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9일 경기도 이천의 이천훈련원에서 만난 보치아 선수단. (뒷줄부터 시계방향으로) 임광택 감독, 문우영 코치, 권철현 코치, 윤추자 코치, 김한수 선수, 정호원 선수, 최예진 선수.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8월 19일 경기도 이천의 이천훈련원에서 만난 보치아 선수단. (뒷줄부터 시계방향으로) 임광택 감독, 문우영 코치, 권철현 코치, 윤추자 코치, 김한수 선수, 정호원 선수, 최예진 선수.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선생님, 제 꿈은 하루라도 빨리 취업해서 어머니를 경제적으로 돕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직업훈련학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평생을 저를 위해 살아오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눈물이 흐릅니다. 저 같은 중증장애인에게 취업이란 꿈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선생님 ‘보치아’를 통해 새로운 꿈에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2005년 강원도 원주의 장애인센터에서 근무하던 권철현 코치에게 온 이메일 내용이다. 권 코치는 메일을 여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은 정호원 선수였다. 권철현 코치와 정호원 선수와의 인연은 2002년 부산 아·태장애인경기대회에서 시작됐다. 그 당시 정 선수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정 선수는 생계를 위해 보치아 선수 생활을 포기해야만 했다. 정 선수는 미래가 불안정한 선수 생활보다는 취업만이 어머니께 도움을 드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증장애인인 그에게 취업의 벽은 높았다. 중증장애인에게는 취업뿐만 아니라 운동을 지속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 종목이 있다. 그건 바로 ‘보치아(Boccia)’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운동인 보치아는 한국 장애인선수단의 효자 종목이다.

‘보치아’는 고대 그리스의 공던지기 경기에서 유래했다. 보치아 경기는 뇌성마비 1~2등급의 중증장애인을 위한 경기 종목이다. 장애 유형에 따라 △BC1(1등급 상지 사용, 2등급 하지 사용) △BC2(2등급 상지 사용) △BC3(보조장치 이용) △BC4(뇌성마비 장애명이 아닌 운동성 장애를 가진 선수) 개인경기, 단체경기, 페어경기로 구분된다. 겨울 종목인 컬링과 비슷한 방식으로 집중력을 겨루는 경기다. 각 6개의 파란색, 빨간색 공을 가지고 매 회마다 흰색 표적구에 가장 가까이 던진 공에 대하여 1점을 부과한다. 개인전, 페어경기는 4엔드, 단체전은 6엔드를 한 점수를 합산해 많은 득점을 한 선수가 승리한다. 경기장의 크기는 12.5m×6m의 규모로 바닥은 매끄럽고 평평해야 한다. 중증장애인을 위한 경기답게 공을 던질 때는 코치의 도움을 받는다. BC3 선수들은 마우스 스틱이나 홈통 등의 보조기구를 사용할 수 있다.

지난 8월 말 경기도 이천의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훈련원을 찾았다. 실내체육관에 들어서자 태극마크가 달린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과 코치들이 보였다. 선수와 코치들은 2인1조로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코치들은 무릎을 꿇어 휠체어에 앉은 선수들과 눈높이를 맞춘 뒤 선수들의 팔과 다리를 연신 주물렀다. 선수와 코치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보치아는 선수와 코치와의 호흡이 매우 중요한 종목이다. 다른 종목과 다르게 선수와 코치가 한 팀을 이뤄 경기가 진행되어서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보치아 선수와 코치는 가족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들은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 듯했다. 훈련 장소에서는 그 어떤 고성도 한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훈련 중간마다 코치와 선수들은 손을 꼭 붙잡고 서로를 응원했다.

이들이 보치아 선수가 된 계기는 무엇일까. 선수 세 명 모두 중·고교 시절 체육교사의 권유로 보치아를 시작했다. 당시 선천성 뇌성마비를 앓고 있던 세 명의 선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보치아였다. 현재 전국의 장애인학교에서는 보치아가 널리 보급된 운동 중 하나다. 보치아는 남녀 구분 없는 혼성 경기로 진행된다. 2012 런던패럴림픽에서는 패럴림픽 보치아 역사상 최초로 개인전에서 여성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최예진 선수다. 최 선수의 어머니인 문우영씨가 코치를 맡고 있다. 딸을 위해 25년 동안 운영하던 에어로빅 관장까지 그만뒀다. 문우영 코치는 “지난 런던패럴림픽 때 4명의 가족 모두가 팀을 이뤄 대회에 참가한 모습을 봤다”면서 “그만큼 보치아는 단순한 운동을 뛰어넘는 치유의 운동”이라고 말했다. 진심을 다해 선수와 함께하면 메달의 색깔을 벗어나 그 자체로 위로를 받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눈빛으로 의사소통

김한수 선수 역시 어머니 윤추자 코치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김한수 선수는 언어장애로 인해 손짓, 눈짓 등을 이용한 의사소통만 가능하다. 김 선수는 지난 런던패럴림픽에서 아쉽게 4위에 머물렀다. 경기에 나서는 김 선수의 무릎에는 숫자가 적힌 8개의 칸이 그려진 때가 탄 천 조각이 항상 올려져 있다. 그 천의 정체는 의사소통을 위해 윤 코치가 만든 장치이다. 윤추자 코치의 말이다. “아들이 언어장애가 있다 보니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보치아를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8개의 칸마다 부여된 의미가 달라서 아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나는 이걸 토대로 경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이 하나의 소통창구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윤 코치가 만든 천은 언어장애를 지닌 전 세계 선수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패럴림픽에서 세계 선수들이 이 천을 사용하는 게 흔한 풍경이 됐다.

