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난 길가메시 상상도.
여행을 떠난 길가메시 상상도.

인간이 한 공동체의 리더가 되기 위해 오랜 수련을 통해 몸에 지녀야 할 카리스마를 에토스라고 부른다. 에토스는 눈으로 보거나 확인할 수 없다. 리더가 되고 싶어 눈이 먼 자는 에토스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그것을 신장하기 위해 수련하지도 않는다. 대중이 리더로 욕망하는 자에 대한 객관적 평가, 예를 들어 그 사람이 보여준 정치적 행보가 대중의 눈에 괜찮아 보이면, 그 사람은 리더로서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정치생명은 길지 않다. 대중이 원하는 리더의 모습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변적이다. 정치인으로 그의 인기는 바람에 나는 겨처럼 흩날릴 것이다.

리더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평가에 의존하지 않는 자신만의 에토스가 필요하다. 자신만의 에토스를 발견하는 방식을 ‘고독’이라 부르고, 고독의 시간을 ‘안식일’, 고독의 장소를 ‘심연(深淵)’이라고 부른다. 에토스는 자신만의 수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유하다. 그 고유성을 획득하는 수련 방법이 바로 고독이다.

고독 연습의 중요성

고독이란 주위에 말할 사람이 없어 쓸쓸해 하는 외로움과는 전적으로 다른 가치다. 고독은 오히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스스로 존재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의 수련이다. 고독은 자신에게 허락하는 최고의 사치다. 스스로 충분히 혼자 있기 위해서는 눈치나 체면을 제거해야 한다. 고독을 수련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유일한 임무를 찾기 위해서다. 샛별이 새벽에 등장하기를 기다리듯이, 고독을 연습하는 사람은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에 현혹되지 않고, 가장 어두운 밤에 등장하는 샛별을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고독의 시간을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사실 성서에 등장하는 히브리 단어 ‘사바스’를 ‘편히 쉬는 날’이란 의미에서 ‘안식일’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아뿔싸, 오역 중에 오역이다. 영어 단어 사바스(sabbath)도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이다. 사바스는 ‘편히 쉬는 날’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사바스’의 축자적인 의미는 ‘일상적으로 하던 일을 그만두다’이다. 이 단어에 ‘편히 쉰다’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바스’의 심층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는 이렇다. ‘사바스는 습관적으로 하던 말, 생각, 행동을 의도적으로 제어하는 수련이다. 리더에게 필요한 시간이 사바스다. 사바스는 일상적인 시간으로부터 탈출하여 구태의연한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침묵하는 거룩한 시간이다.’

‘심연’은 고독의 시간인 사바스가 행해지는 공간이다. 심연은 남들과 함께 갈 수 없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가장 간편하게 해야 한다. 가장 근접한 의상은 상복(喪服)이다. 사바스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심정으로 혼자 최선을 다해 가는 공간이다. 용감한 자만이 이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바다의 가장 깊은 멧부리라는 의미의 심연에 가기 위해서는 중력을 거슬러 잠수하여 내려가야 한다. 몸이 바다 깊이 들어가면 다시 떠오르게 마련이기 때문에, 오히려 발에 큰 돌을 묶고 내려가야 한다. 바닷속 가장 깊은 곳은 혼돈으로 가득 찬 장소이지만, 거기까지 감히 여행온 사람에겐 깨달음이란 선물을 선사한다. ‘깨달음’은 곧 영생으로,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심연을 여행한 사람에겐 에토스라는 향기가 난다. 그는 매순간을 인생의 첫 순간이자 마지막 순간처럼 살기 때문에 남다른 아우라를 내뿜는다.

리더는 고독에 거(居)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시간은 사바스로, 매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생각, 말, 행동을 제어하는 침묵이다. 그가 처한 공간은 심연으로 자신의 몸을 마라톤을 경주하는 사람처럼 가장 가볍게 만든다. 심지어는 중력을 거슬러 발에 큰 돌을 동여매고 남들이 상상하지도 않고 가볼 용기도 내지 않는 심연으로 여행하는 자다. 리더는 이 고독에 능히 거할 수 있는 의례를 거치지 않고는 카리스마를 지닐 수 없다. 리더에게 고독은 신에게 드리는 의례와 같아 엄숙하고도 지속적으로 지켜야 한다.

리더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

고독의 시간과 장소로 가는 여정을 정리한 프랑스 인류학자가 있다. 아놀드 반 즈네프(Arnold van Gennep)다. 즈네프는 개인이 한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과의례(通過儀禮)라고 불렀다. 통과의례라는 용어는 한 개인이 과거의 상태에서 미래의 새로운 상태로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존재론적인 정교한 수고를 이르기도 한다. 이 용어는 인류학에서 시작하였지만 사회학, 문학, 그리고 신화에 다양하게 적용된다. 특히 한 인간이 보통 사람에서 영웅으로,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추종자에서 지도자로 변이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문지방이다.

