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에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파괴한 원명원 서양루. ⓒphoto 김시덕
1860년에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파괴한 원명원 서양루. ⓒphoto 김시덕

1860년 10월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청나라의 왕실 정원인 베이징의 원명원(圓明園)을 약탈했다. 원명원에는 예수회 수도사들이 설계한 서구식 정원이 있었는데, 유럽 군인들의 파괴 행위는 이 서양루(西洋樓)에까지 미쳤다. 서구 문명에 대한 청나라 측의 존중을 보여주는 서구식 정원을 서구인들이 파괴한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청나라가 처한 아이러니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원명원 파괴 사건의 배경에는 제2차 아편전쟁, 일명 애로(Arrow)호(號) 전쟁이 있다. 영국은 청나라산 차 수입이 늘어나면서 무역적자가 커지자 이를 메우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청나라에 판매하려 했다. 담배 가격 인상안을 두고 국민 건강을 위해 대폭 올려야 한다는 측과 담배 판매가 줄어들면 세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두 개의 주장이 충돌하고는 하지만, 정상적인 국가라면 자국민의 건강을 해치는 약물이 국내에서 자유로이 유통되는 것을 용납하고 그로부터 국가가 이익을 얻으려 하지 않을 터. 애국자이자 선정(善政)을 펼치고자 노력하는 정치인 임칙서(林則徐)가 1839년에 영국 상인들로부터 사들인 아편을 바다에 버리자, 영국 측은 이를 핑계 삼아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주민들이 버린 차는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고, 청나라 사람들이 버린 아편은 중국의 반(半)식민지화를 이끌었다.

제1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유럽 국가들은 난징조약으로 홍콩을 할양받고 개항장을 확대했다. 유럽 국가들은 청나라에서 얻는 이득이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난징조약의 개정을 청나라 측에 요구했다. 청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1856년 청나라 관리들이 해적선 애로호에 게양되어 있던 영국 깃발을 버린 사건을 핑계 삼아 영국과 프랑스가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양국 군은 청나라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베이징 입구의 톈진을 공격했다. 청나라는 이들 국가와 톈진조약을 맺어 추가적 개방을 약속했다. 그러나 청나라 측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조약의 실행을 거부하자, 영국과 프랑스군은 베이징에 입성하여 원명원 등을 파괴하며 청나라 정부를 압박했다. 서양루는 이때 파괴되었다. 청나라는 이들 국가에 대해 추가 개방을 약속하는 베이징조약을 1860년 10월에 맺었다. 이때 러시아는 양측 간의 협상을 도와주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1858년의 아이군조약(Treaty of Aigun)으로 아무르강 이북 지역을 할양받은 데 이어 연해주 일대를 할양받아 조선왕국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17세기 중기의 나선정벌 이후 거의 2세기 만에 조선과 러시아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나선정벌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의 동물 모피를 획득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반면, 이때는 명확하게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유라시아 동해안을 남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러시아는 자신의 영역 및 영역 주변에 있는 만주·연해주·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이나 일본과는 구별되는 독자적 시각으로 파악하려 했다. 오늘날 이들 지역에 대해 한국인들이 유지하고 있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이 시기에 러시아인 신부 비추린과 같은 학자들이 이루어낸 성과에 힘입고 있다.(강인욱 ‘춤추는 발해인’, 100~104쪽) 러시아가 유라시아 동해안에 등장한 17세기 중기를 경계로 유라시아 동부의 국제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이해하고 ‘한·중·일 삼국지’적인 세계관을 폐기하는 것이, 20세기 후기에 한국인들이 이루어낸 성과를 21세기에 지속시킬 수 있는 길이다.

