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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333호] 20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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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사]러시아, 일본과의 완충지대 필요 조선 독립 지지한 유일한 나라로

1904~1905년 러일전쟁 : 비(非)백인 제국주의 국가의 등장-러시아는 조선에 무엇이었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블라디보스토크역의 시베리아철도 기념비. 김시덕
1894~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기쁨에 들떴다. 한반도의 국가들처럼 중국의 역대 왕조에 대해 정치적으로 복속된 시기는 길지 않았지만, 일본 역시 중국에 대해서는 정치·문화적 선진국으로서 외경심을 가져온 터였다. 그러한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서구 열강에 맥없이 패배하는 것을 본 일본은 중국의 절대 우위에 대해 미심쩍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본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꺾은 것이었다.
   
   개국 과정에서 서구 국가들과 불리한 관계를 맺어온 일본은, 자신들이 상실한 것을 조선에 이어 청으로부터도 얻어내고자 랴오둥반도·펑후제도·대만의 할양을 요구했다. 그러나 청나라에 대해 영토적·경제적 야망을 품고 있던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세계의 신입생인 일본이 주제넘게 자신들의 몫을 넘보는 것을 묵과하지 않았다. 특히 1858·1860년의 조약을 통해 두만강에 이르는 외(外)만주 지역을 확보하고 내(內)만주 지역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는, ‘아시아의 후진국’ 일본이 서구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을 막자며 독일·프랑스를 끌어들여 랴오둥반도의 할양을 좌절시켰다.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막은 러시아는, 1898년에 랴오둥반도의 다롄·뤼순 등 관동주를 청으로부터 조차(租借)했다.
   
   일본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적개감이 고조되었다.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수모’를 당한 것은 실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유럽 국가들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은 일본은, 자국의 ‘이익선’(야마가타 아리토모)이라고 간주해 온 조선 측이 이러한 국제 정세에 호응하여 일본의 이권 침탈에 저항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명성황후 민씨를 살해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일찍이 “러시아 정부가 과인을 버리지 않고 보호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러시아와 한국’ 317쪽·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는 내용의 서한을 러시아 측에 전달한 바 있는 고종은, 일본의 이러한 노골적 행보에 반발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했다. 이에 조선에서의 일본의 권익은 급속히 축소되었다.
   
   조선과의 관계가 형성되던 시점부터 러시아는 “조선이 자립을 지키고 다른 국가가 조선을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같은 책 31쪽)는 원칙을 견지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 역시 러시아의 이러한 입장을 파악하고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러시아 본래의 욕망은 원대한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 준비가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목하의 급선무는 동방의 이 지역에서 어떻게 하든 현 정세를 존속시켜, 훗날 그들이 바라는 대망을 달성할 수 있는 국면에 이르기까지는 어떠한 장애요소도 남겨놓지 않으려는 듯했다.”(‘건건록’ 317~318쪽·범우사·무쓰 무네미쓰) 즉 당연히도 러시아는 박애적 입장에서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역시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개입하기에는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당분간’ 독립을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조선이 독립을 지키는 데 러시아가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는 조선 측의 바람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고종이 유럽에 전권대사를 파견하려는 데 대해 러시아 측은 “굳이 해외에 공사를 파견하려는 조선 정부의 고집스러운 입장도 이해하기 힘들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조선의 공사가 온다고 해도 이득이 될 것이 없다.… 조선의 상황이 불안정한 실정에서 러시아가 조선을 돕고 나선다면, 이는 러시아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조선 정부가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러시아와 한국’329~330쪽)라는 입장을 보였다.
   
▲ (왼쪽) 서구 열강을 막기 위해 대포를 만들던 이즈 니라야마의 반사로. (오른쪽) 영국·미국·일본 등의 해군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방어하기 위해 루스키섬에 건설된 요새. 러일전쟁 발발 1년 전인 1903년에 완공되었다. 김시덕
그러나 일본이 끈질기게 조선을 침탈하고 국내의 개혁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의 민관이 러시아 내지는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한 것은, 순진하지만 절박한 바람이었다. 청의 알선으로 조선 정부에 고용된 묄렌도르프 역시 그 나름대로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라는 카드를 염두에 두었다. 묄렌도르프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청국이 자기의 예속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 과연 일본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지, 당시의 정세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매우 회의적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조선이 청국 이외에 어떤 다른 힘에 의지해야 한다고 남편은 처음부터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것은 러시아가 틀림없었다. 러시아는 중국과는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국경이 태평양까지 뻗은 이래로 일본과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러시아의 가장 큰 관심은 조선이 자주국이 되어 자기 나라와 일본 사이에 하나의 완충국으로 존재하게 하는 데 있었다.”(‘묄렌도르프 자전’ 86~87쪽·묄렌도르프) 이리하여 러시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러시아는 조선→대한제국의 말기에 이 나라의 독립을 지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한국과 러시아가 공유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러시아는 일본의 식민정책과 맞서 싸우며, 극동 아시아의 이웃인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 유일한 나라다.”(‘러시아 정교회 한국 선교 이야기’ 19쪽·홍성사·키릴 대주교)
   
