국 의료 수요가 폭증할 초고령화 사회에서 우리 앞에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째, 의사 외의 다른 의료 직역에는 불합리한 족쇄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현재와 같이 의사를 최고책임자로 묶어두어 의료비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의료기사가 독립해 단독 개원할 길을 터주는 개정안은 통과되어선 안 된다. 둘째, 의사에게 책임과 권한을 모두 몰아주는 대신 비용 통제도 같이 진행하던 현재의 구조를 버리고, 의사는 진단과 처방만 수행하게끔 바꾼다. 이 경우 간호사는 물론 의료기사도 독립적으로 센터나 치료소를 열고, 이들 기관들이 개별적으로 건강보험에 의료행위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는 형태가 되므로 비용 통제는 지금처럼 하기 어려우나 직역의 독립성과 전문성, 환자 접근성은 훨씬 더 높일 수 있다. 연금개혁 상황에 비유하면 ‘덜 내고, 덜 받기’와 ‘더 내고, 더 받기’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형태다. 우리 사회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관련기사
- 한강버스 멈추자...김민석·오세훈 또 충돌, 이번엔 '안전'
- '또'라톤? 주말마다 마라톤...커져가는 주민 불편
- "한국 핵잠 시대 열렸다"...美 해군총장 "중국 억제도 예상된 수순"
- 조국 "'긁'힌 듯?"에...한동훈 "울지 말고 얘기해"
- 운항 재개 15일만에 멈춰 선 한강버스...승객 82명 전원 구조
- 李대통령 "울산 발전소 참사, 국민 안전 책임자로서 송구"
- 배우 나나 자택에 흉기 강도...모녀가 몸싸움 끝에 제압
- 비트코인, 9만5000달러 붕괴..."6만달러 갈 수도"
- 중동·아프리카 외교전 스타트...李대통령, 7박 10일 순방길
- "李대통령 잡아 묶으면 1억" 전한길 발언...막말 논란 끝에 고발
- 헬리오시티에 '전용 결혼시장'...강남發 '계급결혼' 논란도
- 정부, 집단행동 검사장들 '평검사 전보' 검토...대장동 항소포기 후폭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