즈네프는 한 개인의 통과 과정을 의례라고 불렀다. ‘의례’라는 단어는 흔히 종교에서 전용하는 단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의례란 한 개인 안에 숨겨진 위대함이라는 DNA를 발견하고 발휘시키는 훈련이다. 의례는 인간이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따분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절체절명의 임무가 무엇인지 그 시간과 장소에서 발견하여 최선을 다하는 정신적인 운동이다. 즈네프는 통과의 과정을 셋으로 구분하였다. 분리, 경계, 그리고 통합.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는 자신의 삶에서 분리와 경계의 경험을 통해 사회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힘을 함양한다. 통과의례의 첫 번째 단계는 분리(分離)다. 분리란 자기 자신을 대중 속의 한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대중 전체를 이끄는 자로서 대중이 가야 할 길을 높은 곳에서 관찰하는 행위다. 리더는 자기가 안주하고 싶은 과거와 결별해야 한다. 누구나 일정한 나이가 되어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안식처인 집을 떠나야 한다. 집으로 상징되는 것은 부모, 일가친척, 고향, 동향, 동창과 같은 것들이다. 이 리스트가 지금의 리더를 있게 한 원동력인 동시에 그를 과거로 되돌리는 거부할 수 없는 자석이자 괴물이다. 이 괴물을 물리치고 강제적인 분리를 위해 리더는 충격적이며 상징적인 행동을 한다. 예를 들어 입대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깎는 행위나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상시에 입지 않던 정결한 옷과 구두를 착용하는 행위다. 분리는 자신이 상상하고 꿈꾸는 미래의 시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잘라내는 행위다.

두 번째 단계는 전이(轉移)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해 리더는 결연히 자기에게 알게 모르게 굳어버린 과거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비전으로 스스로를 승화시켜야 한다. 전이의 특징은 모호함과 불안함이다. 고정된 것이 없고, 자신만의 고유한 임무를 찾기 위해 스스로 변화하려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운동이다. 이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공간은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이 없는 낯선 공간이다. 이 공간을 경계(境界)라고 부른다. 리더는 항상 경계 위에서 자신의 몸가짐을 추슬러야 한다.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준다고 해서 한 진영이나 패거리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은, 그 진영으로부터 버림받기 십상이다. 이 경계는 어둡고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적인 길이 없기 때문에 더욱 더 거주하기 힘든 장소다. 경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장비는 자신에게 맞는 위대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준비하는 고독이다.

세 번째 단계는 통합이다. 기원후 7세기 초 무함마드가 일개 대상무역상일 때 그는 메카 근처에 있는 히라동굴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10년간의 묵상 시간을 가졌다.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그 상태를 아랍어로 ‘살람(salam)’이라고 말했다. ‘살람’이란 단어는 셈족인이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경제용어로 기원전 26세기 아카드어에서 처음 등장한다. 아카드어란 지금 이라크 지역에서 통용되던 고대 셈족인의 언어다. 아랍어 ‘살람’이 아카드어로는 ‘샬람’이다. ‘샬람’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행정문서에서 ‘채무자가 자신의 빚을 다 갚은 상태’를 의미한다. 요즘 말로 말하면 은행 빚이 없는 사람이다. 고대 셈족인은 개인이 자신의 일생을 통해 이루어야 할 고유한 임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샬람’이란 개인이 이 고유한 임무를 발견하고 완수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이 짧은 인생 동안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업을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라고 여겼다. 무함마드는 이제 히라동굴에서 떠나 이기심과 폭력이 넘쳐나는 메카 시장 한가운데로 돌아가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복수를 정의로 착각하는 베두인 사회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깨달음을 전달한다. 자신의 생각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를 하나로 묶은 결정적 행위가 있다. 무함마드와 그를 지지하는 자들은 기원후 622년 자신의 고향 메카를 떠나 북쪽에 위치한 야스리브(Yathrib)로 이주한다. 이 행위를 ‘헤지라’라고 하며 이슬람 원년이다. ‘헤지라’란 아랍어 단어는 ‘익숙한 과거로부터 스스로 단절하기’란 의미다.

