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이융남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 관장은 지난 8월 몽골의 고비사막에 있었다. 그는 탐사 대장으로 공룡 화석을 탐사하고 있었다. 고비사막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공룡 화석 발굴지.

그는 갖고 간 위성전화를 켰다. 인터넷을 연결해 이메일을 확인했다. 세계적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보내고 온 논문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는 출발 직전인 8월 10일에 네이처에 논문 한 편을 보냈었다. 잡식성 공룡인 데이노케이루스 관련 내용이었다.

들어와 있는 이메일 제목을 훑어보는데 네이처 편집장 명의의 이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또 거부된 것이겠지라고 생각했다. 종전에도 논문 한 편을 보냈다가 게재를 거부당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엔 웬일인가. 거부가 아니고, 게재에 적합한 논문인지 판단을 위해 심사위원들에게 평가(review)를 해달라며 논문을 돌렸다는 내용이었다. 이 관장은 기대에 부풀었다.

지난 10월 31일 추색이 짙은 대전 대덕연구단지의 지질박물관 내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 관장은 “네이처에 논문 한 편 실리는 게 평생의 목적인 학자도 있다. 네이처의 논문 게재 거부율이 98%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탐사하다 다시 위성전화로 이메일을 체크했다. 네이처 편집장으로부터 이메일이 새로 와 있었다. 리뷰가 끝났으며 게재키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논문을 제출한 지 불과 4일 만에 리뷰가 끝난 것이었다. 같이 탐사하고 있던 외국인 학자들은 “믿을 수 없다(Incredible)”라며 축하해 줬다. “초단시간 내에 리뷰가 끝나고 게재키로 한 건 그만큼 과학계가 오래 기다리던 논문이라는 얘기”라고 이 관장은 말했다.

이 관장의 논문은 미국의 과학 주간지인 네이처의 10월 23일자호에 실렸다. 국내 언론은 ‘신비의 공룡 50년 미스터리, 한국 과학자가 풀었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는 지난 10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7000만년 전 공룡 데이노케이루스(Deinocheirus)의 화석을 찾아내 분석한 결과, 풀과 물고기를 같이 먹었던 거대한 잡식성 타조공룡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관장은 이 공룡을 몸길이 11m, 키 5m, 몸무게 6.4t으로 추정했다.

이 관장에게 큰 연구 성과를 안겨준 공룡 데이노케이루스는 1965년 몽골 고비사막 남쪽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폴란드 공룡 화석 탐사팀이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길이 2.4m의 공룡 팔뼈를 찾아냈다. 이들은 그리스어로 ‘무서운 손’이라는 뜻을 지닌 ‘데이노케이루스’로 이름을 지었다. 육식공룡 중 가장 유명한 티라노사우루스의 팔이 1m. 때문에 ‘데이노케이루스’는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몸집이 두 배 이상 큰 육식공룡으로 생각됐다. 몽골은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 잘 발달해 있고 풍화작용으로 지표면에 화석이 잘 노출되어 있다. 또 공룡 화석을 둘러싸고 있는 토양이 부드러워 발굴이 쉽다.

이 관장은 연구실 내 자신의 서가에서 누렇게 바랜 낡은 논문을 하나 꺼내 왔다. 폴란드 고생물학자들의 1970년 논문이었다. 논문 제목이 우리말로는 ‘수각류 공룡의 새로운 과, 데이노케리디(deinocheiridi, New Family of Theropod Dinosaurs)’이다. 논문과 함께 공룡 화석을 묘사한 그림과 사진이 다수 실려 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나온 영어 학술지 ‘폴란드 고생물학(Palaeontologica Polonica)’에 실렸다. 데이노케이루스라는 이름은 최초 발견자들이 붙였다.

나는 왜 폴란드일까 궁금했다. 동유럽의 폴란드가 당시 공룡 연구의 강국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공룡 화석이 많이 나오나. 이 관장은 고비사막의 공룡 화석 탐사 역사의 출발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들려줬다.

