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포가 모인 일본 교토의 히가시야마 거리. ⓒphoto midoritea4me.pl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포가 모인 일본 교토의 히가시야마 거리. ⓒphoto midoritea4me.pl

“뉴요커만 아는, 뉴욕의 깊은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없을까?”

뉴욕을 찾는 지인들로부터 이런 주문을 받으면 필자가 주로 안내하는 곳은 오래된 레스토랑들이다. 맛만이 아니라, 평생 기억에 남을 멋을 가진 레스토랑들이다. 당연한 진리지만, 맛이 아니라 멋을 지닌 음식이라야 추억으로 남는다.

시간상 여유가 있느냐에 따라 동(東)과 서(西) 두 군데 중 하나를 선택한다. 먼저 뉴욕 동부 퀸스에 있는 아스토리아(Astoria) 지역이다. 맨해튼 중심인 50번가를 기준으로 할 때 약 25분 거리다. 아스토리아는 그리스 이민자들의 집단 거주지다. 미국 국적의 그리스계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아스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스토리아 중심가는 그리스 레스토랑이나 와인 가게로 뒤덮여 있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의 주식은 시푸드(해산물) 요리다. 지중해에서 즐기던 맛을 뉴욕 한복판에서 다시 맛볼 수 있다.

아스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스 해산물 레스토랑은 스타마티스(www.stamatisastoria.com)다. 그리스계뿐만 아니라 적어도 뉴욕에서 한 세대 이상 산 뉴요커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신선한 데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언제 가도 사람들로 들끓는다. 대부분 그리스 이민자로, 가족 단위 손님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 장소는 맨해튼 50번가에서 35분 정도 떨어진 페리(Ferry)가다. 뉴욕에서 벗어나 서쪽 턴파이크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순간 만나는, 뉴저지주 뉴어크(Newark)의 레스토랑이다. 이른바 포르투갈 커뮤니티 거리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 커뮤니티도 포괄하는 곳으로, 맨해튼과 달리 전봇대와 허공에 드리워진 전선을 볼 수 있다. 마천루의 뉴욕과 대비되는, 타임슬립(Time Slip)형 공간이다. 지중해 주변 지역이 그러하듯 포르투갈도 해산물로 유명하다. 브라질의 경우 육류가 유명하다. 산해진미 모두 즐길 수 있는 뉴욕의 숨겨진 공간이 바로 페리가(街)다. 프랑스, 이탈리아와는 전혀 다른, 원시 그대로의 맛을 자랑하는 포르투갈 도루강(Rio Douro) 주변의 와인도 즐길 수 있다. 페리가 레스토랑 가운데, 필자가 자주 가는 곳은 이베리아 피닌슐라(www.iberiarestaurants.com) 레스토랑이다. 대략 30달러 정도면 와인, 시푸드, 육류, 샐러드를 전부 즐길 수 있다.

내가 즐기는 맨해튼의 노포

특별해지고 싶은 것이 인간 모두의 본능이다. ‘만인의 평등’을 부르짖는 지도자라 해도 남다른 대우와 최상급 의식주에 탐닉하게 된다. 일본산 무공해 쌀을 특별히 주문해 먹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행적은 인간 본능이란 차원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필자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언제부턴가 돈·권력·명예 같은 것이 특별함의 기준으로 정착된 듯하지만, 필자의 접근방법은 조금 다르다. 넓게 널려 있지만, 대부분이 스쳐 지나가기 쉬운 부분들을 찾아내 나만의 가치로 만드는 식의 특별함이다. 넓이가 아니라 깊이라고나 할까? 굳이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자면, 김춘수의 ‘꽃’과 같은 의미로 와 닿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단순히 몸짓으로 남아 있던 꽃을 나만의 꽃으로 만들어가는 특별한 순간과 과정이 나만의 가치다.