‘길가메시 서사시’ 점토판
‘길가메시 서사시’ 점토판

‘길가메시 서사시’가 전하는 심연 여행

고대 이집트와 함께 인류 최초의 문명을 시작했던 메소포타미아에 이집트 나르메르와 같은 전설적인 왕이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오늘날 이라크 지역으로 ‘두 강 사이(의 땅)’란 의미다. 여기서 두 강이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역사는 이집트와 거의 같은 시기인 기원전 3100년에 시작한다. 터키 아라랏산에서 발원하여 페르시아만까지 흐르는 두 강은 오랫동안 침적토를 두 강 하구와 페르시아만이 만나는 지역에 쌓았다. 인류가 빙하기를 마치면서 농업을 발견하고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한 지역들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농업을 통해 정착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침적토를 강바닥에서 걷어내는 공동 작업이 필요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들과 문자가 등장한 이유는 대규모 공사를 감독할 왕과 행정체계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절실했기 때문이다.

메소포티미아 남부에 거주하며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을 후대 셈족 사람들은 ‘수메르인’이라고 불렀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건설된 인류 최초의 도시가 바로 ‘우루크(Uruk)’다. 우루크는 오늘날 ‘알-와르카’로 성서의 창세기에는 ‘에레크’로 등장한다. 인류 최초의 도시에 전설적인 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길가메시’다. ‘길가메시’는 ‘노인(길가)이 청년(메시)이 되었다’라는 의미다. 이 이름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7세기 우루크 도시의 왕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루크 옆 쿨랍이라는 도시의 사제 루갈반다(Lugalbanda)였고 어머니는 유목민의 생존을 책임지는 가축을 관장하는 야생 암소 여신 닌순(Ninsun)이다. 그의 영웅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그는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보통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리더였다. 수메르인은 왕을 ‘루갈(LUGAL)’이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큰 사람’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단순히 큰 사람이 어떻게 전설적인 리더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노래한다.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알려진 쐐기문자 문헌이 기원전 7세기 메소포타미아 니네베에 있는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12개 토판 문서로 이루어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저자를 ‘신-레케-우닌니’라 기록한다. 신-레케-우닌니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기록한 시인이다. 그는 기원전 14세기 바빌로니아의 사제였는데,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를 12개 토판 문서로 엮어 기록하였다. 신-레케-우닌니의 ‘길가메시 서사시’가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 널리 전파되었고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이 니네베에 도서관을 건설하면서 ‘길가메시 서사시’를 보관하였다.

이 서사시의 물음은 ‘누가 리더인가?’이다. 신-레케-우닌니는 길가메시의 삶을 통해 리더가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들려주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영웅 길가메시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시작한다. 길가메시에 대한 정형화된 찬양시 후에 폭군 길가메시가 등장한다. 고대 오리엔트 사회 군주들이 그렇듯이, 길가메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우루크 시민들을 괴롭힌다. 남자는 호된 군사훈련으로, 여자는 결혼식을 주재하는 사람으로서 초야권을 행사하며 권력을 남용한다. 우루크 시민들은 신들에게 길가메시의 폭정을 불평한다. 신들은 길가메시가 시민들을 괴롭히는 이유는 그에게 걸맞은 친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신들은 그의 초인간적인 에너지를 분산하기 위해 그의 제2의 자아인 야생인간 ‘엔키두(Enkidu)’를 창조하여 지상으로 내보낸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지상에서 자신의 명성을 위해 산다. 명성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오만에 빠진다. 오만은 에토스를 제거하는 독약이다. 신들은 이들의 오만에 상응하는 형벌을 내린다. 길가메시의 제2의 자아인 엔키두가 병들어 죽는다. 길가메시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엔키두가 죽고 난 뒤 깊은 시름에 빠진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이 인정하는 명성이 아니라 자신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임무를 찾는 행위, 그래서 심지어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절대적인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위해 중대 결정을 내린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떠난 여행

그는 자신에게 권력과 명성을 가져다준 우루크를 떠나 사막으로 여행한다. 반 즈네프의 첫 번째 단계인 분리를 시도한다. 자신이 왕임을 상징하는 왕홀, 왕관, 그리고 왕복을 벗어던진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스스로 가장 남루하고 홀가분한 옷,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죽은 사람만이 갈 수 있다는 지하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죽음을 극복하여 영원히 살고 있다는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을 만나볼 참이다.

그가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기 위해선 두 번째 단계인 ‘전이’ 기간을 견뎌야 한다. 이 기간은 슬픔과 공포의 기간이다. 그는 지하세계로 가기 위해 사막을 지나며 사자를 보았을 때 떨었으며, 지하세계에서 괴물인 ‘전갈-사람’과 그의 아내를 보고는 너무 떨려 얼굴이 창백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수많은 강과 문과 경계를 넘어야 했다. 그는 ‘전갈-인간’들이 사는 전혀 모를 땅에서 길을 잃었고 바다를 건너 죽음의 강을 건넜다.