“1923년 미국 뉴욕자연사박물관 팀이 처음 몽골에 갔다. 박물학자이자 탐험가인 로이 앤드루스가 탐사대를 이끌었다. 앤드루스가 몽골에 간 건 윌리엄 매튜의 1915년 논문이 나온 게 계기다. 윌리엄 매튜는 ‘현생 인류의 기원이 아시아’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게 정설이다. 로이 앤드루스는 매튜의 논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탐험대를 조직해 중국 베이징을 거쳐 몽골에 들어갔다. 인류 화석을 찾으려 했는데 몽골에서 공룡 화석을 발견했다.”

이 관장에 따르면 그들이 발견한 건 돼지 크기의 프로토케라톱스. “북미 대륙에서 공룡 화석이 많이 발견됐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공룡 화석이 나오자 공룡의 기원도 아시아가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때문에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뉴욕자연사박물관 탐사팀은 1923년에 이어 다음해인 1924년에도 몽골 고비사막 탐사를 시도했다. 중국 베이징까지 갔으나 몽골에 들어가지 못했다. 러시아, 당시 소련이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있는 몽골에 압력을 넣어 미국 학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미국 탐사팀이 스파이라는 이유를 댔다. “뉴욕자연사박물관 팀은 한국에도 왔다 갔다. 한국에서는 고래를 포함한 포유류, 조류를 채집했다고 들었다”고 이 관장은 말했다.

경기도 화성에서 화석이 발견된 공룡 ‘코리아 케라톱스’를 이융남 관장이 복원한 이미지. 2011년에 이름도 붙였다. ⓒphoto 이융남
경기도 화성에서 화석이 발견된 공룡 ‘코리아 케라톱스’를 이융남 관장이 복원한 이미지. 2011년에 이름도 붙였다. ⓒphoto 이융남

미국 학자들의 접근을 막은 소련은 1940년대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 탐사를 했다. “역사상 최악의 발굴이었다. 공룡 화석 탐사는 뼈를 추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뼈를 포함하고 있던 암석 정보도 알아야 한다. 뼈가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나왔는지 관련 정보를 알아야 한다. 중장비를 동원해 발굴했다. 산을 불도저로 밀듯이 뼈를 발굴해 덤프트럭에 모래 퍼서 싣듯이 화석을 다뤘다. 그렇게 해서는 뼈를 발굴해도 학술적으로는 남는 게 없다. 아시아 최대 육식공룡인 타르보사우루스 화석을 찾아낸 성과는 올렸다.” (참고로 타르보사우루스는 EBS의 ‘한반도의 공룡’ 프로그램에 한국의 공룡으로 소개됐으나 이융남 관장은 한반도 공룡이라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프로그램에 중국, 몽골 공룡이 뒤섞여 나왔다”고 말했다. ‘한반도의 공룡’은 2008년 11월에 방영됐다.)

폴란드 팀이 고비사막에 들어간 건 1965년. “냉전 시절 폴란드는 소련과 가까웠다. 폴란드의 과학자들이 소련과학원을 방문했다가 수집품 중 몽골 공룡 화석을 처음 봤고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몽골 탐사를 했다고 들었다.”

이 관장에게 이 얘기를 해준 건 데이노케이루스 전문가인 폴란드 학자 오스몰스카. 이 관장은 2007년 바르샤바에 가서 국가고생물학연구소 학자이던 그를 만났다고 했다. 이 관장에 따르면 오스몰스카씨를 포함, 나중에 걸출한 공룡학자가 된 네 명의 여성이 고비사막 탐사를 주도했다. “폴란드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서, 여성이 학문 연구를 한다고 했다. 퀴리 부인이 좋은 예다.”

1965년 폴란드 팀은 폴란드-몽골 국제탐사대를 조직, 탐사를 했다. “중생대 포유류 연구의 최고 전문가인 조피아, 그리고 데이노케이루스 논문을 1970년대에 쓴 오스몰스카, 갑옷공룡 전문가가 된 메리안스카, 목이 긴 공룡 전문가가 된 볼숙이다. 당시 폴란드 여성 4인의 탐사는 지금까지 고비사막에서의 공룡 화석 연구 사상 가장 중요한 연구로 평가받는다.

