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출연하는 JTBC의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 ⓒphoto JTBC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출연하는 JTBC의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 ⓒphoto JTBC

몇 년 전 일이다. 직장 동료 미스터 김, 미스터 리와 함께 독일로 업무 출장을 갔다. 하루는 함께 저녁을 먹으며 미스터 리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나와 미스터 김이 한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동안 미스터 리 혼자 다른 비즈니스 미팅에 다녀온 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누가 부르더니 나한테 길을 물어보는 거야. 아마 내가 이 동네를 잘 아는 사람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야.”

“한국 사람이었어?” 미스터 김이 물었다.

“아니, 외국인이었어.”

그 순간 나는 한 마디 하려는 충동을 겨우 참아야 했다. 미스터 리는 나보다 나이가 족히 몇 년은 더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입술을 깨물며 겨우 참은 말은 이거였다. “있잖아요, 미스터 리. 이 상황에서 외국인은 당신인 걸요.”

한국에서 9년 정도 살면서 내가 가장 혐오하게 된 단어가 ‘외국인’이다. 한국 단어 중 한 가지를 지워버릴 수 있다면 바로 이 말을 선택할 것이다. ‘외국인’이란 말은 한국이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 서고 있다.

언어의 달인인 척, 한국어 전문가인 척하려는 게 아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부끄럽게도 번역가 없인 이런 칼럼도 못 쓴다. 하지만 영국·프랑스·스페인과 같은 다문화사회에, 그리고 소련처럼 여러 인종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애쓰는 국가에 살았던 경험자로서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바뀔 때다. 어떤 단어와 개념들은 사회 통합에 있어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단 걸 깨닫고 이들을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넣어버려야 할 때다. 한국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겠다고 드는 건방지고 은혜를 모르는 영국인에게 왜 지면을 할애하느냐고 주간조선 편집장에게 항의 이메일을 보내기 전에 내 말부터 좀 들어보시라. 언어는 완벽하지 않다. 영원한 것도 아니다. 언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하고 변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많은 단어들이 10년 전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언어의 진화 속도가 시대를 따라오지 못할 경우 인위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

한때 영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누군가를 보면 ‘외국인’이라고 부르는 게 용인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아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순전히 피부톤과 외모만 보고 ‘외국인’이라고 부르면 사람들은 당신이 편견에 가득 찬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당신이 완전히 잘못됐고 생각할 것이다.

1920~1950년대에 걸쳐 일어난 어마어마한 이민의 파도로 현재 영국 인구의 약 12%가 아프리카인(특히 카리브해인) 혹은 남아시아인(특히 인도·방글라데시·파키스탄)이 됐다. 이민자 자손들이 대대로 아이를 낳고 살면서 이들을 ‘외국인’이라고 부르는 게 불가능해졌다. 이민 2~3세대들은 그들 조부모의 고국엔 발도 디뎌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외국인’이란 단어는 일상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이젠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나 사용하는 말이 됐다. 대신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등장했다. 귀화 자메이카인이나 트리니다드인은 ‘블랙 브리티시(Black British)’, 인도인과 파키스탄인은 ‘브리티시 아시안(British Asians)’이라고 불린다. 미국에서 ‘외국인’이란 단어는 더더욱 금기다. 많은 미국의 흑인 소수단체들은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 American)’이란 표현을 즐겨쓴다. 미국에서 흑인들은 스페인어로 ‘검다’를 의미하는 ‘니그로(Negro)’로 불렸다. 과거 스페인의 노예무역을 연상시키는 이 단어는 이젠 기피 단어다. 단어는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진화한 단어는 변화된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외국인’이란 말이 영국에선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이 단어를 쉽게 폐기처분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그들은 즉각적으로 반격한다. “글쎄, 그럼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은가요?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할까요?”

이 부분이 난제다. 단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인’이라는 말에 담긴 사고가 문제인 것이다. 많은 한국인은 반무의식적으로 한국이 단일민족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많은 한국인에게 국가와 인종은 거의 동일시되는 듯하다. 인종순혈주의를 추종하고 국제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의 수는 적지만 (슬프게도) 이런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인종 상동성(相同性)과 다문화사회 두 개념은 양립할 수 없다. 한국은 (어쩌면 이미) 다문화사회가 돼가고 있다. 즉 좋든 싫든 ‘한국인이라면 이렇게 생겨야지’란 생각과는 결별할 때가 왔다.