특별함, 나만의 가치, 넓이가 아니라 깊게 사는 삶, 나아가 김춘수의 꽃…. 이 같은 세계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뭔가 계속 이어져온 것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거창하게 전통이나 역사를 거론하자는 것이 아니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파란만장한 개개인의 삶처럼 그냥 끈질기게 이어진 것에 대한, 세대와 시대를 초월한 관심사다. 노포는 그중 하나다. 간단하고 부담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접할 수 있는, 어제의 흔적을 통해 현재의 나를 확인해볼 수 있는 무대로서의 노포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필자가 지인에게 추천하는 그리스 아스토리아와 포르투갈 페리가의 레스토랑은 미국판 노포의 범주에 들어가 있다. 노포의 특징이나 기준은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가장 일반적 요소는 시간에 있을 듯하다. 100년 이상, 200년 이상이란 시간적 요소가 노포의 기본조건이다. 물론 동의하지만 다른 관점도 추가될 수 있다. 크게 다섯 가지 특징 또는 공통점이 떠오른다.

첫째 외골수 세계관이다. 다른 데에 한눈팔지 않고 하나만 일편단심 파는 정신이야말로 노포의 필수조건 중 하나다. 아스토리아와 페리가의 레스토랑은 100년 역사에도 못 미치는 일천한 곳이다. 그러나 두 곳은 여러 면에서 필자가 정의하는 노포의 범주에 들어간다. 아스토리아에 그리스 이민자가 몰려온 것은 19세기 말이다. 독일계에 이어 이탈리아계, 유대계와 더불어 아스토리아에 정착한다. 이후 1960년대 들어 다시 증가하지만, 필자가 찾는 스타마티스는 그같은 역사 속에서 탄생한 그리스 이민사의 흔적이다. ‘피카소’라 불리는 80대 주인은 레스토랑에 들러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다. 문을 연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는 일과다. 최근 부인이 심장병으로 쓰러졌지만 2대, 3대 후손들이 레스토랑을 지키고 있다. 메뉴도 50년 전 그대로다. 가격이야 올라가고 있지만, 뉴욕에서 가장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시푸드 레스토랑 중 하나다.

뉴어크의 이베리아 피닌슐라도 마찬가지다. 1930년대 대공황 때 몰려온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만든 레스토랑이다. 포르투갈 비즈니스 스타일답게 주인이 세 명이나 된다. 복수(複數)로 이뤄진 경영이나 통치 스타일은 스페인을 포함한 이베리아반도의 전통이기도 하다. 서로 협력하는 동안 지혜도 모으고, 위험도 분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자나 통치자의 수가 복수로 늘어난다. 포르투갈 특유의 나무로 만든 실내장식은 리스본 현지 레스토랑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외골수 세계관에 이어 노포의 두 번째 특징으로 ‘시니어 컬처(Senior Culture)’를 빼놓을 수 없다. 세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터득한, ‘진짜’ 레스토랑이냐 아니냐를 가릴 수 있는 필자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다. 서비스하는 사람들의 연령이다. 레스토랑 내 종업원 가운데 60대 시니어가 보인다면, 더불어 흰머리의 손님들이 많이 앉아 있다면 아무리 허름해도 진짜다. 그리스, 포르투갈 레스토랑의 경우 외골수 비즈니스가 종업원에게로도 이어져 있다. 50~60대 종업원이 서비스를 한다. 한번 고용하면 끝까지 함께 간다. 병이나 이사 등으로 스스로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주인이든 종업원이든 한배를 타고 가는 식이다. 10년 넘게 아스토리아와 페리가를 애용하고 있지만, 항상 가도 똑같은 종업원들이 일하고 있다. 덕분에 주문을 하지 않아도, 신선한 소재로 만든 ‘특별한 요리’를 갖다준다. 비싼 와인을 시켜도 그것보다는 맛이 좋고 저렴한 와인을 추천한다. 외골수 세계관과 더불어, 함께 가는 인생이 노포의 공통분모이자 장점이다.

