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10일, 당시 65세였던 처칠 총리는 런던 국회의사당에서 국민 앞에 섰다. 당시 영국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파죽지세로 유럽을 점령하던 나치를 앞에 두고 참전파와 화전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협박하는 독일과 협박당하는 영국, 그리고 바다 건너서 관망하는 미국까지 전 세계가 처칠의 입을 주목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저는 오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에게 굴복당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영국입니다. 하지만 저는 국민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국민의 피와 땀과 그리고 눈물입니다. 앞으로 기나긴 투쟁과 시련의 세월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의 확고한 정책은, 보장되지 않는 기만적인 강화조약이 아닌 전쟁입니다. 수많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을 하는 목적은 승리입니다. 파시즘에 굴복당하지 않는 자유민의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우리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단결된 힘이 기필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2016년 여름, 대한민국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후폭풍에 휩싸여 있다. 온 나라가 사드로 사분오열돼 있다. 이 상황에서 한 야당 지도자는 사드 배치를 국민투표에 붙이자는 주장을 폈다. 국민투표는 브렉시트(Brexit)의 사례에서 보듯 폭풍 속에 키를 놓아버리자는 것과 다름없다. 대중이 자신의 눈앞만 바라볼 때 누군가는 키를 단단히 움켜쥐고 폭풍우 저편을 내다보며 배를 몰아야 한다. 리더가 키를 놓아버릴 때 공동체는 난파를 피할 수 없다.

리더는 사전적 의미로 ‘앞장서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길이 없는 데서 길을 찾는 ‘패스 파인더’가 리더의 역할이다. 앞장서 걷기 때문에 숙명처럼 위험에 노출되고 비판과 시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리더는 새로운 길을 따라오도록 모두를 설득해내야 한다.

토론설득은 리더의 덕목이다.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브렉시트 사태로 인해 ‘실패한 리더’로 낙인찍혔지만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도 국민투표 개표 다음날 국민 앞에 섰다. 이날 캐머런은 BBC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100명 가까운 하원의원들과 다섯 시간 동안 토론을 벌였다. 그는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이 국민투표를 결정한 과정과 영국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는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점도 솔직히 인정했다. ‘당시에는 이런 이런 생각으로 결정을 내렸지만 잘못이었다. 결론이 난 이상 앞으로 나아가 보자, 극복해 보자’는 식의 메시지를 던지며 설득을 이어갔다.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솔직한 인정. 이 역시 뛰어난 리더십의 전통이다. 기독교 문명권에서 가장 뛰어난 리더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위대한 리더로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도 잘못에 대한 인정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간음(姦淫)을 꾸짖는 부하 나단을 죽이지 않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목동이자 음악가였던 다윗은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유대 12파벌이 극심한 반목을 거듭하는 와중에 왕에 올랐다. 그는 유대의 앞날을 새롭게 그렸다. 12파벌의 근거지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새로운 수도를 정했다. 예루살렘의 탄생이다. 이 새로운 비전과 건설로 유대는 천년왕국을 꿈꿨다.

상상력비전은 리더십의 또 다른 덕목이다. 리더는 높이 올라 멀리 내다보며 새로운 세상을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 중세의 시작을 알린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신의 도성(都城)’도 그런 상상력의 산물이다. 5세기, 어거스틴은 야만인들의 침략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로마를 지켜보면서 이 책을 썼다. 초대 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평가받는 그는 아비규환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머릿속에 그렸고, 그 안에서 그리스 로마 문명이 살아남기를 원했다. 로마를 멸망시키는 야만인들을 기독교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도성’은 종교서가 아닌 정치적 저술이며, 어거스틴은 뛰어난 리더다.

왜 이런 리더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가. 한국인은 지금 리더와 리더십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지점에 와 있다. 한국인 역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급변의 세상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과 ‘사드’가 웅변하듯이 한반도 주변 정세는 요동치고 있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가야 할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심연처럼 가로놓여 있고, 좌절한 젊은이들의 분노가 암초처럼 솟구쳐 있다. 그야말로 비전과 상상력, 설득력으로 무장한 패스 파인더가 필요하다. 당장 우리는 내년 12월 그런 리더를 뽑아야 한다.

주간조선은 인문학자 배철현 교수와 함께 우리 시대의 리더와 리더십을 탐구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배 교수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역저를 펴낸 종교학자다. 서울대 종교학과에 재직 중인 그는 시쳇말로 요즘 뜨는 인문학자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키운다’는 모토를 내건 새로운 인재 양성소 ‘건명원’의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는 올해 건명원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전략이 무엇인지’를 강의하고 있다.

