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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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욱(75)씨의 걸음은 느렸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보폭은 5㎝가 채 되지 않았다. 전동침대가 놓인 자신의 서가에서 나와 거실 의자에 앉기까지 3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송씨의 부인 계명의(73)씨와 인터뷰 약속을 잡으면서 그가 4년째 파킨슨병 투병 중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송씨의 예후는 생각보다 중했다. 독도의 날(10월 25일)을 앞둔 지난 10월 17일, 서울 공릉동에 있는 송재욱씨 자택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송씨는 독도 얘기만 나오면 울먹거렸다. 아내 계씨는 “원래 저이가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이라며 “독도에 대한 한(恨)이 서려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30번지. 송재욱씨 가족 6명의 본적이다. 송씨는 1987년 11월 2일자로 송씨 부부와 2남2녀의 본적을 독도로 옮기면서 독도 호적자 1호가 됐다. 독도 호적자 2호는 1999년 11월 13일자로 옮긴 황백현씨(독도 유인도화 국민운동본부 의장). 2호 호적자가 나오기까지 12년이 걸렸다. 이후 독도 호적자가 서서히 늘었고 2016년 10월 17일 현재 독도 호적자는 3286명에 이른다.

송재욱씨의 자택은 웬만한 박물관 수준이었다.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유별난 그가 전국을 다니며 그러모은 옛 물건들이 집안 곳곳을 채웠다. 서예작품과 도자기, 문갑과 찻상 등 100년이 넘은 유물이 꽤 있었다. 독도에 대한 애정도 곳곳에서 묻어났다. 나무 찻상에는 ‘여보게 벗 茶나 한잔 먹음세’라는 문구와 함께 한반도 지도에 ‘獨島人(독도인)’이라고 새겨넣었고, 널찍한 나무 교자상 옆면에는 ‘朝鮮領土回復祈願(조선영토회복기원)’이라고 새겼다. 아내 계씨는 “저이가 다도(茶道)를 하면서 매일 아침 독도를 위한 기도를 올렸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서재에 있었던 교자상은 전동침대를 들여오면서 거실로 떠밀렸다 한다. 거실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씨의 친필 휘호도 있었다.

송씨는 투병 이후 2년 동안 문밖을 한 번도 못 나갔다고 한다. 휠체어로 외출 시도를 했지만 잘 안 됐다고. “나가시면 어디를 가장 가고 싶으시냐”는 질문에 그는 “글쎄올시다”라더니 이내 울먹거렸다. 송씨의 말은 느렸지만 발음은 정확했다. “내 고향 선산에(울먹울먹), 독도도 또 한 번(울먹울먹)…” “천천히 생각하세요”라는 아내의 말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얘기하다가도 깜빡깜빡해요. 바보가 다 됐어요. 후세에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은데 생각이 잘 안 나요. 무슨 얘기만 하면 감정이 앞서서…. 일본 사람들이 자꾸 불을 지르잖아요. 일본은 그래가지고(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서는) 선진국, 부국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돼 가네요. 누가 누구를 탓하겠어요?”

송씨와 가족들은 30년째 독도인으로 살고 있다. 독도로 처음 본적을 옮길 당시 송씨는 40대 중반의 사업가였다. 밖으로는 ‘독립문표메리야스’ 공장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으면서, 안으로는 ‘우리 것’ ‘우리 영토’를 지키기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나 그의 활약상은 세상에 덜 알려져 있다. 송씨의 말마따나 특별히 말하고 다니지 않는 성격 탓이 크다. 그가 독도 호적자 1호라는 것도 잘 안 알려져 있었다. 그가 본격 부각된 것은 독도 호적자 2호가 나타나면서다.

송재욱씨의 아내 계명의씨. 송씨 가족 6명은 1987년 11월 2일 독도 호적 1호가 됐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송재욱씨의 아내 계명의씨. 송씨 가족 6명은 1987년 11월 2일 독도 호적 1호가 됐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독도와 아무 연고도 없었던 송재욱씨. 그가 독도로 호적을 옮기게 된 건 독도어민 최종덕씨의 사망소식을 접하면서다. 유일한 독도인인 최씨의 사망으로 독도가 무인도가 될 위기에 처하자 송씨는 마음이 급해졌다. 독도에 가서 살 형편이 못 되니 호적이라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독도에 호적을 둔 한국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실효지배의 한 증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송씨가 독도로 호적 이전을 위해 관할 지역인 울릉군청을 찾은 날은 10월19일, 자신의 생일이었다. 그는 “며칠 참았다가 일부러 생일날에 맞춰서 갔어요. 그때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자신의 생일선물로 받고 싶었던 독도 호적은 무산됐다. 전례가 없던 절차라 행정 처리가 쉽지 않았다. 군청에서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 서류를 접수조차 못 했고 그렇게 며칠을 흘려보내야 했다. 백방으로 해법을 구하다 울릉도에서 5대째 살고 있다는 호적계장을 만나면서 일이 풀렸다. 호적계장 집으로 주소지를 이전하면서 길이 열렸고, 그의 작은 꿈이 성사됐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지금이야 독도 관련 운동본부도 있고, 다양한 캠페인이 열리지만 당시에는 흔치 않았다. 독도와 전혀 관련 없는 평범한 사업가의 돌출 행동에 사람들은 그를 기인 취급했다. 아내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굳이 왜 옮기냐는 시각이 많았고, 혹시 사업 때문에 도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어요.” 당시 가족들의 반응도 냉랭했다. 당시 자녀들은 초·중·고교생. 학교에서 호적을 떼 오라고 하면 울릉도행 배가 안 뜨는 바람에 한 달 가까이 걸린 적도 있다.

