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J ENM은 명실상부 국내 톱티어 콘텐츠 왕국으로 통한다. ‘슈퍼스타K’ ‘응답하라 시리즈’ ‘꽃보다 할배’ 등 지상파 방송과 차별화된 콘텐츠는 시청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마마 어워즈(MAMA AWARDS)’는 세계적 스타의 결집은 물론 전 세계 200개국에 생중계되는 글로벌 1위 음악 시상식으로 발돋움했다. 그런데 바로 이 국내를 넘어 세계적 콘텐츠 기업이 되겠단 야심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졌다.
CJ ENM의 미국 콘텐츠 제작사 피프스시즌 인수는 콘텐츠 사업 시작 이래 최대 규모로 추진됐다. 하지만 이후 할리우드 파업과 무리한 인수에 따른 재무 부담 등 악재가 겹쳤다. CJ ENM은 3년 연속 적자 상태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총 3년간 순손실 규모는 1조원을 넘겼는데 무리한 인수합병(M&A)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사이 국내 콘텐츠 업계 사정은 조금 달라졌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 매도자 우위 시장은 OTT 성장세 둔화와 수익성 중심의 시장 재편으로 매수자가 협상력을 갖는 매수자 우위 시장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CJ ENM이 되레 ‘승자의 저주’에 빠졌다고 말한다.
2022년 1월 CJ ENM의 미국 제작사 피프스시즌 인수는 큰 화제를 모았다. CJ ENM은 당시 무려 약 9337억원(약 7억8500만달러)을 투자해 지분 80%를 확보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CJ, 제2의 넷플릭스를 꿈꾸다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건 피프스시즌이 보유한 확장성 때문이다. 피프스시즌은 ‘라라랜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 인기 영화를 비롯해 영국 BBC 인기 드라마 ‘킬링 이브’ ‘더 나이트 매니저’ 등 세계적 흥행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프로젝트의 투자·제작과 유통·배급에 참여한 저력 있는 곳이다. 또 유럽과 남미 등 전 세계 19개 국가에 글로벌 거점도 갖고 있다.
OTT 콘텐츠 제작은 수익성이 보장된 사업으로 통한다. 한 번 콘텐츠를 재작하면 재판매 등을 통해 꾸준한 수익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초반 분위기는 긍정적이었다. 2023년 일본 도호스튜디오가 25% 지분을 투자하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했으며, 재무 부담도 낮췄다.
하지만 피프스시즌은 기대와 달리 곧 배우·작가 파업에 휘말리며 적자의 늪에 빠졌다. 미국 콘텐츠 시장에서 배우와 작가의 힘은 상당히 세다. 할리우드는 당시 OTT 시장 재편에 따른 비용 압력과 불안정한 시장, 인공지능(AI)으로 인한 영향 등으로 산업 자체가 수 개월 마비됐다. 당시 파업은 디즈니, 워너브라더스 등 할리우드 대형 콘텐츠 제작사에 두루 영향을 미쳤으나 중소 제작사에 속하는 피프스시즌의 타격은 한층 컸다. 25개 이상의 콘텐츠 프로젝트 플랜이 무너졌으며, 피프스시즌의 2022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누적 순손실 규모는 약 3000억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피프스시즌은 2023년 8월 전체 직원의 약 12%에 해당하는 30명을 감축한 데 이어 지난 10월 전체 인원의 약 10%에 이르는 약 20명을 추가로 해고했다. 앞서 9월 공동 최고경영자였던 크리스 라이스가 회사를 떠나며 그레이엄 테일러가 단독 CEO로 남는 등 경영진 변화도 겪었다.
CJ ENM의 부담은 급증했다. 순차입금은 2021년 6816억원에서 피프스시즌 인수 이후 2조2745억원까지 급증했다가 올해 상반기 말 1조8348억원을 나타냈다. CJ ENM은 자산 매각과 증자 등으로 재무 개선에 나섰다. 2023년 10월 보유하던 소속사 빌리프랩 지분 51.5%를 1671억원에 처분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피프스시즌의 일본 파트너사 도호로부터 약 3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했고 이듬해 7월에는 보유 중이던 넷마블 지분 23%를 2500억원에 처분했다.
뒤집힌 콘텐츠 시장 판도
문제는 빅딜 이후 달라진 시장 분위기다. OTT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엔 넷플릭스·디즈니 등 글로벌 플랫폼들이 앞다퉈 콘텐츠 확보전에 나서면서 제작사들의 몸값이 급등해 ‘매도자 우위 시장’이 형성됐다. 그러나 이후 OTT 성장세가 둔화되고 수익성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투자 열기가 식었고, 할리우드 파업과 경기침체로 제작비 부담이 커지자 제작사 가치가 하락했다. 그 결과 이제는 매수자가 협상력을 갖는 ‘매수자 우위 시장’으로 바뀌었다.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업계는 매도자 우위 시장으로 프리미엄이 붙는 등 인수 경쟁이 치열했는데, 그새 상황이 바뀌어 이제는 완전히 매수자 우위 시장으로 돌아섰다. 프리미엄은 사라지고, 금리 인상 등 시장 환경마저 우호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나 하이브 등 콘텐츠 업계 큰손들은 사법리스크로 손발이 묶이기까지 하면서 오히려 기획사를 매각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게다가 업계에서는 여러 제작사, 기획사를 인수하는 전략이 오히려 양질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퍼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해선 다양한 배우, 음원 등을 자유롭게 재원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계열사 안에서만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오히려 불리해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떠난 인수 주역들, 그리고 남은 과제
그러는 사이 피프스시즌 인수를 주도했던 주역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피프스시즌 인수를 주도했던 송창빈 경영리더는 JP모건 출신 투자전문가로 인수를 성사시킨 주역이다. 이후 피프스시즌 재무책임자와 펀딩 테스크포스장까지 맡으며 후속 투자를 이끌었지만 결국 지난해 2월 퇴임했다. 인수 후 통합 과정을 주도한 안젤라 킬로렌 CJ ENM 아메리카 CEO 역시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 현재 피프스시즌은 시즌제 콘텐츠 제작과 글로벌 유통에 집중해 턴어라운드를 추진 중인데, 이 과업은 이재현 회장의 사위인 정종환 CJ ENM 콘텐츠·글로벌사업 총괄이 주도하고 있다. 정 총괄은 2024년 정기인사로 콘텐츠·글로벌사업 총괄에 올랐다.
이재현 회장은 “2030년까지 전 세계인이 CJ를 알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수차례 강조해왔다. 그의 철학은 일관됐다. “전 세계인이 매년 두세 편의 한국 영화를 보고, 매달 한두 번 한국 음식을 먹으며, 매주 한두 편의 한국 드라마를 보고, 매일 한두 곡의 한국 음악을 듣는 세상”을 만드는 것.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닌 ‘문화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믿음과 기업의 글로벌 도약이라는 비전이다. 그러나 그가 장기 비전으로 제시한 ‘컬처·플랫폼·웰니스·지속가능성’ 4대 성장축 가운데 가장 앞서 있던 ‘K콘텐츠의 세계화’는 가장 험난한 산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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