패럴림픽 효자종목 ‘보치아’

7년간 세계랭킹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정호원 선수는 팀의 주장이다. 정 선수가 세계 1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권철현 코치의 공이 크다. 권철현 코치는 현재 강원도 속초의 정 선수와 같은 아파트 옆동에 거주하며 정 선수의 손과 발이 돼주고 있다. 권철현 코치는 “정호원 선수는 15년을 함께할 정도로 내게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라며 “이제는 눈빛만 봐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 보치아 선수단은 세계 최고의 기량을 자랑한다. 보치아는 1988년 서울 패럴림픽부터 7회 연속 단 한 번도 금메달을 놓쳐 본 적이 없는 효자 종목이다. 지금까지 패럴림픽에서 획득한 메달 수만 금메달 8개, 은메달 4개, 동메달 5개를 합해 총 17개에 달한다. 이렇게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는 비결은 간단해 보였다. 코치와 선수들의 진심이 담긴 호흡이었다. 보치아는 선수와 코치의 목에 모두 메달이 걸리는 종목이다. 그만큼 선수와 코치는 한 몸처럼 경기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 선수와 코치 모두 도핑테스트를 받는다. 선수와 코치들은 경기 도중 대화를 주고받으면 실격이기 때문에 오직 눈빛과 몸짓으로만 완벽한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보치아의 핵심인 공을 제작하는 기술이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뛰어나다는 점도 한몫한다. 보치아 공은 무게는 275g(±12g)이고 둘레는 275㎜(±8㎜)로 되어 있다. 빨간색 공 6개, 파란색 공 6개, 흰색 공(표적구) 1개 총 13개의 공이 한 세트이다. 보치아 공의 질은 양가죽세공과 공의 정확도를 가르는 내용물의 구성에 따라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공은 전 세계 선수들이 해마다 구매해 갈 정도다.

이렇게 한국 보치아 선수단은 1988 서울패럴림픽에 처음 참가한 이후 2012 런던패럴림픽까지 7회 연속 금메달을 수확했다. 이번 리우 전망도 밝다. 세계 랭킹 1위 정호원을 포함해 4년 전 런던패럴림픽에서 여자 선수 최초로 보치아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최예진도 있다. 김한수 역시 세계 랭킹 2위로 보치아 강자로 꼽힌다. 여기에 코치들까지 합하면 드림팀이라고 불릴 정도다. 임광택 감독의 말이다. “보치아 말고는 대안이 없는 중증장애인들에게 이 종목은 희망이란 말 말고는 대체할 표현이 없다.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이 걸린 이들의 아름다운 경기를 지켜봐 달라.”

인터뷰 | 정재준 선수단장

“금메달 12개 이상, 종합순위 12위 이내 목표”

2016 리우올림픽이 지난 8월 22일 막을 내리고 9월 8일부터는 리우패럴림픽이 시작됐다. 9월 19일까지 12일간의 열전이 펼쳐질 예정이다. 한국은 11개 종목 총 139명(선수 81명, 임원 58명)의 선수단이 리우로 입성한다. 정재준 선수단장은 ㈜아리바이오 기업의 대표이다. 정 대표는 2014년 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 선수들에게 자회사의 미네랄워터를 무상 공급하며 첫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장애인수영연맹 회장을 거쳐 이번 리우패럴림픽 선수단장을 맡게 됐다.

- 정 단장은 과학자로 알고 있다. 어떻게 장애인 선수들과 인연을 맺게 됐나. “생수 50만병을 무상 공급한 이후에도 몇 차례 시상자로 나서면서 국내 장애인 수영선수들을 알게 됐다. 장애인은 선천적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현장에서 만난 선수들은 대부분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장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보치아는 대회 8연패를 노리고 있다.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종목은 어떤 건가. “보치아는 중증장애인의 종목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는 계층과 장애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의 통합을 꿈꾸는 올림픽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이 외에도 유도, 사격, 탁구 등 기대할 만한 종목이 많다.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길 바란다.”

- 한국 선수단장으로서 리우패럴림픽의 목표는 무엇인가. “일단은 금메달 12개, 종합순위 12위 이내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장애인 선수들이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패럴림픽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통합을 이루고, 대기업들은 선수들을 위해 실업팀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패럴림픽에 참여하고 오면 일자리를 잃는 선수도 많다. 장애인들이 마음 놓고 운동할 수 있도록 이를 위한 제도 개선과 사회적 배려가 늘어나야 할 것이다.”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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