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0일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난동을 부린 임범준씨의 모습. 마침 기내에 팝스타 리처드 막스가 탑승해 임씨의 난동을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photo 리처드 막스 페이스북
지난해 12월 20일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난동을 부린 임범준씨의 모습. 마침 기내에 팝스타 리처드 막스가 탑승해 임씨의 난동을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photo 리처드 막스 페이스북

서울 마포구에서 떡볶이와 순대 등을 파는 분식집에서 일하는 김진아(22)씨는 지난해 12월 26일 손님으로부터 봉변을 당했다. 부부로 보이는 40대 남녀가 들어와 떡볶이·오뎅·순대 세트를 시키고 난 후의 일이었다. 주문받은 음식을 가져다준 김씨에게 남자가 “물을 달라”고 요구하길래 김씨는 “물은 셀프 서비스”라면서 정수기가 있는 곳을 알려줬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가 김씨의 뺨을 때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자 남자는 “뭘 봐”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함께 앉아 있던 여자가 황급히 남자를 말렸고, 이들은 돈 2만원만 내려놓고 사라졌다. “아마 모든 일이 5분 안에 일어난 것 같아요. 분식집에서 일한 지 1년 만에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네요.”

김씨의 말을 들어보면 평소에도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진상’ 손님이 많다. “술 거나하게 마시고 와서 떡볶이 한입 먹다 토하고는 그냥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고요. 떡볶이 집에 김치찌개가 없다고 화내는 사람도 있었어요.”

지난해 12월 20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기내에서 34살 임범준씨가 난동을 부린 것을 계기로 다시금 이른바 ‘진상 고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환기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15일 경찰청은 100일간 ‘갑(甲)질 횡포 특별단속’을 통해 진상 고객 3300여명을 입건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루에 3명 넘게 경찰에 입건됐다는 얘기니 우리 사회에서 진상 고객은 그만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손님이 왕이다?

왜 ‘진상’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소한 것이라도 돈을 지불하면 ‘내가 주도권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다”고 그들의 심리를 설명했다.

“물건을 구입하면 물건에 따른 행동과 말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불하는 돈은 딱 그 물건의 가치에 대한 것인데,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의 모든 것이 자신의 주도권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서비스 제공자와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진상 고객의 통계학적 분포가 이해가 된다. 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고의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거나 진상을 부린 악성 고객의 경우 가해자의 35.1%가 무직자나 일용직 근로자였다. 다시 말해 평소에는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던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그에 맞는 ‘대접’을 받으며 주도권을 갖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대개 이런 진상 고객의 경우에는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분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1년 넘게 밤에 대구 북구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25살 정수현씨의 경험담이다.

“제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밤 9시부터 2시간 넘게 계산대를 떠나지 않고 계속 시비를 거는 손님이 있었어요. 참다 못해 사장님에게 얘기했더니 경찰에 신고하라 그래서 신고했죠. 그 아저씨는 경찰이 도착하자마자 내내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꼬리를 내렸어요. ‘요즘 일자리를 못 구해서 그랬다’면서 ‘안 그러겠다’고 말하고 얼른 자리를 뜨더라고요.”

돈을 지불했으니 그에 대한 ‘합당한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진상 고객을 키운다. 음식점에서 점원에게 반말을 내뱉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진상 고객들이 이런 유형이다. ‘손님이 왕’ ‘고객을 감동시켜라’는 문구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내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진상 고객은 성별과 나이, 소득을 가리지 않고 생겨난다.

서울 시내 특급호텔에서 4년째 일하는 호텔리어 김은혜(가명)씨는 얼마 전 진상 고객을 만났다. “출장 중인지 서류가방을 들고 와 투숙한 숙박객이었는데 하루 만에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지나가던 직원들이 허리를 덜 숙이며 인사를 한다고 불러 세워서 ‘다시 인사해’라며 진상을 부렸거든요.” 비싼 돈 냈으니 그에 맞는 서비스를 받고 싶다고 요구하는 유형의 고객이다. 김씨는 “특급호텔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때로 고객들이 매우 과한 요구를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가격도 비싸면서 이 정도도 안 되느냐’는 진상은 자영업자들이 가장 많이 겪는 문제 중 하나다. 얼마 전 유명 셰프들이 방송에 나와 털어놓은 고충이 한창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고급 음식점일수록 비싼 식기를 많이 쓰는데 고객들이 이것들을 몰래 가져간다는 얘기였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부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정미경(가명)씨는 한참 전부터 음료를 머그컵이 아니라 테이크아웃 종이컵에만 담아 제공한다. “하루에 머그컵 5개를 분실한 적도 있었어요. 남은 음료를 버리고 머그컵을 가방에 챙기는 30대 여성을 보고 지적했더니 손님이 되레 ‘커피 값만 5000원인데 컵 하나를 아까워하냐’며 화를 낸 적도 있어요.”

서로 동등한 관계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박종태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손님들이 지불한 돈의 가치는 물건에만 적용되는 것인데 점원의 인격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문제”라고 말했다. 가격이 비싼 이유는 물건이나 서비스가 그만 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진상 고객들은 그것을 제공하는 서비스 제공자까지 ‘구입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생각에는 돈 주고 음식을 먹으니 요리를 만든 요리사나 가져다준 점원에게도 한소리 할 수 있고, 비싼 돈 내고 비행기를 탔으니 비행을 도와주는 스튜어디스에게 손찌검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돈을 냈다는 이유로 자신이 우월한 지위를 가졌다고 잘못 생각하며 서비스 제공자를 ‘을’ 취급하고, 제공되지 않는 서비스까지 요구하는 사람이 바로 진상 고객이 되는 것이다. 원인에 따른 해결책은 어렵지 않다. 고객 스스로가 서비스 제공자와 자신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지불하는 돈의 가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박종태 교수는 “당장 할 수 있는 일로는 서비스 제공자들이 진상 고객에게 단호하고 정확하게 대응하는 매뉴얼을 갖추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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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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