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체결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Budapest Memorandum)’는 소련 해체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국제 문서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 규모인 1900여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영국·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주권과 영토 보전을 보장받는 안전보장 약속을 얻었다. 이 약속이 명문화된 것이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다.

양해각서에서 서명국들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주권·영토 보전 존중’ ‘무력 사용 또는 위협 금지’ ‘경제적 강압 금지’ ‘침략 시 유엔 안보리 지원’ 등을 약속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핵을 내려놓는 대신 국제적 보호를 확보한 대표적 비핵화 보장 장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후 일련의 군사 행동을 통해 이러한 약속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름반도를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합병을 선언했다.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 분리 세력에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러시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분리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원한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침공을 시작했다. 러시아가 세 차례에 걸쳐 조항을 위반하면서 이 각서는 휴지 조각이 됐다.

이번 주 커버스토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대한 당사국과 그 주변국들의 이야기다. 기고를 한 송승종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와 EU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협상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 건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지키지 않은 러시아의 태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든, 공군력을 지원하든 EU와 우크라이나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다면 러시아는 언제든 침공할 수 있다고 주변국들은 생각한다. 트럼프가 합의를 보장한다 해도, 그의 임기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신뢰를 잃은 나라와 다시 약속을 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마감날이었던 21일 아침,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이재명 대통령의 인터뷰가 실렸다. 이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과거 위안부 합의, 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 “국가로서 약속이므로 뒤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개인적으로는 윤석열 정부가 합의한 징용 배상 합의안이 옳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뒤집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한다.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맺는 약속의 무게감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국제질서가 계속해서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러시아의 사례는 ‘강대국도 자신이 서명한 약속을 어길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준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한 국가가 보여주는 ‘약속의 무게감’이란 건 그 자체로 하나의 방패가 된다. 말로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같아서 면목 없지만, 같은 무게감으로 피해자들의 아픔을 달래는 것도 정부가 고민해야 할 몫이다. 약속이란 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양자 간의 합의다. 개인과 개인 간의 약속도 마찬가지고,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유엔 헌장, 조약, 양해각서와 같은 수많은 약속들로 얽혀 있다. 그 약속이 유지되는 진짜 힘은 문서의 문구나 말이 아닌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책임감이다.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