서구 국가들의 군사적 도발에 청나라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현실은 청나라 국내는 물론 조선과 일본에도 충격을 주었다. 청나라 국내에 준 충격은 1850~1864년의 15년에 걸친 태평천국이라는 종교 국가의 출현이다. 18세기 후기부터 청나라 각지에서는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백련교도, 묘족, 천리교도, 무슬림 등 종교·민족 집단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서구 세력이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면서, 개항장이 자리한 남부 지역은 가일층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중국 북부에서 뒤늦게 남부로 이주한 객가(客家)인은 소수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노골적 차별을 받아 경제적 곤란을 더 겪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도 객가라는 이유로 과거시험에서 여러 차례 낙방하면서 정신 착란에 빠졌다. 그는 혼수상태에서 신이한 인물들을 만나 세상을 정화하라는 사명을 받고, 오장육부가 바뀌면서 새로운 인간이 되는 꿈을 꾸었다. 현대 한국의 신흥종교에서 자주 보이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피를 받는 신이체험을 한다는 ‘피가름’ 교리의 원형을 보는 듯한 꿈을 홍수전이 꾼 것은 1837년의 일이었다. 그후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어로 지은 포교서를 읽은 홍수전은, 자신이 꿈속에서 만난 존재들이 최고신 야훼와 예수라고 믿게 된다. 처음에는 종교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그의 온건한 포교활동은, 비참함을 더해가는 청나라의 현실 앞에서 점점 급진적이 되어간다.(고지마 신지 ‘洪秀全と太平天國’ 이와나미서점, 96~98쪽)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한 8대 ‘혁명 투쟁’을 기념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위키커먼스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한 8대 ‘혁명 투쟁’을 기념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위키커먼스

이윽고 아버지 야훼와 ‘큰형님’ 예수를 믿고 홍수전을 예수의 동생으로 믿는 배상제교(拜上帝敎) 세력은 1850년 중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 봉기한다. 이를 금전기의(金田起義)라고 해서, 현 중국 정부는 이를 근현대 중국의 8대 혁명 투쟁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여 베이징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에 새겨두었다. 확실히 반란 초기의 태평천국군은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입각한 엄격한 윤리관과 군율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1853년에 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은 이후에는 이러한 ‘신선함’이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홍수전을 비롯한 수뇌부에 혁명 이후의 청사진이 없었다는 것이 근본적 원인일 것이다. 1854년에는 배상제교를 개창하던 초기부터 배척해 온 공자·맹자 등 중국의 전통적인 권위를 다시 끌어들이고 기독교 성경의 출판을 금지하는 등,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의 부재는 전통적 세계관으로의 회귀로 이어졌다. 서구 국가들은 처음에 이들에게 약간의 기대를 품기도 했으나, 이들에게서 아무런 가능성을 찾지 못하자 청나라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아편전쟁 끝에 베이징조약이 맺어질 즈음부터는 서양인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조직되어 태평천국군의 진압에 동참했다. 같은 ‘아버지 야훼’를 믿는다는 이유에서 동질감을 느꼈던 서양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본 태평천국 측의 충격은, 1637년에 규슈 시마바라에서 봉기한 자신들을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의 군함이 포격했을 때 가톨릭교도 반란군이 느꼈을 감정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태평천국은 청·서양 연합군의 공격과 내분으로 1864년에 몰락하지만, 15년에 걸친 태평천국의 반란이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에 미친 영향은 컸다. 우선 청나라는 이들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구 세력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적지 않은 이권을 양보해야 했다. 또한 만주·몽골 지배층의 무능이 드러나면서, 증국번·이홍장·좌종당 등 한인(漢人) 관료들이 대거 약진하여 향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종주국’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기독교 반란 세력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긴장한다. 원명원이 파괴된 몇 달 뒤인 1860년 12월 10일,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왕 철종은 청나라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사신을 파견한 뒤 신하들에게 질문했다. “연경(베이징)은 우리나라에는 순치(순망치한)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으니, 만약 연경이 위험하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안연하겠는가. 또한 듣건대 저들(서양)이 강화라고 하는 것은 단지 교역을 도모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윤상(倫常)을 망치는 술(기독교)을 온 세계에 전염시키려 한다지 않는가. 그런즉 우리나라도 그 해를 면하기 어렵겠다. 하물며 선박의 날카로움은 일순에 천 리를 간다지 않는가. 진실로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할 것인가.”(‘승정원일기’·하정식 ‘태평천국과 조선왕조’ 229쪽)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보내서 정부를 협박하여 기독교도들을 보호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황사영이 청나라의 가톨릭 베이징 교구에 보내려다 적발된 것이 1801년이었다. 이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조선 정부는 기독교도를 반역자로 간주해서 혹심하게 탄압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기독교 국가들의 군함이 베이징을 공격했으니, 조선 정부로서는 우려하던 사태가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판단될 만한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세도정치하에서 무사안일주의로 흐르던 조선의 지배층은 서구 세력의 접근이라는 위협을 애써 외면했다. 1860년 12월에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양이(洋夷)가 이미 황성에 가득 차서 혹시 그 기세를 몰아 동범(東犯)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신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교역으로써 본무(本務)를 삼는데, 우리나라는 교역할 만한 재보가 없으니 무슨 까닭으로 가볍게 남의 나라에 침입하겠습니까. 다만 사교(邪敎)를 익힌 양약을 먹는 무리가 있어 몰래 서로 창도(倡導)한다면 역시 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려울 뿐입니다.”(‘일성록’·하정식 같은 책 98~99쪽) 조선이 가난해서 서양이 조선을 탐낼 리가 없으니 조선 국내의 기독교도만 탄압하면 된다는 답신이다. 확실히 서구 열강들은 조선에 비해 일본을 더욱 탐냈고 일본에 비해 청나라를 더욱 탐냈으니 이 사신의 분석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권자들의 분위기가 이러했으니, 훗날 조선의 개국을 주장하게 되는 박규수와 같은 사람은 청나라에서 위기의 실상을 보고도 귀국해서는 형식적인 보고만을 하기도 했다.(하정식 같은 책 199~216쪽) 외교를 청나라에 맡겨 온 조선은 외부의 급변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했고, 박규수는 일종의 무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1860년에 청나라의 정세를 보고 온 조선 사신은, 서구 세력은 교역을 원할 뿐이지 영토적 욕심은 없다는 보고를 했다. 서구 세력의 접근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 견해는, 18세기 후기에 캄차카반도를 거쳐 쿠릴열도를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에 대해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보인 견해와도 일치한다. 조선과 근세 일본의 차이는, 일본에는 서구 세력의 접근을 정치·군사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대비하고자 한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18세기 후기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는 러시아의 해상 접근을 막기 위한 군사적 논의를 담은 ‘해국병담(海國兵談)’을 출판하려 했지만 출판인을 찾지 못하자 직접 목판을 제작해서 출판했다. 조선 이상으로 지방 분권적 경향이 강한 근세 일본이었지만, 러시아라는 서구 세력의 접근은 ‘자기 주군’ ‘자기 번(藩)’을 뛰어넘어 ‘일본’이라는 국가 차원에서 장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나타나게 했다. 하야시 시헤이가 ‘해국병담’ 첫머리에 적은 다음 구절은, 유라시아 대륙의 변화가 시작하는 지점이 몽골제국으로 상징되는 대륙에서 해양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오늘날 나가사키는 대포로 엄중하게 방비하나, 오히려 아와·사가미의 항구에 그러한 방비가 없다. 이는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청나라, 네덜란드에서 배를 타면 거칠 것 없이 곧장 에도의 니혼바시까지 올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을 방비하지 않고 나가사키만 방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교정 해국병담’ 권1) 실제로 1806~1807년 쿠릴열도에서 러시아와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대외적 위기감을 느낀 일본 지배층은 각종 대비책을 추진했다. 조선이 프랑스·미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한 것이 1866·1871년이니, 일본은 조선보다 길게 보아 100년, 짧게 보아 60년 이상 먼저 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것이 근대 이후 양국의 운명을 가른 첫 번째 요인이다.

