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차세대 전지에 사용될 소재를 설명하는 울산과기대 조재필 교수.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연구실에서 차세대 전지에 사용될 소재를 설명하는 울산과기대 조재필 교수.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2차전지 분야에서 세계 1위의 기술력을 갖춘 삼성과 LG가 궁극적으로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 것 같다. 두 업체는 현재보다 최소 5배 이상의 용량을 가진 차세대 수퍼전지 개발에 뛰어들었고 이게 상용화된다면 산업구조를 뒤흔들 엄청난 파급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삼성과 LG가 전기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조재필(46)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 교수의 전망에 귀가 솔깃했다. 현대자동차 입장에서 보면 바짝 긴장할 만한 내용이다. 현재 삼성SDI는 소형 전지 부문에서, LG화학은 중대형 전지 부문에서 각각 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조재필 교수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하는 국가프로젝트인 차세대전지기술융합연구단 단장이다. 지난 10월 29일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있는 울산과기대 친환경에너지공학부 연구실로 찾아가 만난 조 교수는 자신이 이끄는 연구단이 개발 중인 휘는(플렉시블) 전지와, 전기차용 수퍼전지에 이르기까지 차세대 전기 기술의 현주소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말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 전문용어에 대한 설명은 몇 번이나 다시 물어야 했다.

조 교수는 “현재보다 용량이 대폭 강화된 수퍼전지가 조만간 상용화될 것 같다. 유망 신사업으로 전기차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전기차는 한 번 충전으로 최대 150㎞밖에 갈 수 없다. 내연기관 차량이 연료를 가득 넣고 달릴 경우 800㎞ 안팎을 가는 것에 비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내연기관차를 따라가려면 지금보다 5배 이상의 용량을 가진 전지가 나와야 한다. 공기를 이용한 리튬전지나 수퍼전지용 특수 소재가 상용화될 경우 내연기관차 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다. LG화학은 기술이 확보되면 그룹 내에서 자동차 생산을 하고 이를 통해 수직계열화한다는 복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삼성전자도 이재용 부회장 체제에서 차세대 먹거리 분야 중 하나로 전기차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현대차 남영연구소에 있는 500여명의 연구팀도 전기차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울산과기대는 2009년 정부가 추진한 신기술융합형 성장동력사업 중 하나인 차세대 전지 기술 개발 운영기관으로 선정돼 2014년 6월까지 총 220억원의 예산과 500여명의 연구인력 지원을 받고 있다. 조 교수는 이 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연구단은 △나노 구조의 필름형 수퍼전지 △접을 수 있는 고체형 대면적 2차전지 △인체용 무선충전 수퍼전지 △통합형 플렉시블 필름전지 시스템 △에너지 하이브리드형 통합 셀(배터리) 등 5가지 분야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 삼성과 LG가 내놓은 휘는 휴대폰의 핵심기술은 휘는 전지(배터리)에 있다. 삼성이 내놓은 스마트폰은 좌우로 휘는 기술을, LG의 스마트폰은 상하로 휘는 기술을 이용했다.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외형)가 휘어질 수 있으려면 먼저 배터리가 휘어져야 한다. 또 기존과 동일한 성능을 내야 한다. 조 교수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가 바로 휘어지는 전지 개발이다.

“삼성과 LG 스마트폰은 엄밀히 말하면 휘는 전지를 이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강제로 전지를 약간 휘어지게 해서 내놓은 상품이다. 우리가 연구하는 전지는 필름형으로 둘둘 말 수 있다. 실험실 수준에서 휘어지는 박막형 전지를 개발해 냈고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테스트를 통과하면 상용화로 간다.”

조 교수는 실험실에서 휘는 전지를 보여줬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얇은 전지를 집어 든 그는 전지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직접 시연했다.

- 실제 전기 공급이 가능한 전지인가. “그렇다. 상용화 단계는 아니지만 전기 공급은 가능하다.”

- 우리만 갖고 있는 기술인가. “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앞서 있다. 우리만의 핵심기술 몇 가지가 들어있다.”

조 교수는 휘는 전지의 핵심기술은 표면 패턴화, 음극과 양극 활물질 소재 개발, 나노 집합체 기술이라고 했다. 표면 패턴화는 얇은 전지판을 지속적으로 구부렸다 폈다 할 때 발생하는 균열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다. 휘는 전지는 알루미늄 전지판 위에 양극과 음극 활물질을 얇게 깔고 코팅하는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전지판에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균열이 생기면 전지의 기능은 곧장 마비된다.