송재욱씨가 매일 아침 다도(茶道)를 하며 독도를 위한 기도를 올렸던 찻상. ‘조선영토회복기원’이라고 새겨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송재욱씨가 매일 아침 다도(茶道)를 하며 독도를 위한 기도를 올렸던 찻상. ‘조선영토회복기원’이라고 새겨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동동동심원’ 조성, ‘영토회복기원비’ 건립

“그런데 내가 독도에 살고 있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있어야지.”

그래서 조성한 것이 전북 김제군 금산면 제비산 자락에 있는 ‘동동동심원(東同童心園)’이다. 선산이 있는 1만8000㎡(5500여평)에 조성한 공원으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童), 한결같이(同), 동이민족을(東) 사랑하자’는 마음을 담았다. 사유공원이라고 하기엔 특이한 점이 많다. 우선 무료다. 한국의 2대 정원석으로 꼽히는 ‘용머리돌’이 있고, ‘영토회복기원비’가 세워져 있다. 용머리돌은 당시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50평형대 매매가와 맞먹는 값어치였다 한다. 영토회복기원비 뒷면에는 한반도 지도를 새겨넣었고, 앞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영토 찾는/ 기원을 심노니/ 아. 내 조국/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땅/ 어서어서/ 하나되게 하소서. -단기 사천삼백이십칠년 삼짇날 독도인 송재욱.’

송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수석(壽石) 애호가다. 한국수석회장도 지냈다. 동동동심원에는 꽃과 나무 사이, 희귀한 정원석들도 함께 두었다. 또 한아름이 넘는 항아리 40여개도 조르르 세워뒀다. 하지만 최근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송씨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동동동심원 관리에 소홀해지자 이곳의 정원석들과 항아리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지금은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아내 계씨는 “사람들이 차로 싣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급기야 지난 10월 7일, 이곳에는 없던 철문을 달고 자물쇠를 채웠다. 송씨는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거기가 경관도 참 좋고 관광객도 꽤 있어요. 사람들이 와서 많이 보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전북 김제 ‘동동동심원’에 세운 영토회복기원비.
전북 김제 ‘동동동심원’에 세운 영토회복기원비.

유물 850여점 기증

송씨의 간절한 꿈이 또 있었다. 동동동심원에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 누구나 와서 우리의 옛것을 보고 느끼게 하고 싶어서였다. 1999년 김제시청소년회관에 기증한 유물 850여점도 이런 마음에서였다. 기증한 품목은 백자, 목기, 토기류, 절구통과 누룩틀, 향로 등을 망라한다. 누가 시키거나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은 애국심으로 점철돼 있었다. 무엇이 그에게 우리 영토, 우리 것에 대한 이토록 애타는 간절함을 갖게 했을까. 질문을 하자 그는 한참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한학자셨어요. 송열(宋熱) 자를 쓰시는, 김제에서 강암 송성용 선생님에 버금가는 분이셨습니다. 나라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셨어요.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느냐, 사람이 예(禮)와 덕(德)이 없으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조용히 덕을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아내는 “저이는 보통사람들과 다른 면이 많다”며 일화를 들려줬다. “고등학교 때부터 청와대 앞에서 새생활운동을 전개했죠. 교회 학생부에서 인연을 맺게 됐는데, 한 번은 다방에서 차를 시키면서 그러더군요. ‘냉커피가 얼마나 비싼 줄 아냐, 시골에서는 하루 녹봉 값이다’라고요. 찬물을 확 끼얹는 말이었죠. 그 자리에 다른 친구들도 있었는데, 우리끼리 ‘다음에는 송씨를 만나지 말자’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계명의씨는 공릉동에서 20년 넘게 이화유치원 원장을 지냈다. 유치원 운영에도 송씨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다고 한다.

동동동심원의 향후 계획을 묻자 송씨는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보다시피 죽을 때가 됐잖아요. 살 만큼 살았고, 국가에 다 기증하고 싶어요. 그러면 참 홀가분하고 좋겠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 내 뜻을 잘 헤아려주는 누군가가 꼭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내 계씨는 “(남편이) 한 개인으로서 너무 많은 것을 해왔는데, 그것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송씨에게 소원을 묻자 그는 힘 있게 답했다. “일본 사람들이 시인을 해야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그는 아내와 네 자녀들에게 각각 문서를 남겨두었다. 누런 문서 봉투를 열자 독도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신문기사가 보였다. 손글씨 편지도 있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이 영원 무궁한 발전을 기하고 광활했던 옛 영토가 다시 회복되기를 몇 해 동안 기도해왔던가. 지금의 우리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또 영남이다 호남이다로 국민이 분열되는 것이 아픈 일이다. 빗돌에 새겨진 옛 지도를 바라보며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하루 속히 남북통일이 되고 정신을 차려 독도를 지키며 옛 영토를 다시 찾게 되기를… 눈물이 앞을 가리워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1994년 4. 10. 오후 5시 송재욱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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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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