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 ⓒphoto 로이터
프란치스코 교황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 ⓒphoto 로이터

중국 베이징의 공산당 베이징시위원회 당교(黨校) 구내에는 명나라 때 가톨릭을 전파한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이자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의 묘가 있다. 중국 이름으로 리마더우(利瑪竇)라고 불리는 리치 신부는 1583년부터 27년간 명나라에 체류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성당을 건립하며 뛰어난 포교 활동을 벌였다. 특히 리치는 1601년 명나라의 만력제(萬曆帝)에게 자명종(自鳴鐘·탁상시계)과 대서양금(大西洋琴·피아노의 전신)을 바치고 베이징 정주를 허락받기도 했다. 리치는 1603년 가톨릭의 교리를 유교적으로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통해 ‘천주(天主)’라는 용어를 만들어 ‘가톨릭(Catholic)’을 ‘천주교(天主敎)’로 자리 잡게 했다.

또 당시까지 세계가 네모라고 했던 중국인들의 생각을 깨뜨린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제작하는 등 천문·역법·수학·과학 등 이른바 서양학문인 ‘서학(西學)’을 전파하기도 했다. 리치는 유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해 제사와 같은 유교 행사도 가톨릭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인정하기도 했다. 만력제는 리치가 사망하자 묘지를 정해 묻어주도록 했다. 리치 사후 30년간 명나라의 가톨릭 신자 수는 15만명을 넘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가톨릭은 중국에서 성행했다. 하지만 교황은 사신을 통해 청나라의 제사를 우상숭배라면서 금지시키도록 명령했다. 천자(天子)를 자처했던 강희제(康熙帝)는 교황의 명령에 분노했고, 예수회를 제외한 가톨릭의 포교를 금지했다.

예수회는 1540년 성(聖)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가 프란시스코 히비에르 신부 등 6명의 사제와 함께 창설한 가톨릭의 사제 수도회를 말한다. 예수회는 중세 말기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진출에 대응하기 위해 청빈과 정결, 교황에 대한 절대적 순명(順命)을 모토로 엄격한 군대식 조직으로 가톨릭의 원상회복과 재건에 진력해왔다. 특히 예수회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와 중남미 등 해외 선교에 주력했다.

1549년 최초로 일본에 가톨릭을 전파한 선교사도 예수회 공동 창설자인 히비에르 신부였다. 예수회는 현재 가톨릭에서 가장 큰 수도회로 성장했으며 구성원은 사제, 수도사, 수사 등을 포함해 1만6740명에 달한다. 예수회는 2013년 3월 사상 처음으로 교황을 배출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로마 교황청(바티칸)의 콘크라베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후임으로 선출되면서 교황 프란치스코로 등극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서고 있다. 바티칸과 중국은 현재 외교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가톨릭은 1840년 아편전쟁의 발발과 함께 시작된 서양 열강의 침략 이후 중국에 다시 돌아왔다. 이어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신해혁명 이후 바티칸은 1942년 중화민국과 국교를 맺었다. 하지만 중국 국공내전과 공산당의 승리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건국되면서 바티칸은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됐다. 당시 바티칸의 대사는 패전한 중화민국(대만) 정부를 따라 타이베이로 건너가 대사관을 설치했다. 중국 정부는 1951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워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다.

비록 단교를 했지만 중국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중국 정부는 1957년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관제단체인 ‘천주교 애국회’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중국의 가톨릭 신자는 공식적으로 천주교 애국회 교회에서만 미사를 볼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또 천주교 애국회 교회와 신자를 관리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신부와 주교를 임명했다. 가톨릭 교리를 보면 주교와 신부 등 모든 서품(敍品)은 교황의 고유 권한이다. 이 때문에 교황은 중국 정부가 임명한 주교와 신부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와 바티칸은 그동안 이 문제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해왔다. 중국의 가톨릭 교회는 ‘천주교 애국회’와 교황청을 따르는 ‘지하교회’로 나뉜 상태다. 중국의 가톨릭 신자는 570만명이지만 지하교회 신자까지 합치면 12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식 의복을 입은 마테오 리치 신부의 초상화. ⓒphoto 위키피디아
중국식 의복을 입은 마테오 리치 신부의 초상화. ⓒphoto 위키피디아

