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5일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의회 앞에서 ‘공교육살리기 학부모연합’ ‘유관순어머니회’ 등의 회원들이 친일인명사전 배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photo 연합
지난 2월 5일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의회 앞에서 ‘공교육살리기 학부모연합’ ‘유관순어머니회’ 등의 회원들이 친일인명사전 배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photo 연합

지난 2월 5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50~60대 중년 여성 10여명이 “‘친일인명사전’은 정치사전” “서울시 의원들! 국민 세금이 봉이냐?”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공교육살리기 학부모연합’과 ‘유관순어머니회’ 등 주로 학부모로 구성된 시민단체 회원들이다. 서울시교육청이 3월부터 시내 중·고교에 배포한다고 밝힌 ‘친일인명사전 배포 방침’에 반대하기 위해 모였다. 이경자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대표는 “공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책을 사기 위해 시교육청이 예산을 강제 집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이 좌파 성향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3월부터 서울 시내 중·고교에 배포하기로 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기준을 적용해 4000명 이상을 친일부역자로 규정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시교육청은 지난 2월 4일 보도자료를 통해 “‘친일인명사전’ 구입 예산을 2016년도 예산으로 이월해 서울 시내 중·고교 583개교에 교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583개교는 서울시 전체 702개 중·고교 중 이미 친일인명사전을 구입한 119개 학교를 제외한 숫자다.

한 질(3권)에 30만원인 책을 학교마다 배포하기 위해 1억7490만원의 예산이 책정됐다. 예산은 서울시의회가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본의 독도 도발 등에 맞서고, 친일청산을 통해 역사 교육을 활성화한다”는 취지로 마련했다. 지난해 집행될 예정이었으나 학부모단체의 반발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재판 등으로 인해 집행이 미뤄졌다.

시교육청이 사전 배포 계획을 밝히자 학부모와 보수단체의 반발이 거세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다음날 발표한 입장문에서 “학교를 이념 논란의 장으로 만들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의 학교 배포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편향 논란이 있는 서적을 학교에 비치해 교수·학습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 교총의 주장이다. 서울 시내 사립고인 서울디지텍고는 최근 “책의 객관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며 예산을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교육부도 제동을 걸었다. 교육부는 최근 “특정 단체에서 발간해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는 사전을 구입하도록 학교에 예산을 지급한 부분이 적절한지 검토하고 법령에 근거한 절차를 준수했는지 조사해 2월 29일까지 보고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서울시교육청에 내려보냈다. 이에 대해 시교육청은 “‘사전은 순수하게 교사의 교수·학습을 위한 연구자료 및 학생들의 학습 참고자료로 제공되는 것”이라며 “도서의 비치 자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좌편향 논란의 진원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배포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인물 선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견 때문이다. 이 사전은 이전에 ‘친일 인사’들을 규정한 다른 단체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일제강점기 인물들을 분류한다. 실제로 이 사전에서 ‘친일 인사’로 분류된 인원은 4389명으로, 1948년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규정한 688명의 약 6배에 달한다. 노무현 정부하에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1005명에 비해서도 4배가 많다. 고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해 장면 전 총리 등 정부 수반, 안익태·홍난파 등 음악가와 김동인·서정주 등 문인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친일 인사’로 규정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에 대해 “죄질이 무거운 반민족행위자만을 선정한 반민특위와 달리 친일인명사전은 부일협력자까지 대상에 포함시켰다”며 “친일인명사전은 처벌이 아니라 역사적 청산과 학문적 정리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완성까지 15년이 걸린 셈이다. 총 3권으로 전체 분량이 2800쪽에 달한다. 2001년 발족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편찬했다. 연구소는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국사편찬위원을 포함해 학계를 망라한 120여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편찬했다”고 설명한다. 연구소는 홈페이지에 게시한 안내자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비용은 시민들의 소액모금으로 충당했다”고 편찬 재원을 밝히고 있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조성된 국민성금 7억여원이 큰 동력이 됐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12년 출시한 ‘친일인명사전’ 스마트폰 앱은 “반민족행위자를 포함해 식민통치기구에 참여한 고등관료와 단체의 일원, 또는 개인 차원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부일협력자 중 역사적 책임이 크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라고 수록 기준을 밝히고 있다. 이 기준에 따라 사전에 수록한 인물들을 유형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협력한 자, 식민통치기구에 참여한 자, 항일운동을 방해한 자,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 지식인·종교인·문화예술인으로서 일제의 식민 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 기타 친일행위자.’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은 좌파 친일 인사에 대해서는 유난히 관대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김영우 새누리당 수석대변인은 지난해 11월 브리핑에서 “일제 헌병대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김일성 동생 김영주, 4·3사건 주동자이며 일본군 소위 출신인 김달삼 등 대표적인 좌파 친일파들 중 상당수가 빠져 있다”고 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북한의 초기 정권 핵심 인사 16명 가운데 4명만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새누리당의 주장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에 대해 “지방이나 특히 북한과 해외의 경우 연구 인력이 부족하고 조사비용이 과다해 증거자료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가 공신력이 없다는 점도 비판 대상이다.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민족문제연구소는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사건에 연루돼 투옥된 경험이 있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씨가 현재 소장으로 있다. 1979년 서울에서 적발된 남민전은 국가보안법에 따른 반국가단체로, 3년간 지하 조직 형태로 활동하다 공안 기관에 적발돼 해체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와 해명’ ‘친일인명사전 등 친일문제연구총서 편찬’ 등을 설립목표로 내세우지만, 좌편향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여러 번 있다. 대표적 계기는 이 단체가 제작해 2013년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동영상 ‘백년전쟁’이다. 두 편으로 제작된 이 동영상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반역자로 매도해 여러 단체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 단체 전남동부지부 사무국장을 지낸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잇단 망언도 연구소를 주목받게 했다. 청년비례대표 출신인 김 의원은 2012년 국정감사에서 6·25전쟁 때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을 ‘민족의 반역자’로 칭해 “일제 때 태어난 분은 모두 친일파냐”는 항의를 받았다. 김 의원은 또 SNS를 통해 ‘언젠가부터 북한이 더 믿음이 간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주관적 생각을 담은 책을 만드는 것은 단체 자유지만 국민 세금을 들여 구매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더구나 국가 기구보다 4배나 많은 인물을 선정해 논란이 된 책을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특정 역사관을 지녀 편향됐다고 의심받는 책을 시 예산을 들여 미성숙한 청소년에게 보급하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주간조선은 현재 친일인명사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했으나 연구소는 답변을 거절했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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