소련이 1991년 붕괴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미국에 몽골 고비사막의 문이 열렸다.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 팀은 근 70년 만에 고비사막에 다시 들어가게 됐고 현재도 발굴 탐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융남 박사가 고비사막에 처음 간 건 1996년 6월이다. 미국에서 유학(텍사스 댈러스에 있는 남부감리대학)을 마치고 6월 1일 돌아온 직후였다. 이 박사는 한국인 최초의 척추고생물학(공룡 전공)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직후 몽골로 출국, 6월 14일부터 7월 19일까지 몽골·일본·중국 삼국 탐사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고비사막 첫 탐사였다. 이런 곳이 있구나, 굉장하다고 생각했다”고 이 관장은 말했다. 그는 그때까지는 미국의 공룡 화석만 연구했다. “일본 후쿠이대학의 공룡 연구자인 아즈마 요이치(東洋一) 박사가 고비사막 탐사에 초청했다. 일본 학자가 주도한 탐사였다. 후쿠이 현립 공룡 박물관은 캐나다 로얄티렐 고생대박물관(앨버타주 소재), 중국 쯔궁(自貢)박물관(쓰촨성 소재)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박물관으로 얘기된다.”

이 관장에 따르면 몽골 고비사막의 중생대 백악기와는 환경이 변해 지금 이곳은 풀 한 포기 없다. “화석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겐 고비사막이 천국이다. 거기처럼 환상적인 곳은 없다. 7000만년 전 지층이다. 지층이 그리 단단하지 않다. 공룡은 지금으로부터 2억3000만~6500만년 전까지 살았다. 날지 못하는 공룡이 이후 멸종했다. 한국의 중생대 지층은 1억년 전 지층이다. 고비사막의 중생대 지층과는 달리 한국의 지층은 단단해 화석 발굴이 어렵다. 공룡뼈보다 뼈를 둘러싸고 있는 암석이 더 단단해 어려움이 있다. 반면 몽골의 공룡 화석은 공룡이 어제 죽은 것처럼 뼈가 좋다. 색깔도 좋다.”

공룡 연구에는 비용 지원이 필수적이다. 한국의 제1호 공룡박사에게 공룡 연구를 위한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직장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연구자로서 일생을 바꾼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한국의 척추고생물학 연구가 침체되어 있고, 순수 연구 분야라서 갈 데가 없었다. 과학재단에서 포닥(박사후 연구과정)을 4~5년 했다. 한국에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일본으로 가려고 했다. 일본 문부성 장학금을 받기로 얘기가 다 됐다. 월 70만엔의 연구비 프로젝트였다. 2000년 말이었다. 일본 비자도 받았다. 그런데 연구소(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뜻밖에 연락이 왔다. 지질박물관을 짓는다며 척추고생물학자가 필요하다, 지원해 달라고 했다.” 이융남 박사는 지질박물관 연구원 자리에 단독 지원했다. 2001년 4월 1일 발령이 났다.

그렇다고 공룡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고 할 수는 없다. 공룡 연구와 직결되는 두 번째 사건은 이보다 조금 앞선 1999년 겨울, 시화호에서 발견된 공룡알 화석이다. 한국해양연구원의 정갑식 박사라며 전화가 걸려왔다. 경기도 화성의 시화호 간척지에서 공룡알로 보이는 물체가 발견됐는데 “확인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연락을 받고 약속 장소인 안산의 상록수 전철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 박사를 만났다. 보니 공룡알이더라. 정 박사가 좋아했다.”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시화호 남측 간척지. 20곳에서 공룡알 둥지가 발견됐고, 공룡의 종류는 모두 세 가지였다. 화성시는 시화호 간척지의 한복판, 가운데 토막에 해당하는 1597㎡(483만평)를 즉각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했고, 문화재청은 2000년 3월 천연기념물 414호로 지정했다.