한국에서 태어나는 절대 다수의 아이가 여전히 민족적으로 한국인이긴 하지만 엄청난 양의 다문화 혼인이 이뤄지고 있고 다문화가정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취업연령에 도달한 이 시기에 이들을 ‘외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상당히 인종차별주의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을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도 ‘외국인’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 여권에 적힌 국적이 한국이라면 그들도 당신과 다를 바 없는 한국인인 거다. 피부색만 보고 가진 그들에 대한 편견은 사실이 아닐 수밖에 없다.

난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외국인’이란 말이 왜 그토록 유용하게 사용됐는지 알 것 같다. 한국은 과거 꾸준히 외부의 침입을 받아왔다. ‘외국인’이란 위험한 존재였다. 조선시대의 쇄국정책 아래에서 사람들은 ‘우리’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우리’라는 공동의 울타리 안에 국민이 쉽게 단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이 말했듯 ‘우리’는 ‘타인’ 혹은 ‘그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다문화사회에서 ‘한국인’과 ‘외국인’이란 관념은 마치 모래 위에 선을 긋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편 가르기는 비즈니스와 일상에서의 소통을 가로막고 민족 간 분쟁을 낳을 뿐이다.

다음 대화는 편 가르기로 발생하는 민족중심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비한국인 알렉스와 마이크의 대화다.

“짐한테 여자친구 생겼대.”

“한국 사람이야?” 마이크가 물었다.

“아니, ‘외국(Waygook)’이야.”

영어를 사용하는 많은 비한국인들이 스스로를 ‘외국(Waygook)’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들은 이 단어가 무해한, 외려 재밌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 표현은 다소 충격적이다. 만약 스스로를 ‘외국’이라고 부른다면 한국인들의 ‘우리’가 아닌 ‘그들’이 되길 택한 것이다.

위의 사례는 비한국인들이 그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얼마나 단절감을 느끼는지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 통합되려는 노력조차 포기한 것이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1~2년 산 영어강사가 스스로를 ‘외국’이라 지칭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영어강사가 한국에서 결혼해 정착하려고 결심한다면,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운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의 자식마저도 스스로를 ‘외국’ 혹은 반(半)‘외국’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민족중심주의적 잠재의식을 강화시키는 또 하나의 단어는 접두사로 종종 사용되곤 하는 ‘우리-’라고 생각한다. 가령 비한국인인 내가 지인과 함께 지인의 친구 혹은 가족을 만나러 가면 그중 한 명은 반드시 날 가리키며 내 지인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 사람 우리말 할 줄 알아요?” 인류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 질문에 깔린 민족주의적 정서를 알아챌 수 있다. 이런 질문을 들을 때면 ‘저 말에서 우리라는 표현만 없어도, 훨씬 우호적으로 들릴 텐데’라고 느낀다. 게다가 나를 코앞에 세워두고 제3자에게 질문이라니. 내게 직접 “한국말 할 줄 알아요?”라고 묻는다면 좋을 텐데.

만약 내가 “네, 우리말 해요”라고 대답했을 때 얼마나 이상할까를 생각하면 이 경우 ‘우리-’라는 접두사가 부적절하다고 느낀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거다. 외모는 전혀 한국인 같지 않은 사람이 말이다. 이 경우 ‘우리-’라는 표현은 인종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외국인’으로서 난 ‘우리-’라는 접두사를 사용할 도리가 없다. 이 표현은 늘 날 배제시키고 만다. 한국인들이 이 표현을 비한국인을 배척하기 위해 일부러 사용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밝혀둔다. 하지만 한국인들도 비한국인들이 이같은 표현을 접했을 때 어떻게 느낄지 헤아려야 한다.

한국 사람이 많이 쓰는 말 중 이상하다고 느끼는 말이 또 있다. ‘우리나라’라는 단어다. 다른 나라에서도 일상 대화 속에서 드물지 않게 ‘우리(we)’ ‘우리나라(our country)’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앵커나 기자들이 뉴스 보도에서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방송은커녕 신문에서도 자국을 이런 식으로 지칭한 곳은 없었다. 내가 다녀온 대부분의 국가의 경우 언론사는 자국을 1인칭 ‘우리(we)’보단 3인칭 ‘그것(it)’으로 표현함으로써 보도의 객관성을 일정 부분 유지한다.

