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2일 핀란드 총리로 선축된 마리 키비니에미 집권당 대표(오른쪽)가 타르야 할로넨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지난 6월 22일 핀란드 총리로 선축된 마리 키비니에미 집권당 대표(오른쪽)가 타르야 할로넨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여성 천하’에서 사시니 행복하시겠어요!”

얼마 전 핀란드를 방문하신 어떤 한국분이 필자에게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아마도 최근 한국 신문에 실렸던 ‘핀란드는 여성천하’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은 모양이다.

몇 주 전 핀란드 정부는 만 41세의 여성을 새로운 총리로 선출해 세계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세계인들은 총리의 나이가 젊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여성이 이미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는 나라에서 총리직마저 여성이 차지했다는 것에 더 놀라는 눈치였다.

외부인에게는 여성 정치인이 남성을 뛰어넘어 정부 요직에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겠지만 핀란드 내에서는 여성들이 정부 수장직에 오르는 것이 오히려 큰 뉴스거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곳 핀란드에서 여성의 활약상은 갑자기 어제 오늘 발생한 유행이나 이상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핀란드 여성들은 집에만 머물지 않고 남성들처럼 밖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척박한 토양과 기후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녀 모두 힘을 합쳐야 했기 때문이다.

여성 의원이 전체의 42% 차지하지만…

한반도보다 1.5배나 넓은 땅덩어리에 530만이라는 작은 인구가 흩어져 살고 있는 핀란드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적·가정적 생산성을 높이려면 여성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1800년대 후반 이후 급속히 산업화를 추진하던 핀란드 정부는 여성이 정치뿐만 아니라 교육·경제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한때는 글을 못 읽으면 결혼을 못한다는 법이 생겼을 정도였다. 다소 이상하기는 하지만 이는 여성 문맹률을 줄이기 위해 단행된 핀란드 정부의 극단적 조치였다고 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핀란드는 1906년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한다. 비록 유럽 변방에 위치하고 있지만 핀란드는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도 훨씬 먼저 여성의 정치 참여를 허용한 나라가 되었다. 1907년 총선에서 최초로 19명의 여성 국회의원이 선출된 이후 여성 의원의 수는 꾸준히 늘어 가장 최근에 있었던 2007년 총선에서는 무려 84명의 여성 의원이 선출돼 전체 국회의원의 42%나 차지하게 되었다.

필자는 그러나 핀란드 여권 신장 역사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핀란드 여성 총리 선출 소식을 들으며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재작년 홀연히 교육부 장관직을 자진 사퇴했던 핀란드 여성 정치인 한 명이 떠올랐다.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육부 장관직에 올랐던 사리 사르코마씨는 재임 후 불과 1년6개월 만에 “가족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장관직을 사임한다”고 발표, 핀란드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과 유치원에 다니는 올망졸망한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사르코마 장관은 “장관직을 사임키로 한 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옳은 결정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며 사임 발표문에서 결연히 말하기도 했다.

엄마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한 나라 장관직마저 버린 사르코마씨의 용기있는 결단에 정치인 동료와 일반 시민은 대체로 ‘이해한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의외로 비난을 퍼붓는 언론과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임기를 채우지 않고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이며 일과 가정을 병행해 나가는 대부분의 다른 핀란드 여성들에게 결코 모범이 되지 않는 결정이라는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사회 전체가 ‘수퍼우먼 증후군’

핀란드에서 핀란드 여성과 거의 같은 입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필자에게도 이런 비난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아마 필자뿐만 아니라 일과 가정이라는 잡히기 어려운 두 마리 토끼를 열심히 쫓아다니며 ‘왜 잡지 못하냐?’고 스스로 자책하고 있을 많은 핀란드 여성들도 다 비슷한 입장인지 모르겠다. 핀란드란 나라는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다 ‘수퍼우먼 증후군’에 빠져 있는 것 같다.