태평천국의 난을 소재로 한 19세기 중기 일본의 군담소설 ‘외방태평기(外邦太平記)’. 이 시기에는 청나라의 긴박한 정세를 전하는 문헌이 다수 일본에 유입되었으며, 이들 문헌은 유입 즉시 일본 국내에서 빠르게 확산되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사진 오른쪽에는 청조 함풍제의 부인과 청조의 간신이 음모를 꾸미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시덕
태평천국의 난을 소재로 한 19세기 중기 일본의 군담소설 ‘외방태평기(外邦太平記)’. 이 시기에는 청나라의 긴박한 정세를 전하는 문헌이 다수 일본에 유입되었으며, 이들 문헌은 유입 즉시 일본 국내에서 빠르게 확산되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사진 오른쪽에는 청조 함풍제의 부인과 청조의 간신이 음모를 꾸미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시덕

기독교 세력의 반란과 러시아와의 무력충돌 경험을 가진 도쿠가와 막부는, 서구 연합군이 청나라를 공격하고 태평천국군이 중국 남부 지역을 점령하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1862년 막부는 청나라의 정세를 살필 목적으로 51명의 파견단을 태운 지토세마루(千歲丸)를 상하이에 보낸다. 쇄국 이래 막부가 직접 해외에 사람을 파견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훗날 메이지유신에서 중심 인물로 활동하게 되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도 이때의 견문이 계기가 되어 혁명을 지향하게 된다.

