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9일 서울 광진구의 광진소방서에서 서현화 소방관(왼쪽)이 김대환 소방관과 상담하고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4월 19일 서울 광진구의 광진소방서에서 서현화 소방관(왼쪽)이 김대환 소방관과 상담하고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서초소방서 이재식 소방관은 지금까지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5년 여름, 서울 삼성동의 한국전력공사 건물에서 을지훈련이 있던 날이다. 이 소방관은 동료들과 함께 23층의 건물 외벽을 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훈련을 앞두고 있었다. 위험한 훈련인 만큼 동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심호흡을 했다. 사건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훈련시작 사이렌이 울린 후 한 동료의 로프가 풀리며 23층 아래로 추락한 것이다. 이 소방관은 추락하는 후배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도움의 손길을 뻗을 시간조차 없었다. 이 소방관과 동료들은 로프를 타고 내려와서야 죽은 후배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소방관은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친한 후배와 영영 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재식 소방관은 지난 4월 19일 11년 전의 이 악몽을 동료 심리상담사에게 털어놓았다. 가족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 깊숙이 삭혀두었던 고민이었다. 11년 전의 악몽은 이 소방관의 일상생활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후배 얼굴은 그를 항상 괴롭게 만들었다.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하지만 이날 동료 심리상담사에게 아픈 기억을 털어놓은 이 소방관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고 했다. 상담을 받으며 이 소방관의 눈가는 촉촉해졌지만 상담을 마친 뒤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이재식 소방관을 도운 ‘동료 심리상담사’는 소방관으로 구성된 심리상담사를 뜻한다. 소방관 스스로가 동료를 돕는 상담사가 되는 것이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는 지난해 동료 심리상담사 제도를 신설하기로 결정하고 현직 소방관 가운데 47명을 선발해 상담사 교육을 시켰다. 서울시 23개 소방서별로 2명씩 선발된 동료 심리상담사들은 지난해 12월부터 5개월간 교육을 받았고 4월 18일부터 상담업무에 투입됐다. 이들은 정신과 전문의, 전문 상담사로부터 1단계부터 5단계에 걸쳐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상담개념 이해부터 시작해서 상담과정을 스스로 계획하는 단계까지 모두 마쳤다. 특히 동료 심리상담사 중 상당수는 실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경험했던 이들이다. 연령대도 40대 전후로 경력 10년 이상의 소방관이 대부분이다. 동료 심리상담사는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상담 대상자와 공감대를 높일 수 있는 상담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들은 평상시 본연의 업무를 하다 동료로부터 상담 요청이 들어오면 상담사로 변신하게 된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동료 심리상담사 제도를 신설한 것은 많은 소방관이 각종 화재 및 재난사고에 투입된 후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방관들이 직접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는 경우는 드물다. 기자가 만난 소방관들은 “병원에 가고 싶지만 주변사람들에게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힐까봐 두렵다”고 입을 모았다. 마음속에 담아둔 아픈 기억과 고민을 동료에게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자는 취지에서 동료 심리상담사 제도가 만들어졌다.

지난 4월 19일 찾아간 서울 서초구 서초소방서의 소회의실. 동료 심리상담사 이영숙 소방관은 동료 3명을 마주보며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담을 하는 이도 상담을 받는 이도 긴말이 필요치 않았다. 이영숙 소방관은 상담 도중 한 소방관이 눈물을 글썽이자 말없이 두 손을 잡아줬다. 서로 눈빛만 봐도 어떤 얘기를 하는지 다 아는 듯했다. 기자는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소방관으로서 겪었던 그들의 다양한 고충들을 들어봤다. “동료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상황만 설명해줘도 어떤 기분을 겪었을지 쉽게 알 수 있다. 나도 경력 32년 차의 소방관으로서 비슷한 경험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동료의 고민을 들어주고 서로 해결방안을 찾아보려 한다.” 이영숙 동료 심리상담사의 말이다.

서초소방서에서 상담을 신청한 소방관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2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 각자 위치에서 겪는 고민들 역시 많았다. 이 가운데 상대적으로 경력이 적은 소방관의 고충은 무엇일까. 강민협 소방관은 경력 4년 차인 구급대원이다. 그가 소방관으로 임관한 지 2년 차일 때 생긴 일이다. 강 소방관은 목을 매 숨진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관악 지역으로 출동을 했다. 장비를 들고 신고가 접수된 건물 3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방 안에서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강 소방관 눈에 베란다의 블라인드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블라인드를 힘껏 옆으로 밀었다. 그 순간 강 소방관은 소리를 치며 뒤로 자빠졌다. 불과 10㎝ 간격을 두고 천장에 목을 매단 시체와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체는 부패가 한창 진행되어 눈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강 소방관은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정이 넘칠 때였는데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순간이었다”면서 “지금은 그나마 무덤덤해졌지만 그 당시는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옆에서 강 소방관의 얘기를 듣던 동료 소방관이 입을 열었다. “무덤덤해진다는 것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나도 그런 끔찍한 현장들에 무덤덤해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무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경력 14년 차인 허기모 소방관의 말이다.