“시화호 간척지 한복판의 넓은 땅이 천연기념물이 됐다. 개발이 안 된다는 뜻이다. 넓은 땅의 가운데 부분이 묶였으니 당초 계획대로 개발할 수 없게 됐다. 결과적으로 나는 화성시가 잘했다고 본다. 이 땅은 교육 목적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몽골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살피고 있는 이융남 관장. ⓒphoto 이융남
몽골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살피고 있는 이융남 관장. ⓒphoto 이융남

화성시는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자 반색했다. 화성시는 당시 지역에 대한 나쁜 이미지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까지 만들어진 화성 연쇄살인 사건, 화성 씨랜드 화재 사건, 수도권에 있는 가장 넓은 지역이면서 난개발의 대명사로 알려지는 등. “당시 화성시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자 공룡알이 화성시의 문화콘텐츠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융남 박사는 화성시의 담당자인 박보현씨(현 창의비전담당관실 담당관)에게 공룡박물관 건립을 제안했다. 화성시가 갖고 있는 건 공룡알 화석밖에 없다, 그것만 전시할 수는 없지 않으냐, 기존의 국내 박물관 전시품은 외국 연구자의 복제품이다, 한국 학자의 연구가 없다, 그러니 몽골로 가자, 연구비를 지원하라고 말했다.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해 와서 그 성과물을 화성시의 공룡박물관에 전시하자는 제안이었다.

“박보현씨가 공룡박물관 프로젝트에 공감하고 노력해줘서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많다. 박보현 담당관은 사기사건에 말려든 것 아니냐며 감사를 받기도 했다. 곤욕을 많이 치렀다.” 화성시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이 박사의 몽골 고비사막 탐사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화성 시화호 간척지에서 코리아 케라톱스의 화석 일부가 발견되면서 분위기는 달궈졌다.

2006년 화성시 후원으로 몽골 고비사막 탐사를 시작했다. 2011년까지 계속된 5년 프로젝트다. 이 관장이 탐사대장인 프로젝트였다. 1년에 한 차례 매년 8월 말에서 9월 말까지 고비사막으로 공룡화석을 찾아 떠났다. “고비사막은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다. 봄은 황사와 모래폭풍으로 접근할 수 없다. 8월에도 모래폭풍이 탐사 시간 중 한두 번은 불어온다.”

2011년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매년 몽골 고비사막을 방문한다. 탐사팀의 경우 통상 30명으로 구성되며 이 중 반은 연구자, 다른 반은 지원팀이다. 처음 5년간 고비사막의 남부에서 탐사를 했다. 네메게트, 알탄울라, 부긴자프, 힐멘자프다. 이곳은 접근로가 좋지 않아 몽골 안에서도 가는 데만 3박4일이 걸린다. 최근에는 고비사막의 동부를 탐사한다. 샤인우스쿠덱 지역이다.

화성시(시장 채인석)는 내년부터 4년간 제2차 국제몽골탐사를 지원한다. 1년에 5억원씩 지원한다. 지자체가 이 정도 예산을 지출한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그간 몽골에서 공룡 화석을 15t 갖고 왔다. 연구 결과가 나오면 박물관에 전시되고 시민에 공개될 것이다. 공룡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박물관 전시에 반영되어야 화성 공룡박물관이 독특한 박물관이 된다. 외국 학자가 연구한 공룡의 복제품을 갖다놔서는 안 된다. 보통 박물관 하면 껍데기인 건물을 지어놓고 표본을 모으려고 하는데, 화성공룡박물관은 전시품을 먼저 갖추는 작업을 하고 있다. 화성시에 연구성과가 있어야 콘텐츠가 생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연구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동안 화성시의 연구비 지원을 나는 논문을 수십 편 써서 보답했다. 이번에 (미국 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을 냈을 때도 나만큼 기뻐한 사람이 화성시의 박보현씨, 그분이었다.”