종교와 문명의 기원에 천착해온 배 교수가 주간조선 지면을 통해 보여줄 리더학과 리더십론은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정치학자, 경영학자들이 주로 설파해온 기술적(技術的) 리더십, 방법론으로서의 리더십 대신 그는 리더십의 역사와 속성, 그 바닥에 고여 있는 것들을 파고들 계획이다. 리더의 탄생부터 리더들이 개척해온 문명의 성과들, 그 ‘리더들의 시간’을 통해 리더십을 근원부터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할 생각이다. 리더라는 키워드로 본 문명사라 할 만하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배 교수는 “지금 한국의 상황이 우리에게 맞는 특별한 리더를 요구하고 있다”며 “누구나 리더십의 부재를 말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가 어떤 자질을 갖춘 인간형인지에 대해서는 근본적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배 교수는 “서양에서는 그리스 철학과 유대이즘의 바탕 위에서 다양한 리더십의 유형을 실험하고 거쳐왔지만 우리는 짧은 산업화와 민주화 속에서 이렇다 할 리더십 실험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더 지금 우리에게 맞는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리더십 탐구가 우리의 리더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배 교수에 따르면, 무엇보다 리더는 설득하는 사람이다. 서로 잘났다고 다투는 사람들 사이에서 왜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과 논리보다 앞서는 설득의 요체를 ‘에토스(ethos)’라고 봤다. 배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에토스는 인격, 품격, 어떤 사람에게서 풍겨나는 아우라 같은 것을 뜻한다”며 “호메로스에 등장하는 아킬레스는 전쟁에만 나서면 이기는데, 그가 풍기는 것이 바로 에토스”라고 설명했다. 이 에토스를 구성하는 것은 지혜와 덕(德), 그리도 착함(善)이다. 에토스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수련과 자아 확대를 통해 쌓아올리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오랜 공교육 과정의 중요한 목표를 리더십 양성에 두고, 특히 정치지망생들만을 위한 리더십 학교 등을 운영하는 것도 이 에토스를 키우기 위함이다. 숱한 경쟁과 자기 극복 과정을 거쳐야만 리더가 탄생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저서 ‘더 로드 투 캐릭터’(‘The road to Character’·‘인간의 품격’으로 번역)’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평범한 이력서로는 누군가의 에토스가 보이질 않는다고 지적한다. 여기에는 그가 ‘이룬 것들’만이 지루하게 나열돼 있을 뿐이다. 그의 에토스를 알려면 그가 죽은 후 주변의 누군가가 읊을 ‘조사 이력서(eulogy resume)’를 들어봐야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그가 용감한 사람이었는지, 희생적인 사람이었는지, 친절한 사람이었는지가 얘기된다. 배 교수는 “이 에토스가 없으면 로고스(말과 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를 파토스(감동)에 이르게 할 수 없다. 결국 리더란 에토스와 로고스로 끊임없이 설득을 해서 감동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도 위대한 리더, 위대한 패스 파인더가 있었다. 건국 68년을 맞는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이승만, 박정희라는 두 명의 리더에 기댄 바가 크다. 높이 올라 멀리 내다보며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리더라고 할 때, 두 사람은 그 의미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제시한 길을 따라 달려온 지금,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지점에 이르렀다. 다시 우리에게 리더가 절실한 이유다.

우리 시대의 리더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제시한 두려움의 대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두려운 리더는 낡은 모델이다. 에토스를 통해 내가 기꺼이 설복당할 마음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착잡해진다. 모두가 100% 설복당하는 리더를 우리는 가진 적이 있는가. 심지어 최근의 대선 이후 패자의 지지자들은 승자를 향해 “너희들의 리더”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우리에게 진정한 리더가 절실해지는 또 다른 이유다.

에토스의 바닥에는 윤리가 깔려 있어야 한다. 윤리적인 인간이라야 에토스가 쌓인다. 하지만 이 시대의 윤리는 단순한 종교적 의미보다 더 깊고 넓어야 한다. 배 교수에 따르면, 옥스퍼드대학의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설파한 ‘효율적 이타주의’는 경청할 만한 이야기다. 싱어 교수는 ‘효율적 이타주의자’라는 책에서 ‘4만달러로 1명을 도울 것인가, 2000명을 구할 것인가’를 묻는다. 선진국에서 4만달러면 맹인견 한 마리를 키울 수 있는 돈이다. 하지만 똑같은 돈으로 개발도상국에서는 트리코마라는 병으로 실명 위기에 처한 환자 2000명을 구할 수 있다. 과연 무엇이 윤리적인가. 공동체를 위해 선을 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배 교수는 “빌 게이츠는 자본주의자이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섰다. 그가 ‘빌 게이츠 멀린다 재단’을 통해 구한 사람 숫자가 600만명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건 정치적 리더들도 마찬가지다. 권력자이지만 권력을 넘어서 효율적 이타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시리즈는 리더의 에토스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리더 일반론’을 통해 우리에게 맞는 한 사람의 리더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시대, 누가 과연 우리의 리더인가.

정장열 부장대우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