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프랑스 정치학자이며 역사가인 토크빌(1805~1859)은 1831년 교도소 실태 조사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미국이란 국가를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는 미국이란 국가를 정의하기 위해 가장 먼저 미국 헌법에 게재된 정치 기관들을 묘사한다. 그 안에 담긴 정신인 권력의 분산, 국가와 주정부의 구별 등을 자세히 다루었다. 그는 국가의 외형적 모습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인의 특징, 도덕, 종교, 다양한 시민단체를 결성하려는 경향,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 등을 세심하게 언급한다. 이런 지적이며 도덕적인 관습과 습관이 ‘미국’이란 국가를 구성하는 에토스다. 미국 국민들이 가장 열광하며 찬양하는 그 어떤 것, 미국 국민들이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은 외형적인 기관이나 건물로 표현할 수 없지만, 국가라는 건물을 건설하는 설계도이자 청사진이다.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플라톤, 마키아벨리, 루소와 같은 사람들은 국가는 위대한 정치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획되어 건립된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로마를 건립한 신화적 인물인 로물루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정신적 창건자인 모세, 그리고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를 언급한다.

미국이란 국가도 마찬가지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와 같은 정치 사상가들이 미국이란 국가의 에토스와 기관들을 규정하고 만들고 미국인들에게 가르친 사람들이다. 특히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은 미국 헌법의 기초를 놓은 ‘연방주의자 논문집’을 기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 중요한 질문들이란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가 실제로 ‘성찰과 선택(reflection and choice)’을 통해 좋은 정부를 건립할 수 있을지, 혹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체제를 ‘우연이나 힘(accident and force)’에 영원히 의존할 운명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해밀턴은 국가 건립에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국가가 ‘성찰과 선택’을 통해 창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찰과 선택’이란 국가경영을 위한 의도적이면서 섬세한 행위와 인간의 의식적인 지적활동이다. ‘성찰과 선택’이 아니라면 국가가 사건, 사고, 환경, 관습이라는 소용돌이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뿐이다.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성찰과 선택’을 통해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이 정치가다. 정치인에겐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정치가는 플라톤이 주장한 대로 시, 수학, 형이상학에 정통한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신봉한 대로 심사숙고와 경험에 의존하여 실제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인가, 혹은 마키아벨리의 주장처럼 국가경영을 위해 비도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 교활한 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루소처럼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가, 또는 새로 선출된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처럼 회사의 대표이사나 경영자가 되어야 하는가.

위대한 정치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의 정치에 깊이 관여한 사상가들이다. 플라톤은 디오니시오스 왕에 조언하기 위해서 아테네에서 시실리로 세 번씩이나 긴 항해를 감행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고, 마키아벨리도 메디치 가문의 고문으로 ‘군주론’을 저술하였다. 이들은 모두 최선의 통치를 위해 통치가들에게 조언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인간’과 ‘좋은 시민’을 구별한다. ‘좋은 시민’은 자신이 속한 국가의 헌법을 준수하고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은 국가의 헌법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토론과 논쟁을 거쳐 최선의 헌법을 만들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이다.

아테네가 그를 법정에 세운 이유

지금부터 2400년 전에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새로운 인간상인 ‘좋은 시민’을 교육하기 위해 혁신적인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교육한 철학자가 등장했다. 아니 ‘철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한 인물이다. 철학은 태생적으로 민주주의와 도시문화, 그리고 시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바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다. 그는 인류에게 도시문화와 정치라는 생경한 분야를 선사하였다. 그리고 그 문화를 관철시키기 위해 알렉산더 해밀턴이 지적한 대로 아테네 사람들에게 어려운 질문들을 던졌다. 결국 그는 질문을 너무 많이 한다는 이유로 아테네 시민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철학자들이 있었다. 소아시아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자연철학자들이다. 그들은 주로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 안에 숨어 있는 원칙과 핵심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상가는 소크라테스다. 그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도시라는 공동체에 대해 얘기했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도시와 국가라는 공동체를 관찰하고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주장하였다. 그는 넓적코에 키가 땅딸막하고, 몸은 축 늘어져 보기에 추한 사람이었다. 페리클레스가 건설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는 이상적인 인간 조각상이 진열되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외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역설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회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겉보기에는 거의 무시해도 될 만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가 엄청난 카리스마와 위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기원전 399년, 70세가 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 섰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30년간 펠로폰네소스전쟁을 치른 직후였다. 이 전쟁의 영웅 페리클레스는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하였고, 아테네를 인류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예술적이며 문화적인 삶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체계를 실험하고 있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연설문이 실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테네라는 도시는 모든 헬라인들의 학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를 세상에 활짝 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외국인도 배움의 기회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주장한 대로,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인 아테네는 왜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웠을까. 펠레폰네소스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마흔 살이었던 소크라테스는 그 전쟁에 참전하였다. 아테네는 기원전 404년 이 전쟁에서 패했다. 그후 아테네에는 ‘30인 참주들’이라고 불리는 친(親)스파르타 귀족들이 일 년 동안 아테네를 다스렸다. 그 다음해인 기원전 403년, 이들이 물러나고 아테네엔 다시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나서 비극작가 멜레투스, 변론가 라코스, 피혁 상인이며 민주주의 옹호 정치가인 아니투스가 소크라테스를 기소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비판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가 신봉하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도 달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에 대한 소문과 나쁜 평판이 오래전부터 나돌았다고 말한다. 그는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6~385년)가 오래전부터 연극을 통해 자신에 대한 편견을 아테네인들에게 전달해왔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저작 ‘국가’ 10장에 철학과 문학의 오래된 논쟁이 등장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는 같은 식탁에 앉아 국가라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철학자와 시인 중 누가 더 유용한가를 논쟁한다. 이 질문의 핵심은 아테네 시민들과 아테네 미래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데 누가 더 적합한가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그리고 헤시오도스의 ‘일들과 날들’ ‘신통기’와 같은 문학에서 찾았다. 이 책들에 등장하는 신들과 영웅들의 모습에서 아테네인에게 필요한 삶의 덕목들을 추려냈다. 고대 그리스의 문학적이며 시적인 전통은 전쟁 상황을 기반으로 한 완벽한 인간인 ‘전쟁 영웅’을 찬양하고 영웅의 타락인 ‘비극’을 원형극장에서 음미하였다. 이 유산을 기반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보잘것없는 민족에서 위대한 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에 예술적이며 지적이고 동시에 정치적인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런 업적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나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 혹은 독일 바이마르 시대의 모델이 되었다.