이 전이의 단계에서 길가메시는 죽은 자도 아니고 산 자도 아니다. 그는 ‘중간 단계’이다. 그가 만나는 것들은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 괴물들이다. 이 단계의 배경도 인간이 사는 곳도 아니고 신들이 거주하는 곳도 아니다. 그곳은 신화적이며 신비로운 장소이다. 우트나피쉬팀은 ‘땅의 끝에 있는 강들의 어구’에 살고 있었다. 길가메시는 마침내 우트나피쉬팀을 만난 후 놀란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당신을 보니, 오 우트나피쉬팀이여! 당신의 모양이 다르지 않군요. 당신은 나와 같군요. 당신은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와 같군요.” (제11토판 2~4행)

길가메시의 깨달음이 시작되었다. 그가 목숨을 바쳐 심연으로 여행을 감행하면서 우트나피쉬팀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여행을 매 순간 떠나 경계에 있는 사람은 이미 신적인 사람이다.

길가메시가 정작 우트나피쉬팀을 만난 후엔 재미를 위해 몇 가지 에피소드가 첨가되었다.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시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7일 동안 잠을 자지 말 것을 요구한다. 길가메시는 이 시험을 받는 7일 동안 쿨쿨 잤다. 영생이란 육체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잠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길가메시는 허탈감에 빠진다. 우트나피쉬팀의 아내는 페르시아만 가장 깊은 곳,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길가메시는 옷을 모두 벗고 발에는 큰 돌을 매달고 바다의 가장 깊은 곳, 심연으로 헤엄쳐 내려가 불로초를 따온다. 그는 우루크로 오던 중 찌는 듯한 더위에 호수에 들어가 수영한다. 그가 잠시 수영하는 동안 뱀이 나와 불로초를 먹어치우고 뱀 껍질만 남긴다. 겉으로 보기에는 길가메시가 영생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 그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우루크의 왕으로 크게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심연’을 찾고 추구하는 그 자체가 영생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폭군에서 지혜로운 왕으로

‘길가메시 서사시’의 제1토판 1~8행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 나라의 기초인 심연을 본 자!

2. 그는 삼라만상에 지혜로웠다.

3. 나라의 기초인 심연을 본 길가메시!

4. 그는 삼라만상에 지혜로웠다.

5. 그는… 모든 장소를….

6. 그는 모든 지식의 총체를 배웠다.

7. 그는 비밀을 보았고 감추어진 것을 발견하였다.

8. 그는 대홍수 이전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신-레케-우닌니는 나라의 기초를 ‘심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길가메시는 이 심연을 본 자다. 여기서 ‘심연’이란 단어는 아카드어로 ‘나크부(naqbu)’다. ‘나크부’란 단어는 ‘길가메시 서사시’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나크부’는 서사시 후반부에 등장하는 페르시아만 가장 깊숙한 곳을 의미한다. 이곳에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보장하는 불로초가 있다. 길가메시는 심연을 경험했다. 심연이란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리더로 항상 거주해야 할 장소다. 심연은 길가메시가 홍수에서 살아남은 우트나피쉬팀을 보고 나서 얻은 인생의 깊은 지혜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문자적으로 우트나피쉬팀의 아내가 알려준, 그래서 길가메시가 바닷물 속 깊이 들어가 따온 불로초일 수도 있다.

신-레케-우닌니는 길가메시의 여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는 먼 길을 떠나 지쳤지만 새 힘을 얻었다.”(제1토판 9행) 이 문장은 반 즈네프의 ‘통과의례’ 3단계가 그대로 적용되는 문장이다. 리더는 구태의연한 과거와 일상으로부터 ‘먼 길’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길가메시가 보여준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자기가 해야 할 고유 임무인 ‘심연’을 경험해야 한다. 그 과정은 육체적·정신적 수련이기 때문에 ‘지칠 수밖에 없다’. 길가메시는 이 정신적인 여정을 통해 새로운 리더로 태어났다. ‘심연’을 찾은 여행을 떠나기 전엔 오만한 자였지만, 이젠 지혜로운 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루크로 돌아올 때 길가메시는 혼자가 아니었다.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해준 뱃사공 우르샤나비와 함께 돌아왔다. 그는 말한다.

323. 일어나라, 우르샤나비여! 우루크의 성벽 위에서 왔다갔다 하여 보라!

324. 주춧돌을 조사해 보고, 벽돌을 살펴보라!

325. 그 벽돌들이 불에서 구워진 것들이 아니냐!

326. 7명의 현인이 기초를 놓은 것이 아니냐! (제11토판 323~326행)

‘심연’을 경험한 길가메시는 더 이상 폭군이 아니라 지혜로운 왕으로 다시 태어났다. 리더의 조건인 에토스는 끊임없이 자신만의 심연에 들어서는 수련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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