1691년 창업한 일본의 두부집 사사노유키. ⓒphoto 유민호
1691년 창업한 일본의 두부집 사사노유키. ⓒphoto 유민호

노포의 최대 집산지 교토

필자가 10여년 이상 애용해온 노포로, 일본 교토(京都)의 향 전문점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부모 세대가 그러했듯이, 매년 가을이 되면 신세를 진 주변의 지인들에게 작은 선물을 보낸다. 크리스마스, 새해인사, 연하장을 대신한 것이다. 필자는 주로 향을 보낸다. 일본 체류 중 우연히 알게 된 야마다마츠(山田松·www.yamadamatsu.co.jp)가 거래처다. 야마다마츠는 필자에게 후각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영감의 진원지이다.

향은 문화의 최고 단계로 통하는, 평화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최고 문화인으로 통하는 직업은 디자이너, 작가, 배우가 아닌 향 전문가다. 먹고살기에 바쁜 나라의 경우 냄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더불어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가장 오래가는 것이 후각이다. 어릴 때 어머니 몸에서 나던 분가루에 관한 기억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돼 있다. 비슷한 냄새가 나는 사람을 거리에서 만나는 순간, 어머니에 관한 수십 년 전 기억이 한순간에 떠오른다. 동방박사 세 명 중 두 명이 향을 예수에게 바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생 기억에 남는 만큼, 신선하고도 신성하다. 노포는 형이하학으로서의 상품만이 아닌, 형이상학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가르쳐준다. 공부하고 배울 수 있는 터전이 노포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포가 모인 곳이 일본의 교토다. 이유는 일왕과 관련이 있다. 일왕이 도쿄로 옮겨간 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시작된 직후인 1868년이다. 에도(江戶)시대, 다시 말해 막부가 권력을 장악했던 시대에는 도쿄가 아닌 교토가 일왕의 거주지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포의 대부분은 황제·교황·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의 기호품에서 시작됐다.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의식주 제공처로 활용된 곳이 노포의 과거사다. 따라서 교황이나 황제, 귀족문화가 번성한 곳이라면 반드시 노포문화가 있다. 일왕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로열패밀리에 해당한다. 로마 교황은 물론, 유럽 그 어떤 나라 황가(皇家)의 역사보다도 길다. 기원전 660년 1대 천황에 해당하는 신무천황(神武天皇) 이래 지금까지 전부 125명의 일왕이 대를 이어왔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따라서 일왕을 지지해온 노포문화 역시 탁월하다.

전 세계를 통틀어 2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기업의 수는 5586개다.(2014년 기준) 일본은 3146개로, 전 세계 200년 장수기업의 58%나 차지하고 있다. 500년 이상 기업도 147개, 1000년 이상 기업은 21개에 달한다. 엄청난 규모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일본 노포는 탁월하다. 최장수 노포 10선 가운데 무려 7개가 일본의 노포다. 1위부터 6위까지가 일본 차지이고, 9위도 ‘메이드 인 재팬’이다.

최장수 10선 가운데 흥미로운 노포 3개를 살펴보자. 먼저 세계 최장수 노포 곤고구미(金剛組)다. 서기 578년에 세워진, 황실이나 사찰 건립·보수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놀랍게도 곤고구미의 원류는 백제다. 쇼토쿠(聖德) 태자가 백제에서 초대한 목수 세 명 가운데 한 명인 곤고(金剛)가 창업한 기업이다. 현재 오사카(大阪)에 있는 국보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곤고구미의 건물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백제발 기업’이 세계 최고의 노포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두 번째는 세계 2위 노포인 니시야마온천(西山温泉)의 게이운칸(慶雲館)이다. 야마나시(山梨)에 있는 숙박시설이다. 서기 705년에 설립된 온천 여관으로 현재 35개 객실을 갖추고 있다. 식사를 포함해 하루 숙박비가 1인당 300달러 선으로 1년 365일 손님을 받고 있다. 숙박시설 하나만으로 1311년을 이어온 셈이다.

세 번째는 노포 세계 랭킹 5위인 테크 가이하츠(TECH 海発)다. 니가타현(新潟県)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 서기 760년에 설립됐다. 원래 칼이나 농구(農具)를 만드는 대장간에서 시작됐지만, 20세기 들어서는 석유시추시설에 이어 정밀기계 전문업체로 성장한다. 놀랍게도 전체 종업원 수는 25명에 불과하다.