한국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볼 때조차 해설위원들이 “한국 선수들”이란 말 대신 “우리나라 선수들”이라고 할 때면 뭔가 이상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한국인들에게 ‘우리나라 선수들’이란 말은 심지어 매우 애국주의자적이며 국수주의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하더라도 내가 ‘우리나라 선수들’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TV에 나와 한국 국가대표팀 경기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나라 선수들 아주 잘 뛰어줬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내가 대체 어느 팀을 말하는 건지 헷갈릴 것이다. 이런 혼란은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나라’라는 표현은 내가 결코 쓸 수 없는 말인 것이다. 내 피부색 때문에 결코 쓸 수 없는 표현인 셈이다.

한국인의 피가 섞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우리나라’란 표현을 쓸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뻔하다. ‘우리나라? 당신의 나라가 도대체 어디라는 건지?…’

꼭 ‘우리나라’라고 해야 할까? ‘한국’이라는 국가의 이름으로 부르면 일이 더 쉬워지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이란 말에 소유욕을 빼고 약간의 객관성을 더해 ‘한국 사람’이라고 할 순 없는가. 내가 영어로 누군가를 “이 사람은 영국에서 왔습니다” 대신 “이 사람은 우리나라(our country)에서 왔습니다”라고 소개하면 매우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상당수의 한국어에서 국가와 민족성을 완전히 분리해내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다문화 한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특정 집단을 배제하거나 심지어 불쾌하게 하는 단어들은 가려내야 한다.

언어에 있어 인위적으로 사전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동성애가 용인되기 시작한 1960년대 영국과 미국 사회에서 새로운 단어가 탄생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동성과의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과학용어는 ‘동성애자(homosaxual)’였다. 하지만 이 단어는 일상 대화 속에서 사용하기엔 조금 길고 어려운 느낌이었다. ‘퀴어(queer)’란 말을 대신 쓸 수도 있지만 이 표현은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결국 동성애자 집단은 스스로 ‘게이(ga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게이는 원래 ‘유쾌한(happy)’을 뜻한다. ‘게이’는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용어였고 언론 역시 불쾌감을 조장할 일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동성애자들은 이로써 수치심 없이 불릴 수 있는 용어를 갖게 됐다.

한국 역시 어떤 용어는 과거의 유산일 뿐이며 시대에 맞춰 일상적 용법에선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나라’라는 표현은 세계화가 위협으로 여겨졌던, 외국인이 잠재적 위험 요소로 받아들여졌던 조선시대에서나 유용했다. 이 말 자체가 다른 한국인과 즉각적 유대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라는 말 자체에서 자긍심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문화 한국에서 이 표현은 지나치게 배타적일 뿐이다.

내게 가장 큰 적대감을 주는 단어 ‘외국인’은 ‘우리나라’란 표현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인종, 글로벌 비즈니스 그리고 도덕적 가치 측면에서 세계와 연결된 한국에서 ‘내국인’과 ‘외국인’ 편 가르기는 설 자리가 없다. 한국 사회를 쪼개려 드는 경계선을 없애려면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워버려야 한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바로 이 둘 사이의 사회적 평등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긍정적인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외국인’과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단어는 이 나라가 진정한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데 발목을 붙잡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분열을 조장하는 이런 표현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첫걸음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 ‘멋진 신세계’를 쓴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부인 로라 헉슬리는 이런 말을 했다. “말(words)은 좋은 신하이자 나쁜 주인이다.” 유독한 단어의 사용을 용인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과거에 발목 잡힐 수밖에 없다.

팀 알퍼

1977년 영국 출생. ‘런던 스쿨 오브 저널리즘’, 켄터베리 소재 켄트대학 졸업(철학·영화 전공). 런던에서 프리랜서 번역가, 스포츠 기자로 일함. 서울에서 ‘korea IT’ 편집자, 교통방송 영어 FM 프로듀서, 대한항공 기내지 ‘모닝캄’ 영문판 편집자 등으로 일했음. 조선일보에 칼럼 연재중.

팀 알퍼 디자인하우스 기자 / 번역 김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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