조재필 교수팀이 개발한 완벽하게 휘는 전지.
조재필 교수팀이 개발한 완벽하게 휘는 전지.

또 패턴화된 전지판은 평평한 전지판 표면보다 음극과 양극 활물질이 잘 달라붙게 한다.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할 경우 응력이 생겨 전지판에서 활물질이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러면 전지가 작동하지 않는다. “휘는 전지에 사용되는 전지판은 육안으로 식별이 안 될 정도로 작은 크기의 벌집 모양을 식각해 넣었다. 나노기술을 결합한 것으로 이렇게 패턴화되면 양극과 음극소재가 전지판에서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균열을 방지할 수 있다. 이 패턴화 기술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기술이다. 우리와 협업하는 LG화학은 최근 케이블 형태의 전지 개발에 성공했다.”

조 교수의 연구단은 휘는 전지를 만들기 위해 자체적으로 음극과 양극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재도 개발했다. 휘어지는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전지의 두께는 얇아지게 마련인데, 두께가 얇아지면 음극과 양극 활물질의 용량이 기존의 2배 이상으로 높아져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 전지와 동일한 수준의 전기를 만들 수 있다.

“휘는 전지의 또 다른 핵심기술은 소재에 있다. 대부분의 전지에 들어가는 음극, 양극 활물질은 리튬, 망간, 코발트 등의 산화물을 섞어서 만든다. 우리는 일반 전지에 들어가는 활물질보다 많은 에너지를 가진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야 했다.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전지에 들어가는 리튬, 코발트 등의 배합을 조절하고 온도를 900도 이상으로 높여 새로운 양극 활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휘는 전지를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때론 비과학적인 연구방법을 사용한다고 했다. 이론적 연구를 선행하고 이를 토대로 실험을 하는 게 아니라 단순작업 형태의 실험을 반복해 최적의 모델을 찾기도 한다는 것. “계산 화학은 유용할 때도 있지만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활용도가 낮다. 원료 배합비율을 조절하며 실험을 반복해 최적의 소재를 찾는 게 낫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

양극 활물질이 리튬과 코발트의 합성으로 만들어지는 반면 음극 활물질은 실리콘에서 뽑아낸다. 실리콘은 일반적으로 검은색을 띠는데 연구단이 고열처리 후 나노입자로 만든 실리콘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만든 음극과 양극 활물질은 반죽 형태로 만들어 앞서 말한 패턴화된 전지판(집전체)에 올려 압연한다. 이렇게 압연된 집전체를 여러 개 붙여서 배터리를 만든다. 그러면 분리막을 사이에 두고 음극과 양극이 반응해 쇼트가 일어난다. 너무 많이 붙이면 배터리가 굵어지고 휘어지는 정도가 준다.”

휘는 전지의 소재 개발에 참여한 일부 업체는 양산에 착수했다. 울산 기업인 세진이노테크는 50억원 이상을 투자해 전지에 필요한 활물질 소재의 양산을 추진 중이다. 공장과 장비를 설치하려면 앞으로도 60억원 이상의 추가 투자가 예상된다. 전지에 들어가는 활물질 소재의 전 세계 시장 규모는 약 50억달러에 달한다. “울산에 있는 기업 가운데 새로운 먹거리 개발이 절실한 곳은 차세대 전기개발 같은 유망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세진이노테크와 샤인 같은 중소기업은 우리 연구단과 협업을 통해 상업화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우리 대학은 원천기술에 대한 로열티로 매출의 1% 정도를 받게 된다.”

연구단은 180도까지 휘는 전지를 만들기 위해 전지의 크기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연구실에서 본 휘는 전지는 일반 스마트폰의 배터리보다 2배 이상 커보였다. “얇아야 하기 때문에 크기는 상대적으로 기존 배터리보다 조금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향후 휘는 스마트기기의 크기는 지금보다 조금 더 커질 것이다.”

연구단은 또 급속 충전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수퍼 커패시터 기술은 10초 만에 전지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발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 기술이 있어야 짧은 시간에 충전이 가능하다. 전지에 들어가는 활물질 소재의 입자를 나노 형태로 작게 만들어 접합하면 고속충전 기능이 강화된다. 연구단이 만든 활물질 전지 소재의 나노집합체 기술은 지난해 한국을 대표하는 10대 기술로 선정되기도 했다.