세계 최장수 기업 곤고구미. 578년 설립된 사찰 전문 건축회사. ⓒphoto 곤고구미 홈페이지
세계 최장수 기업 곤고구미. 578년 설립된 사찰 전문 건축회사. ⓒphoto 곤고구미 홈페이지

1717년 설립한 향 가게

필자가 애용하는 향 가게 야마다마츠는 1717년 약(藥) 전문점으로 출발한 가게로, 교토 내 수많은 노포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필자에게 야마다마츠는 향 거래처로서만이 아닌, 일본 노포 비즈니스의 현장을 이해하게 만드는 모델이기도 하다. 그냥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선물 하나를 하더라도 그에 따른 구체적 상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어떤 종류의 포장지를 선택하고 포장지 표면은 어떤 색으로 할지, 선물을 보내는 사람을 누구로 할지, 선물을 묶는 끈의 색상을 어떤 것으로 하고 어떤 명목으로 선물을 할지 등등이다. 그런 구체적인 얘기가 선물을 주문하면서 오간다. 대충 알아서 하라고 일임할 듯하지만, 노포는 꼼꼼하다. 작은 것이라도 결코 간단히 흘리지 않는다. 선물 내용 자체만이 아니라 장식, 편지, 포장지 하나하나를 상의한다. 편지에 실리는 글자의 색상이나 굵기까지 논의한다. 교토의 노포인 만큼 가격이 비싸지 않을까 우려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 전통 선물과 비교할 때, 절반 정도 가격에 불과하다. 그리스, 포르투갈 레스토랑에서 보듯 적절한 가격은 노포가 가진 세 번째 특징이다. 노포인데도 왜 가격이 비싸지 않으냐고 의문을 달지 모르겠다. “노포니까 비싸지 않다!”라는 것이 답일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비싸다면 노포가 아니다.

‘세계 최대 최고’에 관한 뉴스는 최근 들려오는 중국발 뉴스의 주된 수식어 중 하나다. 최대 길이와 높이의 빌딩이나 교량에서부터 전파 망원경과 유인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대 최고가 붙는다. 대국굴기(大国崛起)라는 21세기판 추상명사도 세계 최대 최고라는 단어에 따라붙는다. 노포란 관점에서 볼 때 필자는 중국의 최대 최고 행진이 너무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경기가 한창때인 지금이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성장이 멈추면서 예산이 줄어들 경우에도 최대 최고를 이어갈 수 있을까?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 가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지 않지만,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줄일 때는 엄청난 희생과 출혈이 요구된다.

노포의 네 번째 특징은 비즈니스가 소규모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20세기 말부터 등장한 프랑스산 글로벌 브랜드 제품 같은 예외도 있겠지만, 일본이나 유럽에서 만난 로컬 노포들의 공통분모이다. 길고 긴 역사나 상품의 질적 수준에 비해, 종업원의 수나 연매출의 규모가 너무도 미미하다. 300년 역사를 넘어선 야마다마츠의 종업원 수는 60명에 그친다. 직영 가게도 교토에 한 곳과 도쿄에 두 곳이 전부다. 도쿄 다카시마야(高島屋)백화점 7층에 있는 분점에 간 적이 있지만, 크기가 7㎡(약 2평) 정도에 불과하다. 결코 무리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안전 비즈니스’야말로 노포의 존재 근거라 볼 수 있다. 갑자기 사업을 확장하거나 세상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식의 화려한 비즈니스와는 거리가 멀다. 가치를 아는 사람들, 그동안 신뢰관계를 유지해온 손님들과의 거래만으로도 충분하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자신은 물론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

수백 년 역사의 노포는 산전수전, 우여곡절, 파란만장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결론은, 선조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해나가는 것이다. 크고 강한 것이 아니라, 가늘더라도 길게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큰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 유지하면서 조금씩 발전시켜나가면 만족한다. 결과적으로 거품이 없다. 따라서 길고 긴 역사를 가진 노포일수록 상품의 가격이 비싸지 않다. 거꾸로 말하자면 비쌀수록 노포의 자격이 없어진다.