교황의 마테오 리치 평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언제부터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을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2월 중국 음력설인 춘제를 맞아 홍콩 언론인 아시아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지혜롭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라면서 “세계는 중국의 부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중국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국에 가톨릭을 가장 먼저 포교한 마테오 리치 신부를 언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리치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중국과 진정한 만남을 갖게 됐는지 알게 됐다”면서 “리치의 경험은 우리에게 중국과의 대화에 나서라고 가르쳐준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용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비행기가 중국 상공을 지나갈 때 리치가 떠올랐다”면서 “리치 덕에 예수회가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출신답게 청년 시절 일본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기도 했었다.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연히 일본에서 가장 먼저 포교했던 히비에르 신부의 행보를 잘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전도한 히비에르 신부는 1551년 포교하기 위해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했고 1952년 광둥성 앞의 섬에서 열병으로 숨졌다. 히비에르 신부 다음으로 중국 포교에 나선 선교사가 리치 신부였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있는 기푸스코아주의 주도인 산세바스티안.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30여㎞ 떨어진 인구 1만명밖에 되지 않는 소도시 아스페이티아에는 예수회의 성지인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의 생가와 로욜라 대성당이 있다. 연간 10만여명이 영성을 갈구하며 순례하는 이곳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두 차례나 찾았다. 1986년 아르헨티나 지역 예수회 본부장 시절과 1991년 추기경 때 이그나티우스 성인 탄생 500주년을 맞았을 때다. 이 대성당의 식당 로비에는 리치 신부가 중국식 복식을 한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다.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도 리치 신부의 모습을 봤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프란치스코 교황의 머릿속에는 리치 신부와 중국 포교가 각인돼 있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국 전문가인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을 바티칸 외교의 수장인 국무원장으로 임명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임무를 맡겼다. 바티칸과 중국은 2014년 1월 로마에서 첫 회동을 시작으로 그동안 수차례 만나 관계개선 문제를 논의해왔다. 지난해에만 중국과 바티칸은 적어도 네 차례의 접촉을 통해 ‘사제 서품권’을 집중적으로 조율해왔다. 양쪽은 천주교 애국회와 지하교회가 모두 참여하는 ‘중국 주교단’이 추천권을 행사하고, 교황이 최종 임명권을 갖도록 하는 방안으로 의견을 모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교황은 중국 주교단이 추천한 후보들 가운데 주교를 선택해 서품한다는 것이다. 중국 주교단이 추천권만 갖고, 교황이 최종 임명권을 갖는 이 방식은 ‘베트남 모델’을 본뜬 것이다. 베트남 모델은 베트남 정부가 바티칸에 제출하는 주교 후보자 명부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고 바티칸 결정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방식이다. 최종적으로는 교황이 주교를 임명한다. 이에 따라 바티칸은 베트남과 아직까지 수교하지는 않았지만 2011년 레오폴도 지렐리 대주교를 베트남 주재 비상주 대표로 임명하는 등 관계를 강화해왔다. 지렐리 대주교는 1975년 베트남이 공산 통일된 뒤 처음으로 임명된 교황의 외교 사절이다. 왕이웨이 중국 인민대학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중국과 바티칸이 최대 걸림돌인 주교 임명과 관련해 베트남 방식을 채용하기로 합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징저우에 있는 천주교 애국회 소속 가톨릭 교회의 모습. ⓒphoto 위키피디아
중국 징저우에 있는 천주교 애국회 소속 가톨릭 교회의 모습. ⓒphoto 위키피디아

바티칸과의 가교 역할 선빈 주교

실제로 바티칸이 인정한 주교가 사상 처음으로 중국 천주교 교단의 지도부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천주교 제9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선빈 주교 등 주교 17명이 천주교 애국회와 천주교 주교단 부주석으로 선임됐다. 특히 제1부주석으로 선임된 선 주교 등 3명은 바티칸과 중국 정부가 공동으로 추인한 주교이다. 장쑤성 하이먼 교구를 맡고 있는 선 주교는 2010년 주교 서품 당시 교황의 임명에 이어 중국 정부의 승인도 받았다. 선 주교는 현재 바티칸과 중국과의 수교 협상에서 가교 역할도 맡고 있다. 선 주교의 부주석단 편입은 수교 협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과 바티칸이 주교 서품 방식에 이어 교단 지도부 구성을 놓고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년과는 달리 중국 주교들에 대해 전국대회 불참을 요구하지 않았다.

중국 천주교 교단의 총회라고 할 수 있는 대표회의는 원래 5년마다 열도록 돼 있는데 중국과 바티칸의 협상 진척 상황을 고려해 1년 늦은 지난해 말 개최됐다. 왕줘안 중국 국가종교국 국장은 “중국은 바티칸과 관련 원칙에 근거해 건설적 대화를 할 용의가 있으며 차이점을 없애고 공통인식을 확대하며 관계개선을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종교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왕 국장이 관련 원칙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요구 사항은 바티칸이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라는 것이라고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하나의 중국’ 원칙 폐기 가능성과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의 전화통화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다. 중국 정부는 최근 대만과 단교한 서아프리카의 자그마한 섬나라 상투메 프린시페와 수교했다. 만약 바티칸이 대만과 외교 관계를 끊을 경우 대만의 수교국 수는 20개국으로 줄어든다. 특히 파라과이, 도미니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중남미 가톨릭 국가들이 바티칸의 결정에 영향을 받아 대만과 단교할 가능성도 높다.

아시아 신자, 전체의 12% 불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과 중국의 화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교세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티칸은 전 세계 국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을 포용함으로써 더욱 폭넓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는 세계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톨릭 신자는 12%에 불과해 유럽과 미국에서 감소하는 신자 수를 만회할 수 있는 지역이다. 바티칸은 교세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13억 인구의 중국에서 포교에 나선다면 교세 확장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바티칸은 내심 중국의 종교 자유 확대는 물론 민주화에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바티칸은 1980년대 동유럽 민주화에 도움을 준 바 있다. 파롤린 국무원장은 “바티칸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있다”면서 “양측 간 관계개선은 중국 내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위대한 문명을 자랑해온 중국 국가 전체에도 이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바티칸이 대(大: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소(小:대만과의 단교)를 희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바티칸 내에선 전 홍콩 교구장인 요셉 젠 추기경을 비롯해 일부 추기경들이 중국과의 수교에 반대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바티칸이 중국과 수교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천젠런 대만 부총통은 파롤린 국무원장에게 중국과 수교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중국도 바티칸과의 관계개선이 국제사회에서 자국 이미지를 고양하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종교의 자유, 인권 탄압 등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마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바티칸과의 수교가 대만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차이 대만 총통의 독립노선에도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트럼프 미국 정부가 ‘대만 카드’를 사용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수단도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물론 중국공산당 지도부 중 일부는 종교의 자유가 확대될 경우 자칫하면 체제에 위협이 된다면서 바티칸과의 수교에 반대하고 있다. 소련 공산 혁명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말처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기 때문이다.

바티칸과 중국의 관계개선은 국제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일대 사건’이 될 것이 틀림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리치 신부처럼 중국에 다시 발을 디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인가.

키워드

#국제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