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동 항소 포기’라는 정권의 국정동력을 떨어뜨릴 만한 대형 이슈가 불거졌음에도 이번 주 주간조선의 커버스토리는 한 여성 하사가 당한 성범죄 이야기다. 두 사안을 접하며 세상에 변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있다는 절망이 밀려왔다.
기사에 따르면 여하사는 임관한 지 1년도 안 돼 첫 성희롱을 당했다. 처음 당한 피해에 말도 꺼내지 못했던 그는 얼마 뒤 다른 상급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이로 인해 휴직과 치료를 반복했다. 그런데 복귀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또다시 유사한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 ‘계급’이 위력으로 작동하는 군대에서, 피해자가 스스로 보호장치를 작동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권아현 기자가 기사에서 여러 장면에서 표현을 절제했다고 느꼈다. 기사로 다 담지 않아서 오히려 여하사가 당했던 고통을 더 그려보게 된다. 그리고 묻게 된다. 4년 전 고 이예람 중사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군은 무엇을 바꿨고, 세상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여하사의 안타까운 사연은 그 질문에 잔혹할 만큼 분명한 답을 준다. “거의 아무것도.”
기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여하사가 당한 피해만큼이나 그가 내보인 삶에 대한 의지가 짓밟힌 부분이다. 그는 반복되는 트라우마로 약물 치료와 자해, 응급실 내원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럼에도 “완치 후 다른 부대에서라도 계속 복무하고 싶다”는 의지를 진료기록에 남겼다. 군이란 조직을 믿고 다시 한번 버텨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또다시 배신당했다. 과거 자신을 ‘돌봐줬던’ 상급자에게 문을 열어준 그 순간, 그는 다시 피해자가 됐다. 피해자는 누구를 탓하고 있을까.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가해자일까. 아니면 일터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인 자기 자신일까. 기자와 만난 그는 “이게 현실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피해자의 기억과 현실 감각이 뒤섞인 것은 당했던 폭력 그 자체만큼이나 절망적이다.
고 이예람 중사의 죽음 이후 군은 대대적 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개혁의 구멍이 얼마나 컸는지를 증명한다. 우리는 또 한 명의 하사를 잃을 뻔했다. 군은 더 이상 ‘징계 몇 개’로 위기를 모면하려 해서는 안 된다. 계급 문화, 피해자가 계속해서 가해자와 마주치는 환경,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관행.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여하사와 같은 피해자를 만든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다음은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반복되어 나올 것이다. 그는 이제 전역을 희망한다. 버티고 버텼던 한 젊은 하사의 군 생활은 이렇게 끝나간다. 군이 지켜야 했던 것은 그의 ‘충성’이 아니라 그의 ‘안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군대가 지켜야 할 것은 조직의 체면이 아니라,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근본적 변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