소크라테스 두상
소크라테스 두상

시적 전통에 정면도전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방식과 그리스의 시적 전통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아테네인들은 그가 젊은이들을 교육을 통해 타락시켰다고 주장하는가. 첫 번째, 소크라테스식 가르침은 시적 전통과 다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오, 여신이시여,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하십시오!”라고 시작한다. 시인들은 자신들의 영감을 위해 신들을 부른다. 그리고 영웅적인 인간들의 힘과 용기, 그리고 분노에 관한 이야기를 노래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식 가르침은 신들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노래하지 않고 대신 동료 인간과 ‘대화’한다. 그 대화는 논쟁적이며 변증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주장을 하고 상대방이 그와 함께 대화하면서 누구의 주장이 인간의 이성적인 검증을 통과하는지 경쟁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에는 강력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있지만 논쟁과 주장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전통적인 구절들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눈을 보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것이 ‘철학적이며 정치적인 교육’ 방식이다. 그는 과거 고대 그리스 시인 전통의 가르침에 정면 도전하였다.

두 번째 차이는 내용이다. 호메로스와 시인들은 전쟁 영웅들의 덕을 찬양한다. 호메로스는 이 영웅들의 덕을 그리스어로 ‘아레테(arete)’라고 불렀다. ‘아레테’는 영웅이 전쟁 중에 보여주는 ‘용맹성’이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를 통해 ‘용맹성’으로서 아레테를 찬양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라는 도시국가가 요구하는 영웅은 호메로스의 전쟁영웅과는 다르다고 봤다. 소크라테스는 도시국가 아테네를 작동하게 하는 시민적인 덕을 소개한다. 소크라테스의 시민적인 덕이란 도시 안에서 공동의 선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이성을 기반으로 한 언어적 구사 능력, 즉 설득과 수사학적 능력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다. 그는 아리스토파네스와 다른 시인들은 소크라테스의 교육과 철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기원전 423년 ‘구름’ 전체를 소크라테스를 격하하기 위해서 썼다. 이 연극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돈만 주면 말 속임수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전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소피스트의 우두머리로 소개된다. 이 연극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당시 시인과 작가들, 특히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당시 동시대 시인과 극작가들에게 경계와 멸시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멸시의 대상이 될 정도로 이미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론티스테리온(phrontisterion)이라고 불리는 사색을 훈련하는 학원 원장이다. 그는 무대 위에 설치된 바구니에 앉아 구름 위로 날아다니며 옳음과 그름을 변증술로 바꿀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연극에서 농부 스트렙시아데스는 사치를 즐겨하는 아내와 전차경주와 말에 빠진 아들 뒷바라지를 하다 많은 빚을 졌다. 그러던 중 소크라테스가 속임수를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그 학원에 보낸다. 아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 말솜씨로 채권자들을 따돌려 집안형편이 나아졌다. 그런 후 아들은 거기에서 배운 솜씨로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고 어머니를 겁탈하려 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이 새로운 교육을 혐오하게 되어 학원에 불을 지르고 그의 제자들을 추방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표현한 소크라테스는 하늘 위 구름 위에서 자연을 관찰하는 자연과학자의 모습이다. 아마도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는 이런 소피스트들 중에 하나였는지 모른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묘사한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전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것이 바로 ‘델피 신탁’ 사건이다. 어느 날 그의 친구 카이로폰(Chaerophon)이 델피 아폴로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 갔다. 신으로부터 직접 신탁을 받은 자는 시빌이라는 지혜로운 여인이다. 시빌은 황홀경에 빠져 질문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대답을 하는 예언자다. 카이로폰이 시빌에게 질문한다. “누가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가?” 그러자 시빌은 “아무도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롭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카이로폰이 아테네로 돌아와 소크라테스에게 이 신탁을 말해주었다. 소크라테스는 믿지 못했다. 이 신탁은 그를 혼돈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내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는가?”라고 의심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지혜로운 자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에게 수년 동안 질문하는 데 집중한다. 그는 아테네의 유명한 정치가, 시인, 장인, 그리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질문한다. 그 질문은 자연현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들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들은 도덕적이며 정치적이다.