   이처럼 러시아는 조선 등의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본을 저지하는 주요한 플레이어로서 이 시기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1895년의 삼국간섭과 조선의 아관파천, 1898년 러시아의 뤼순·다롄 조차를 경험한 일본의 관민은 러시아와의 결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점차 굳혀갔다. 앞서 묄렌도르프의 아내가 적은 바와 같이, 1806~1807년에 쿠릴열도에서 러시아와 무력충돌한 경험도 있는 일본은 그 후 대체로 러시아에 대해 경계심과 적개감을 유지했다. 일본 근대소설의 개조(開祖)인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가,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으로 러시아에 대해 알고자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에 입학했다가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소설에 심취하여 소설가가 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明治大正露文化受容史’ 67~68쪽·小林實)
   
▲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실제 모델 부부의 딸인 하나 글러버의 무덤. 인천 외국인 묘지. 김시덕
러시아에 대해 일본이 품어온 적개감에 불을 지른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는 1891년부터 러시아가 착공한 시베리아철도이다. 러시아 측은 청나라에서 아무르강 이남의 외만주 지역을 할양받기는 했지만, 극동 지역에서 중국인과 러시아인의 인구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새로이 획득한 영토의 존속을 걱정해야 했다. 1888년 당시 내만주 지역에 사는 청국인이 1200만명이었는 데 비해, 연해주 등지의 러시아령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은 7만3000명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유럽 지역의 인구과밀을 해소하는 한편으로, 예상되는 청·일본·영국 등의 침략으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한다는 것이, 러시아 측이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는 가장 큰 목적이었다.(‘日露戰爭史’ 28쪽·橫手重二) 오늘날 푸틴의 러시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말 당시에도 서구 각국 및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실체 이상의 공포심을 품고 있었다. 일본의 경제계는 오히려 시베리아철도를 통해 러·일 양국 간의 무역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긍정론을 펼쳤지만(‘러일전쟁의 세기’ 138쪽·야마무로 신이치), 정치·군사계에서는 시베리아철도를, 영국의 해군력으로 유지되어 온 열강의 군사적 균형을 깨뜨리고자 러시아가 공세적으로 건설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은 이해의 상충을 증폭시킨 것이 1900년의 의화단운동(북청사변)이었다. 외세를 배척하는 무장봉기 집단이 이해에 베이징의 외국 공사관을 포위하고 외교관들을 살해했다. 이때 다른 식민지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였던 러시아와 일본만이 의화단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대규모로 파병할 수 있었다. 특히 만주에 자국이 부설한 철도(동청철도·남만주철도)를 의화단 세력으로부터 지키고자 이 지역을 점령한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 부설을 결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만주 지역에서 압도적인 인구적 우위를 보이는 청국인에 대한 경계감에서, 자국 군대를 만주에서 철수하라는 일본 등의 압력에 저항했다. 또한 러시아군은 만주 점령 과정에서, 1858년의 아이군조약에서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된 바 있는 블라고베셴스크 인근 강동육십사둔(江東六十四屯)에 거주하던 청국인을 대량학살했다. 이 사건이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이제 ‘야만족’ 러시아로부터 ‘아시아’를 지킬 수 있는 것은 ‘금빛 백성’, 즉 황인종 일본인뿐이라는 노래 ‘아무르강의 유혈은(アムー ル川の流血や)’이 유행하는 등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었다. 일본에 유학 와 있던 쑨원(孫文) 등의 한족 유학생들은, 이제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화’를 지킬 수 없음이 증명되었으므로 한족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1905년에 중국동맹회를 결성한다. 중국동맹회는 1911년의 신해혁명을 주도하게 된다.(‘러일전쟁의 세기’ 118~124쪽) 참고로 강동육십사둔의 영유권은 그 후로도 논란이 되어 오다가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 간에는 1991년에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기로 합의가 되었으나, 대만(중화민국)은 여전히 이 지역을 자국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리하여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이 점차 가시화되었으나, 이토 히로부미 등은 러시아와의 협상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북위 39도 이북 지역을 양국 간의 완충지대로 설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을 온전히 차지하고자 한 일본과, 조선을 독립국가로 남겨둠으로써 유라시아 동해안에서 자국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고자 한 러시아 간의 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1902년에 일본이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자, 러시아도 영국·미국·일본 등의 해군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방어하기 위해, 도시 외곽의 루스키섬을 요새화하는 등 언젠가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예감을 품게 되었다.
   
