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대표님 잠시만요!” 보디슬램(Body Slam)으로 몸이 거꾸로 뒤집힌 채 공중에서 바닥으로 낙하하는 몇 초에 불과한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내가 왜 이걸 한다고 그래가지고.’ ‘진짜 아프겠다. 다치면 안 되는데.’ 이윽고 링 전체에 울려퍼지는 둔탁한 소리. 화끈거리는 등 뒤의 아픔도 잊은 채 살았다는 안도감에 기뻐하는 찰나, 대표는 “(기술) 한 번 더 가시죠”를 외친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재도약을 꿈꾸는 프로레슬링 단체, 프로레슬링피트(PWF) 체육관에서는 이렇게 인턴기자의 비명 소리가 여러 번 메아리쳤다.
지난 8월 2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곡길에 위치한 프로레슬링피트 체육관을 찾았다. 경의중앙선 곡산역에서 내려 한적한 시골길을 15분쯤 걷다 보니 컨테이너로 된 체육관이 나타났다. 입구 바깥으로는 선수들의 힘찬 기합 소리가 흘러나왔다. 투블록 올백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흰색 롱부츠를 신은 강한 인상의 김남석 대표가 기자를 맞았다.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크지 않은 체육관이지만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었다. 체육관 가운데에는 미국 프로레슬링(WWE) 경기에서 보던 정사각형의 링이 놓여 있다. 체육관 입구와 링 사이의 공간은 선수들이 자유롭게 준비운동을 하거나 몸을 푸는 공간이었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 모두 이곳에서 훈련에 앞서 몸을 풀고 있었다. 건너편 링 바깥으로는 김남석 대표의 개인 사무실이 있었다. 챔피언 벨트를 어깨에 두른 김 대표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경기 홍보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나는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을 충분히 해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크게 다칠 수 있어요.”
프로레슬링을 시작한 지 1년 반이 되었다는 레슬러 김수빈(31)씨가 말했다. 프로레슬링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의 운동경력이 있었다. 고교 시절 3년간 권투 체육관을 다녔기에 링이 낯설지 않았다. 최근 반년간 배우고 있는 유도도 자신감을 북돋아주었다.
프로레슬링 재도약 꿈꾸는 프로레슬링피트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는 1960~1970년대, 박치기왕 김일이 활동하던 시절이다. 당시 프로레슬링은 국민들에게 유일한 오락거리인 동시에 위안거리였다. 일본 선수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장충체육관의 7000여좌석이 모두 매진되었다. 이러한 프로레슬링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프로레슬링 1세대인 고 장영철 선수의 발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폭탄발언이 있고 난 뒤 국민들의 관심은 조금씩 멀어졌다. SNS는커녕 인터넷도 생기기 이전, 해명의 장을 마련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한번 사람들에게 각인된 생각을 되돌리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1983년을 기점으로 프로레슬링 중계를 방영해주는 방송사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미국과 일본에서 엔터테인먼트산업으로 크게 흥행한 것과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일부 소수 매니아들만 즐기는 스포츠로 발전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 프로레슬링계에 프로레슬링피트(PWF)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 이제 링 위로 올라갑시다.” 김 대표의 말과 함께 연습생들이 링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링 위에서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기초체력 운동을 한다. 프로레슬링은 부상이 잦은 운동이기 때문에 기초체력 운동은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낙법 위주의 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지 3년이 되었다는 고등학생 연습생 류형욱(19)군을 필두로 모든 선수들이 링 한쪽 면에 일렬로 나란히 섰다. 류군이 먼저 낙법 시범을 보였다. 양발을 모은 채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달리하며 공중으로 튀어올라 하강할 때 등을 바닥에 내리꽂고 양손으로 바닥을 힘껏 내리치는 후방 낙법을 네 번 했다. 마무리는 힘차게 날아올라 발을 뒤로 쭉 내지르며 배를 아래로, 앞으로 떨어지는 전방 낙법이었다. 내가 유도를 시작할 당시 낙법의 중요성을 수차례 주입받은 기억이 있었다. 당시 열심히 배워둔 덕분에 나는 목을 다치지 않게끔 고개를 살짝 숙이고 후방 낙법과 전방 낙법을 따라했다.
기초체력 훈련을 마친 뒤 휴식시간, 김 대표와 인터뷰를 가졌다. 김 대표는 중학교 3학년 때 막내 누나를 여의고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했다. 모든 것에 염세적이었던 그 당시 경인방송에서 우연히 접한 월드챔피언십레슬링(WCW) 경기는 그의 인생 항로를 바꾸었다. 작은 힘을 가지고 주위 친구들을 괴롭히며 불량하게 지내는 자신과 달리 TV 화면 속 레슬러들은 강한 힘으로 관중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이왕표 체육관에서 프로레슬링을 배웠습니다. 처음 입문하고는 2년간 격기도만 수련했어요.”
이왕표 선수가 관절기와 타격기를 바탕으로 만든 무예인 격기도는 김 대표의 레슬링 기술의 바탕이 되었다. 프로레슬링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였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 대표는 망설임 없이 2004년 데뷔 무대를 언급했다. “데뷔했을 때 다른 느낌은 생각 안 나고 김일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아서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시합이 끝나고 로커룸에 들어온 그에게 김일 선수는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크다며 열심히 해보라”는 말을 건넸고 지금의 김 대표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 다시 훈련 시작~.”
김 대표의 구령과 함께 선수들이 한 명씩 링의 코너에 등을 맞대고 섰다. 이번 훈련은 링의 로프에 자신의 몸을 기대어 그 반동으로 튀어나가 반대편 로프에 자신의 몸을 튕겨내는 것을 3회 반복하는 훈련이었다. 이번에도 첫 번째 주자로 나선 것은 류형욱군이었다. 178㎝의 키에 95㎏의 거구인 그가 로프에 몸을 기대었다가 튕겨 앞으로 달려 나가자 링 전체가 크게 흔들거렸다. “보폭을 크게 해서 세 걸음 안에 뛰면 돼요.” 김 대표가 내게 설명했다. 링에 등을 맞대고 몸을 뒤로 기울인 채 나도 시작 소리에 맞추어 달려 나갔다. 앞서 보았던 류군처럼 탄력 있게 몸이 앞으로 튕겨나가고자 하는 바람과 달리 로프에 몸을 부딪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로레슬링 경기를 할 때 로프에 올라가 기술을 시도하는 선수들을 볼 수 있다. 선수들의 육중한 몸무게를 지탱하고도 남을 만큼 단단하고 탄력 있는 로프에 몸을 부딪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아팠다.
로프 훈련이 끝나고 레슬링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 록업(Lock Up)으로 기술훈련이 시작되었다. 선수가 마주 보는 상황에서 서로 상대의 목을 감싸고 이두에 손을 올려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겨루기를 하는 기술이었다. 김 대표의 지도로 레슬러 한준규(37)씨와 내가 마주 섰다. 왼손으로 상대방의 목을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상대방 왼손 이두에 손을 올려 앞으로 당기며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온 힘을 다해 버티는 나에 반해 한씨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몇 번의 움직임 끝에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