연구단은 손상된 인체 기능을 보완하는 바이오 기기를 무선으로 충전할 수 있는 차세대 전지 기술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초음파공진기반무선전력전송기술로 불리는 이 기술은 예를 들어 심장의 기능을 돕는 심장박동기를 삽입한 환자가 기기의 배터리를 교체하기 위해 개복수술을 진행하던 현행 방식에서 벗어나 개복을 하지 않고도 기기의 충전이 가능토록 한다. 현재 2차전지를 넣은 심장박동기는 1년 정도 사용한 후 배터리를 교체한다. “우리가 개발하는 무선충전기술은 인체에 무해한 초음파를 통해 공진방식으로 20㎝ 이상 떨어진 상태에서도 충전이 가능하다. 앞으로 몇 년 더 있으면 된다.”

플렉시블 전지는 활물질을 부착한 패턴화된 집전체를 겹겹이 쌓아 만든다.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플렉시블 전지는 활물질을 부착한 패턴화된 집전체를 겹겹이 쌓아 만든다.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무선 고속충전이 가능한 전지가 상용화될 경우 바이오닉스와 결합해 로봇팔과 로봇다리 등을 만들 수 있다. “향후 10년 정도면 로봇팔을 생체에 이식하는 게 가능해진다. 현재는 생체형 로봇팔에 전력을 공급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개척이 안 되고 있지만 무선 고속충전 배터리가 양산되면 바이오닉스 분야도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조 교수는 휘는 전지가 상용화된 이후에는 중대형 수퍼전지 개발로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180도까지 자유자재로 휘는 전지가 완성되고 나면 중대형 수퍼전지로 흐름이 바뀔 것 같다. 자동차에 사용될 수퍼전지 분야는 이미 우리도 개발을 시작했다. 관건은 고용량의 활물질 소재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기름을 가득 채운 내연기관 차량처럼 전기차로 700~800㎞를 이동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거다. 심지어 미국은 소형 항공기를 전기로 움직이는 실험도 진행하고 있다.”

조 교수가 이끄는 연구단의 이번 연구과제는 미래부가 발주한 거다. 이 연구는 총 5년 동안 진행되는 과제로 3년간 자체 연구개발을 하고 나서 2년 동안 유관 기업체와 협력해 양산이 가능한 수준으로 기술을 이전해야 한다. LG화학 등이 연구단과 협업을 하는 것도 이런 차원이다. 연구단은 현재까지 총 14건의 논문을 발표했고 국내외에 14건의 특허를 출원했다.

“IBS(기초과학연구원)는 10년짜리 연구과제도 수행하는데 우리는 3년 연구하고 2년은 기업체와 협력해 상업화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산업부의 평가를 잘 받으려면 기술이전과 실적이 나와야 하는데 연구진 입장에서는 쉽지 않다. 내년에 연구가 끝나기 때문에 다른 연구과제도 찾아야 한다. 우리 연구단은 학생과 연구원만 25명인데 인건비 주고 연구소 운영하려면 일감을 따와야 한다. 항상 그런 게 걱정이다.”

조 교수는 우수 인력 양성을 위해 울산과기대의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울산과기대는 KAIST처럼 기술원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새누리당 김기현 정책위원회 의장과 미래창조과학부는 최근 이 사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학교와 기술원의 가장 큰 차이는 학생들의 병역면제에 있다. 기술원은 석·박사 과정을 거칠 경우 병역이 면제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기술원으로 바뀌게 되면 서울대나 KAIST로 나가는 우수 인력을 잡아둘 수 있다. 울산과기대의 학생 수는 750명 정도로 광주과학기술원보다 5배 정도 많다.”

경북대 공대를 졸업한 조 교수는 1990년 미국 아이오와주립대로 유학을 가 세라믹 분야의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조지아공과대학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했는데 이때 차세대 전지 개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귀국한 뒤 삼성SDI에 들어가 전지 개발을 담당했다. “삼성에 있을 때 업무 스트레스가 강해 위궤양, 십이지궤양을 달고 살았다. 개발 납기를 맞춰 일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아서 오래 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삼성에서 전지 관련 부서의 업무를 두루 접할 수 있었던 건 내게 큰 행운이다. 학교에 와서 차세대 전지 개발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삼성을 나와 금오공과대를 거쳐 한양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를 울산과기대로 영입한 사람은 조무제 현 총장이다. 조 총장은 울산과기대 설립 초기부터 전국의 유명 과학고를 모두 찾아가 학생 모집에 앞장섰다. 또 우수한 교수진 확보를 위해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 총장은 자신보다 23살이나 어린 조 교수를 두 번이나 직접 찾아와 영입을 제안했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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