허기모 소방관 역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가 제주도에서 근무했을 때의 일이다. 한 할머니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허 소방관이 도착하자 할머니는 마당에 주저앉아 말없이 울면서 화장실을 가리켰다고 한다. 마당 한쪽에 설치된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섰을 때 허 소방관은 깜짝 놀랐다. 재래식 화장실 안에 이제 갓 3살 된 아이 한 명이 빠져 있었다. 아이를 구출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변기를 부수고 화장실 바닥을 뜯어내고서야 겨우 아이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골든타임을 넘겨 10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아이는 중환자실에서 15일을 머무르다 세상을 떠났다. 이후 허 소방관은 아이가 떠올라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다. 허 소방관은 “혼자만 끙끙 앓지 말고 우리 모두 상담을 통해 아픔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소방관들은 서로의 경험을 꺼내놓으며 위안을 얻고 있었다. 서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도 오고 갔다. 이영숙 동료 심리상담사는 “전문가보다는 상담 기술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공감대가 형성돼 효과가 크다고 본다”며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듯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담 도중 소방서 내 스피커를 통해 현장출동 사이렌이 울렸다. 상담을 받던 강 소방관은 기자에게 “중간에 일어나 죄송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구급차를 향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지난 4월 19일 서울 서초구 서초소방서에서 상담 중인 이영숙 소방관.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4월 19일 서울 서초구 서초소방서에서 상담 중인 이영숙 소방관.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일반인보다 10배

기자가 들어본 소방관의 고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실제 소방관들이 사건현장에서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매우 심각한 편이다. 지난해 국감 자료에 따르면 일반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유병률은 0.6%. 하지만 소방관은 6.3%로 10배 이상 많았다. 소방관 10명 중 2명 이상은 수면장애, 1명 이상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소방관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순직한 소방관 수는 33명. 그러나 자살한 소방관 수는 35명으로 더 많다. 소방관의 평균수명 역시 짧은 편이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81.4세인 반면 소방관의 평균수명은 58.8세에 불과하다. 기자가 서초소방서에서 만난 소방관들의 고충을 들어보니 국감 자료의 내용보다 현실은 더 심각해 보였다.

그렇다면 다른 소방서의 경우는 어떨까. 같은 날 서울 광진구의 광진소방서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경력 17년 차인 서현화 소방관이 동료 심리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먼저 동료 심리상담사로 지원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들려줬다. 조직폭력배 한 명이 자신의 여자친구와 이별을 하고 자살 시도를 벌인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 일이다. 사건현장에 도착했을 때 조폭은 자신의 손목을 가위로 긋고 있었다. 출동한 서 소방관을 보자 이 조폭은 “여자들은 다 죽어야 한다”며 갑자기 가위를 들고 서 소방관을 덮치려고 했다. 다행히 동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서 소방관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서 소방관은 “그때 겪은 트라우마가 날 힘들게 했다”면서 “동료들도 나와 같은 고충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상담사로서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이날 서 소방관에게 상담을 받기 위해 경력 5년 차의 김대환 소방관이 찾아왔다. 구조대원인 그는 교통사고나 사망사건 현장에서 목격했던 끔찍한 장면들이 떠올라 1~2년간 계속 악몽에 시달렸다. 이런 현상들은 집에서 쉬는 날에도 이어졌다. 전화 벨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깊은 잠을 못 이루는 건 다반사였다. 김 소방관에 따르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동기 몇 명은 결국 소방관직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이날 상담사를 자처한 서 소방관은 김 소방관에게 자신의 경험과 이를 극복했던 과정을 들려줬다. 서 상담사는 해박한 상담이론을 바탕으로 상담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김 소방관과 평등한 입장에서 얘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해결책을 찾아갔다. 김 소방관은 “가족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얘기를 할 수 있어서 후련한 마음이 든다”고 말하며 상담실을 떠났다.

서초소방서와 광진소방서에서 만난 동료 심리상담사들이 한결같이 한 말이 있다. “상담을 신청하지 않아도 동료이기 때문에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대강은 알고 있다. 평소에 독서 소모임이나 관심 분야의 대화를 자주 가져 극단적인 경우를 미연에 방지할 계획이다. 상담은 특별한 게 아니라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다.”

동료상담은 아직 대중화된 상담 방식은 아니다. 먼저 동료 간의 깊은 신뢰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권순경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장은 “동료 심리상담사 제도를 통해 소방대원들의 정신건강을 챙기고, 이를 통해 시민에게 양질의 소방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소방관 직업의 특성상 다른 직군에 비해 유대관계가 깊은 편이라 동료 심리상담사 제도가 가능했다는 게 소방재난본부의 설명이다. 이에 대한 중앙대 교육학과 김동민 교수의 말이다. “아무리 상담전문가라 할지라도 해당 분야의 직업이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서 모두 이해하기가 어렵다. 동료상담은 그 점에서 서로의 아픔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전문성이 떨어지다 보니 자칫 상담자가 핸들링을 잘못 해줄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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