▲ 러일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여순 203고지의 격전을 전하는 20세기 전기의 엽서. 김시덕

   일본은 러시아 서부 지역의 육해군이 극동 지역에 도착한 뒤에는 일본이 승리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만주와 랴오둥반도의 러시아군을 신속하게 제압한 뒤 서구 열강에 중재를 부탁해서 일본 측에 유리하게 강화를 체결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한편 러시아는 일본을 아시아의 ‘황인종’ 후진국으로 간주하여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러·일 양국은 물론 영국·독일·프랑스 등의 열강도 거의 200만명의 군대가 동원되어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규모의 충돌이 전개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 전쟁은 러·일 양국이 국가의 능력을 쏟아부은 총력전의 양상을 띠었으며, 기관총과 참호가 전쟁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등 제1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후진국’이 극동의 황무지를 두고 싸운다는 편견을 가진 서구 열강은 이 전쟁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25~26쪽·강성학)
   
   전쟁은 일본 측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와다 하루키는 전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진해를 일본군이 1904년 2월 6일에 점령한 데에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음에 주목하여, 청일전쟁이 1894년 7월 23일에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러일전쟁 역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분석한다.(‘러일전쟁과 대한제국’ 59~60쪽·와다 하루키) 흔히 청일·러일전쟁은 ‘한반도’를 무대로 하지만 조선은 배경일 뿐이라고 말해지곤 하지만, 두 전쟁은 한반도는 물론 랴오둥반도에서도 격렬하게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은 전쟁 당사국이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범윤 등의 한국인 부대가 러시아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어 있다.(‘러시아와 한국’ 679~682쪽) 이를 식민지 시기에 연해주에서 전개된 독립 전쟁의 초기 단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일본군이 진해를 점령한 데 이어, 2월 9일에는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의 군함 바랴그·카레예츠(‘한국인’이라는 뜻)함이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고 자폭한다. 1941년의 진주만 공습을 예고하는 듯한 일본의 이러한 선전포고 없는 공격은 유럽 열강으로부터 야만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혐오감을 준 듯 하다. ‘오페라의 유령(Le Fantôme de l’Opéra)’을 쓴 프랑스 소설가·언론인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는 인천 해전에 참전한 러시아 병사들을 취재한 르포르타주에서 카레예츠함의 자폭 장면을 서술하면서, 이 군함을 폭파하는 임무를 맡은 드 레비츠키 대위가 “카레예츠함을 황색 난쟁이들의 손에 넘길 수는 없어!”라고 외쳤다고 적는다.(‘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 163쪽·작가들·가스통 루르) 이처럼 전쟁 초기에 일본을 열등한 ‘황인종’ 세력으로 간주하던 서구 열강은,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자 열강의 일원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일본을 ‘동양의 미(美)’를 대표하는 국가로서 서구 세계에 선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상가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은 서구 국가들의 이러한 표리부동한 태도를, “일본이 부드러운 평화의 기술에 젖어 있는 동안에 일반 서양인들은 일본을 야만적이라고 간주했다. 일본이 만주의 전투장에서 대규모의 학살 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한 이래 그들은 일본을 문명국이라고 부른다”(‘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23쪽)라고 비꼰 바 있다.
   