스토리텔링은 노포가 가진 다섯 번째 특징이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흑백필름 시대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특별한 얘기가 노포의 풍경 중 하나다. 스토리텔링의 성격이 그러하듯, 노포에 얽힌 사연 하나하나가 특별하고 새롭다. 그리스, 포르투갈 레스토랑의 경우 이민사에 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마이너리티의 생존 스토리가 떠오른다. 향을 통해 일본 문화를 전수해온 야마다마츠는 교토발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야마다마츠의 상품 중 하나로 문코(文香)라는 것이 있다. 편지 종이 사이에 끼워 보내는 향으로, 글만이 아닌 후각으로서의 기억도 전하려는 상품이다. 수많은 예술가와 문학가의 품과 격을 더해준 액세서리이기도 하다.

두부집 사사노유키의 런치세트(왼쪽)와 실내 전경. ⓒphoto 유민호
두부집 사사노유키의 런치세트(왼쪽)와 실내 전경. ⓒphoto 유민호

1691년 설립된 두부 가게의 스토리텔링

사사노유키(笹の雪)는 일본인이라면 한번쯤 즐기고 싶은, 도쿄 노포 레스토랑의 대명사이다. 325년 전인 1691년 이래 두부 하나만으로 손님을 상대해온 곳이다. 무명으로 두부를 감싸는 게 아니라 비단을 이용해 두부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만들면서 명물로 떠올랐다. 원래 교토에서 시작했지만, 도쿄로 옮겨 장사를 계속한다. 사사노유키는 두부의 원래 한자인 ‘豆腐’를 ‘豆富’로 표기한다. 썩은 콩요리가 아니라, 부자가 되는 두부라는 의미다. 필자도 일본에 갈 때마다 들르지만, 한국의 김소월 정도에 해당하는 문학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시(詩) 비석에는 두부의 부드러운 맛을 찬미한 내용이 들어 있다.

사사노유키에서 손님 대부분이 주문하는 메뉴는 2200엔짜리 점심용 코스다. 저녁이 되면 배로 뛰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제공되는 우구이스고젠(鶯御膳) 세트다. 전부 4종류로 나눠진 가이세키(会席) 요리다. 같은 두부를 다르게 조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두부 자체를 특별한 비밀 제조법에 의해 각각 다르게 만든다. 비단결 같은 두부, 콩의 무게가 느껴지는 묵직한 두부, 입에 넣으면 그대로 터지는 달걀 같은 두부, 검은콩으로 만들어진 진한 두부…. 2200엔 우구이스고젠만으로도 7가지 두부를 종류별로 맛볼 수 있다.

사사노유키의 특별함은 인상 깊은 두부요리만이 아닌, 일본인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의 진원지란 점에 있다. 일본인이 가장 즐겨 읽는 고전인 ‘주신구라(忠臣蔵)’와 얽힌 노포이기 때문이다. 눈오는 겨울 주군의 원수를 처단한 뒤 47명의 사무라이 전원이 책임을 지고 할복하는 것이 주신구라의 중심 스토리다. 한국으로 치자면 춘향전 이상의 고전으로, 연말 연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반드시 볼 수 있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사사노유키는 할복한 47명 사무라이 중 17명이 들러서 두부 식사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7명 중 한 명은 사사노유키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도 전해져온다. 충(忠)의 상징이자 사랑의 현장이라는 스토리가 곁들인 노포라 할 수 있다.

사사노유키 두부의 맛은 창업 초창기와 똑같다. 325년 전 만들었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주인의 책임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다. 분점을 내는 식으로 확장을 하지도 않는다. 주신구라 사무라이가 즐겼던 맛과 공간적 분위기를 음미하면서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다. 일본이 멸망하지 않는 한, 손님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노포라 할 수 있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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