지토세마루 파견단 이전의 일본인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만주족에 반대하는 한인의 봉기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1832년 아메리카에 표류했다가 구조되어 당시 상하이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닛폰 오토키치(にっぽん音吉)라는 사람이 다른 표류민들을 일본에 귀국시키면서 그렇게 전했기 때문이었다.(‘太平天國にみる異文化受容’, 山川出版社, 1~2쪽) 그러나 지토세마루 파견단은 태평천국의 난이 반청흥한(反淸興漢)이라는 민족주의적 동기가 아니라, 변발하지 않은 장발적(長髮賊)이 일으킨 사교(邪敎) 집단의 반란이라고 결론내렸다. 또한 서구 세력의 압도적인 무력에 청나라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모습을 본 이들은, 서구 세력의 제1 목표가 청나라인 덕분에 일본이 피해를 덜 입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라는 사람은 다카스기 신사쿠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1862년에 다음과 같이 상부에 보고한다. “영국·프랑스가 멋대로 황국(皇國)을 침략하지 않는 것은 지나(支那·중국)에서 장발적의 위세가 매우 강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발적이 영국·프랑스에 굴복한다면 영국·프랑스가 우리나라를 침략할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미국이 이전부터 교묘한 말로 우리나라의 개항을 설득하는 것도, 점차 아시아주(州)에서 세력을 떨치기 위한 기반을 만들려는 속셈입니다. 러시아는 남쪽을 노리고, 영국·프랑스는 자신들의 인도·지나 영지에 피해가 있을 것을 우려하여 러시아를 억제하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쓰시마에서 오랑캐들이 싸우는 것입니다.”(‘해완치언(解腕痴言)’, ‘勤王文庫 4’, 1919년, 243쪽) 이처럼 서구 세력의 관심이 청나라에 쏠려 있고 일본은 증기선을 운행하기 위한 나무와 물의 공급처로서만 인식되다 보니, 일본은 자기 주도하에 변화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것은 태평천국의 난이 일본에 가져다 준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 행운은 조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주어졌었다.

일본은 앞서 언급한 러시아와의 충돌 경험과 함께, 네덜란드라는 유럽의 우호 세력을 통해 세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유럽 각국의 정보는 네덜란드어로 집필된 서적을 통해 일본 지배층에 비교적 잘 알려진 상태였다. 1853년 미국이 파견한 페리 제독과 미·일화친조약(Treaty of Kanagawa)을 맺을 때의 교섭 언어는 네덜란드어였으며, 조약문도 영어·일본어·네덜란드어·중국어가 작성되었다. 심지어 막부는 네덜란드 측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페리 제독이 일본의 개국을 요구하기 위해 올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이처럼 국제 정세를 정기적으로 알려주는 유럽 국가가 있었고, 일본인 스스로도 급변하는 유라시아 동해안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단을 청나라에 보낼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응했다. 사람이든 집단이든 타산지석으로 교훈을 얻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은 스스로 고통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법이다. 그러나 지토세마루 파견단은 청나라가 내란과 외국의 침략으로 몰락해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19세기 중기의 일본은 청나라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일본도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막부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신정부군으로 갈려서 내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1868년 3월 13일, 막부군의 브레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는 오늘날 도쿄 시바의 게이오대학 근처에서 신정부군의 핵심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와 단독 회담을 가졌다. 도쿠가와 쇼군 가문이 무조건 항복을 할 테니 쇼군 가문을 존속시켜주고, 막부의 거점인 에도성(江戶城)을 무력으로 공격하지 말고 무혈입성하라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은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평화롭게 진행된 것이 결코 아니며, 쇼군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도호쿠 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신정부군의 에도성 무혈입성에서 보듯이 일본은 중요한 국면에서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일본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 요인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웅번(雄藩)들과 서구 세력간의 무력 충돌에서 패한 것이었다. 1863년에는 영국과 사쓰마번(薩摩藩)이 충돌했고(사쓰에이 전쟁), 1863-64년에는 서구 4개국 연합군과 조슈번(長州藩)이 충돌했다(시모노세키 전쟁). 이러한 충돌을 통해 서구 세력의 압도적인 힘을 실감한 웅번들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에 급속히 접근했다. 이들 전쟁으로부터 3년 뒤인 1866년에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이 쇄국 정책을 강화한 결과 국제 정세 변화에 더욱 둔감해진 것을 생각하면, 잘 진 것은 잘못 이긴 것보다 낫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들 세력은 기존에 온건한 개국을 주장하던 막부에 불만을 품고 연합하게 된다. 개국을 주장하던 도쿠가와 막부 측이 수구세력으로 간주되어 타도 대상이 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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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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