▲ 여순강화회담을 기념하는 그림엽서첩의 겉봉. 러시아의 아나톨리 스테셀 중장이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 중장에게 고개를 숙인 모습을 그림으로써, 이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했음을 강조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김시덕
한편 18세기 이전에 중국 문화가, 19세기에 일본 문화가 서구 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가스통 르루는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가 인천에서 전개된 러일전쟁의 초기 국면에 관심을 갖고 취재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가 되어 한반도는 서구 문화와의 접점을 갖게 된다. 이 시기에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실제 모델로 간주되는 토머스 글러버(Thomas Glover)·쓰루(ツル) 부부의 딸인 하나(ハナ)가, 인천에서 사업을 전개하던 월터 베넷(Walter Bennet)과 결혼하여 한반도에 거주하기도 했다. 하나 글러버의 무덤은 현재 인천 외국인 묘지에 있다.
   
   한편, 러시아 해군의 거점인 랴오둥반도의 뤼순항을 함락시킴으로써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한 일본군은 전쟁 초기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해상을 통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기뢰·연안포대 등으로 중무장된 뤼순항을 해군력만으로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3월 27일의 제2차 공격 때 부하를 구하다가 전사한 히로세 다케오(廣瀨武夫)는 군신(軍神)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그후 태평양전쟁 때까지 숱하게 만들어진 군신의 제1호였다. 이처럼 해군만으로는 뤼순 함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메이지 정부 수립 이래 앙숙이었던 해군과 육군은 합동 작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막대한 희생 끝에 뤼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203고지를 1904년 12월에 함락시키고, 여기서부터 항구를 공격하여 마침내 뤼순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뤼순 함락 전부터 일본군은 전투에서 이기고도 병력·보급 부족으로 인해 러시아군을 추격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고, 뤼순 전투가 소모전의 양상을 띤 것도 일본 측에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일본 측은 자국에 우호적인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강화협상의 중재를 부탁하고자 했으나, 러시아는 시간이 흐르면 자국군이 우위에 서게 될 것으로 예측하여 강화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던 러시아의 발트 함대가 도고 헤이하치로 이끄는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게 되자(5월 27~28일 쓰시마해전), 일본과 러시아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하에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협상을 갖고 1905년 9월 5일에 강화조약을 맺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주신구라(忠臣藏)’라는 근세 일본 복수극의 애독자였고,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일본 해군에 내린 훈시를 영어 번역하여 미군에 배포하게 하는 등 ‘친일파’였기 때문에 러일전쟁 당시 일본 측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주장이 일본의 일각에서 보인다. 1898년 하와이·필리핀을 합병하여 본격적으로 유라시아 동해안에서 이권을 추구하기 시작한 미국이 일본을 이용하여 서구 열강을 견제하려 했다는 것 이 포츠머스 강화협상의 배경이며, 단순히 대통령이 ‘친일파’여서 일본을 편들었다는 해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05년 7월 29일에 이루어진 태프트-가쓰라 밀약에서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양국의 지배를 상호 인정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미국이 일본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한국인에게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러일전쟁은 러시아에 적개감을 갖고 있던 오스만 제국·페르시아·인도의 독립운동을 자극하였다. 황인종도 러시아·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본이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쑨원은 한때 아시아의 희망이었던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를 괴롭힌다며 일본인을 비판하는 내용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한 결과로 아시아 민족의 독립이라는 커다란 희망이 생겼다.”(‘러일전쟁의 세기’ 203쪽) 러일전쟁을 ‘황화론(黃禍論)’으로 상징되는 인종 간의 전쟁으로 인식시키고 싶어하지 않은 일본은 전쟁 중에 이러한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을 피했으나, 훗날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는 거꾸로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편, 앞서 강연에서 쑨원이 언급한 ‘아시아’에는 ‘조선’이 빠져 있다.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까지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조선과 청의 이해관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를 적대시한다는 점에서는 청과 일본이 이익을 함께하였고, 러시아에서 독립의 희망을 보았다는 점에서 조선은 러시아와 이익을 함께하였다. 초대 주 러시아 상주 공사관이었으며 대한제국 멸망 후 1911년에 자결한 이범진은 “러시아가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으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해방시켰듯이, (나는 러시아에 의한) 한국의 해방을 원하고 있다”(‘러시아와 한국’ 686쪽)고 말한 바 있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맞서 언제나 견해를 함께해 왔다는 최근 일각의 주장은 한반도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번 회의 집필에 도움을 주신 주몬지 학원여자대학의 고바야시 마코토(小林實) 선생님, 극동국립대학교의 바짐 아쿨렌코 선생님, 근대유산 연구가 이승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더 읽을 책
   강성학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야마무로 신이치 ‘러일전쟁의 세기’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김시덕
   
   한국경제연구원 금융재정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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