혼돈 상태로 만드는 그와의 대화

소크라테스는 지속적으로 아고라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지적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용기’가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는 한 장군과 대화를 시작한다. 그 장군은 소크라테스와 20분 정도 대화한 후에, 자신이 알고 있던 ‘용기’에 대해 완전히 모르는 상태인 혼돈에 빠져버렸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들의 한계를 드러내길 좋아했고 자신들의 삶의 기반이 되는 가정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지혜로운 이유는 자신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아테네의 부유한 사람들의 아들들은 소피스트(sophist)와 공부했다. 소피스트는 연설하는 법을 학생들에게 지도하는 현명한 선생들이다. 그들은 비싼 수업료를 받고 가르쳤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항상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없고 돈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에게 몰려와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경쟁자인 소피스트들이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델피 신탁사건으로 소크라테스는 ‘구름’ 위에서 자연현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자연과학자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아테네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의 도덕과 정치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아니투스와 멜레투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들에게 불경하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웠다. 소크라테스의 행동 중 무엇이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는가. 모든 사회는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 믿음을 기초로 작동한다. 특히 헌법에 등장한 중요한 믿음들이 있다. 자유와 평등사상 같은 것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몇 가지 믿음은 시민들이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조건이라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믿음들을 의심하고 검증해 보라고 촉구한다.

그는 이 검증하는 방식을 철학이라고 정의한다. 철학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philosophy’는 그리스어 단어 ‘지혜(sophia)’와 ‘사랑(philo)’에서 유래한다. 서양철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세계로 펼쳐나갔다. 철학은 단순히 불신이나 거절과는 다르다. 철학은 남들이 진리라고 착각하는 편견이나 의견을 지식으로, 전통적인 믿음을 이성으로 대치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동원해 이전에 아테네인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믿음을 이성적인 지식으로 대치한다. 그러므로 철학과 아테네의 신앙이 정면충돌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끊임없는 질문은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들에 대해 항상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말한다. “인생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 이유와 목적을 깊게 생각한다면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자기 스스로 검증하지 않은 삶은 가축에게나 어울리지 인간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로서는 예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를 거절했다. 그는 말하는 것이 쓰는 것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후에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도 구전으로만 남겼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대답이 정해지고 더 이상 꼬리를 물고 계속 질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과 얼굴을 맞댄 대화가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쓰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믿었고 무엇을 주장했는지 그의 수제자 플라톤의 작품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신들을 무시하고, 아테네 젊은이들을 방종하도록 가르치고, 정부에 대항하도록 종용했다는 이유로 기소된다. 그는 또한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모욕하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많은 아테네인이 이 기소 내용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가 유죄인지 아닌지 투표한다. 배심원 501명 중 과반수가 유죄를 인정하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된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그는 아마도 사형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말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등에(gadfly)’라는 자신의 명성에 어울리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아테네인들을 더욱 화나게 만든다. 그는 끔찍스럽게 짜증 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말 등 위에 앉아 끔찍하게 말 등을 쏘는 말파리, 즉 등에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다. 등에는 귀찮게 하는 곤충이다. 그러나 큰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국가 권력 앞에서 쉽게 죽을 수 있는 존재다. 그는 독미나리에서 채취한 독배를 마시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독미나리를 마시면 몸이 점점 마비된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와 세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제자들을 소집한다. 그는 자신이 질문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겠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것에 의심을 가지고 질문하라고 촉구한다. 그는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법정에서 말한다. “누군가 제게 말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여! 당신은 당신을 적절하지 않은 최후의 죽음으로 이끈 이런 삶을 부끄럽게 여지기 않습니까?’ 저는 그에게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당신이 잘못 보았습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선한 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죽고 사는 일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만을 고민할 따름입니다.… 그는 죽음의 시간에 언젠가는 머무를 것입니다. 그는 죽음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 않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손에 든 독배를 마시고 서서히 죽어갔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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