이융남 관장은 당초 네이처에 논문을 일찍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논문을 쓴 공룡 화석 중 도굴됐던 일부 뼈가 회수될 수 있다는 연락을 받고 몇 달을 기다리느라 지연이 됐다. 이 관장은 논문의 연구 대상이 된 데이노케이루스 공룡 화석은 2009년 고비사막 남부의 부긴자프 지역 탐사에서 발굴했다. “발굴 당시 손목, 머리, 발 부분이 잘려 있었다. 술병과 중국제 접착제도 현장에 있었다. 도굴꾼의 소행이었다. 이들은 공룡 화석의 가치를 모르고 호사가들이 관심이 많아 사들이는 부분, 즉 머리, 손톱, 발톱을 캐 간다. 공룡 화석은 완벽한 개체였으나, 그 부분만 잘려 나가고 없었다.”

이 관장이 벨기에의 연구자 파스칼 박사로부터 “머리뼈와 발뼈를 갖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관장은 벨기에에 갔다. 공룡 뼈 색깔과 크기가 같았다. 표본에서 절단되어 나간 게 분명했다. 중복되는 부분도 없었다. 파스칼 박사는 프랑스의 화석 딜러에게 갔다가 그의 컬렉션에서 봤고, 연구 목적으로 받아 갖고 왔다고 했다. “딜러는 팔고 싶어했다. 벨기에의 파스칼은 논문을 같이 쓰자고 제안했다. 나는 도굴품이니 몽골 정부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전이 없었다. 데이노케이루스의 나머지 화석도 확인했으나, 이 부분은 논문에 추가로 실을 수 없었다. 화석 표본은 국제적으로 목록이 만들어지고, 논문에는 그 목록번호를 명시해야 한다. 문제의 데이노케이루스 화석은 도굴품이기 때문에 목록 번호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 11월 미국 LA에서 열린 척추고생물학회에서 몽골에서 발굴한 화석만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를 전후해 상황 진전이 있었다. 미국의 한 화석 딜러가 도굴품을 갖고 있다가 발각되는 요란한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해 초 뉴욕에서 타르보사우루스 화석 경매가 있었다. 물건을 내놓은 딜러는 티라노사우루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몽골학자가 “그건 몽골에서만 나오는 타르보사우루스 공룡이다. 경매에 나온 건 도굴된 거다. 몽골에 반환되어야 한다”며 경매 현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게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몽골 대통령이 미국 정부에 외교문서를 보내 반환을 요구했다.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이 수사에 나서 플로리다에 사는 이 딜러를 체포했다. 그의 집에서 다수의 불법 공룡 화석이 발견됐다. 타르보사우루스 화석은 지난해 몽골에 반환됐다.

프랑스의 데이노케이루스 화석을 갖고 있던 딜러는 이런 상황에 놀랐다. 그는 몽골 정부에 지난 5월 5일 무조건 반환했다. 이 관장은 “몽골에 벨기에의 도굴 화석이 반환될 것 같아 기다렸다”고 했다. 5월에 도난된 화석이 반환되자 이 관장은 몽골 학술원 산하의 ‘고생물학센터’에 가서 문제의 화석을 추가 연구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몽골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자연사박물관을 새로 짓는다. 몽골에는 진품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의 자연사박물관도 좋다.”

이 관장의 꿈은 “동아시아 공룡의 진화사 연구”이다. 이 관장의 데이노케이루스 논문을 네이처가 선뜻 게재한 것도 아시아권 연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국제학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중국, 몽골의 공룡을 연구하면 한국의 공룡 연구도 된다. 중생대 한·중·일은 땅이 붙어 있었다. 알래스카 공룡 연구도 하고 있다. 베링해가 아시아와 북미를 잇는 다리다. 이 지역의 공룡 화석을 연구하면 아시아의 공룡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알 수 있는 문고리가 된다. 내년 7월에 알래스카의 코니악첵 열도에 간다. 재작년에 맥켄리산이 있는 디날리국립공원도 탐사했다.”

취재를 마치고, 나는 들고 간 이융남 관장 저서 ‘공룡학자 이융남 박사의 공룡대탐험’(창작과비평사)에 서명을 부탁했다. 이융남 박사의 명성을 듣고, 몇 년 전 사놓은 책이다. 이 관장은 ‘이융남’이라고 서명하고 그 옆에 공룡 발자국 세 개를 그려줬다. 귀여운 공룡 발자국이었다. 서명자는 겸손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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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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