표면적으로 핀란드는 세계경제포럼이 2009년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리포트(The Global Gender Gap Report) 2009’에서 총 134개 국가 중 1위인 아이슬란드에 이어 2위를 차지한 모범적 남녀평등 국가다. 핀란드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이미 남성을 앞지른 지 오래됐으며 각종 자격증도 60% 이상을 여성이 취득하고 있다. 여성의 85%는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 정부는 여러 다양한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여성이 직장과 가정생활을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은 출산 후 거의 1년 동안 유급 휴가를 가질 수 있으며 원한다면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도 재고용이 100% 보장된 육아 휴직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통계 수치 속에 가려 있지만 핀란드에도 여성 차별은 상당 부분 존재하고 있다. 여성 정치인의 수에 비하면 여성 기업인의 수는 아직도 많이 적고 진입장벽도 높은 편이다. 핀란드 200대 기업을 조사해보면 여성은 주로 하위 직급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중간 간부의 10%, 고위 간부의 2%만이 여성이다. 이런 남녀 직급 불평등은 보수 격차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돼 다른 EU(유럽연합) 국가와 비교해 볼 때 핀란드의 남녀 임금 격차는 더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자 월급을 100으로 볼 때 여자 월급은 80밖에 되지 않는 게 핀란드의 현실이다.

또 하나 유감스러운 사실은 다른 서방 국가의 남성들과는 다르게 핀란드 남성들은 집안일을 돕는 데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핀란드는 예로부터 가부장적인 전통이 강한 사회였다. 남성들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지금은 물론 시대가 바뀌어 예전보다 남성들이 가사노동에 더 많이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그 수준은 여성들의 기대에는 많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핀란드는 이혼율이 50%에 육박, 유럽에서도 상당히 높은 나라에 속하는데 이혼의 가장 큰 이유가 그 흔한 ‘성격차이’가 아닌 ‘가사노동의 불균형’이라고 하니 말이다.

여성 40% “성폭력·폭력위협 경험”

육아 참여도에서도 핀란드 남성은 이웃 나라인 스웨덴 남성보다 훨씬 소극적이다. 스웨덴 남성의 육아휴직 이용률은 78%인 데 비해 핀란드 남성의 육아휴직 이용률은 3%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핀란드는 출산·육아 부문에서 남녀평등을 이루려는 좋은 제도는 만들었지만 차후 남녀 간 성별 분업 차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은 소홀히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래저래 핀란드 여성들은 밖에서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돈 버느라고 바쁘고 안에서는 아이 키우랴, 밀린 가사일 하랴…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이 밖에도 핀란드 여성을 위협하는 요소는 몇 가지 더 있다. 몇 년 전 국제앰네스티는 핀란드 정부가 핀란드에서 만연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치하고 있다고 맹비난한 바 있다. 국제사면위원회의 통계를 보면 핀란드 여성의 40%가량은 신체적 혹은 성적 폭력을 당했거나 혹은 폭력의 위협을 받아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다른 북유럽 국가보다 훨씬 더 높다고 한다.

‘가사노동의 불균형’ 외에 핀란드 부부를 이혼에 이르게 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요인은 남편의 과도한 음주와 음주 후 이어지는 폭력이다. 핀란드 남성 중에는 주당이 많은데 남편의 음주와 폭력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핀란드에는 비일비재하다. 필자도 주변에서 단순히 폭력을 넘어 남편이 부인을 살해해 형사처벌을 받는 것을 두 번이나 지켜봤다.

필자가 지금까지 지켜본 핀란드는 ‘여성천하’와도, 또 ‘여성천국’과도 좀 거리가 있다. 국가와 사회는 여성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했지만 또 여성에게 반대 급부적으로 요구하는 의무사항도 그만큼 많다. 핀란드 여성은 오늘도 그 긴 의무사항 리스트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저 바쁘게 움직일 뿐이다.

이 보 영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핀란드에 거주. 투르크 대학원 동아시아학 석사과정. 노키아 엔지니어인 핀란드 남성 티모 라사텐씨와 결혼해 미코(10세), 이다(8세), 마티(6세) 세 아이를 키우고 있다.

키워드

#핀란드 통신
이보영 통신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