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465호] 20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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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 원양어업 60주년] 한 척으로 일어선 원양강국 다시 바다로!

▲ 지난 6월 29일 국내 첫 원양어선 지남호 출항 60주년을 기념해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에 세워진 원양어업 60주년 기념비. photo 이동훈
▲ 부산 영도구 순직선원 위령탑 photo 이동훈
지난 7월 4일 찾아간 부산 영도구 태종대. 해무(海霧)가 자욱하게 낀 태종대 입구에 ‘순직선원 위령탑’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이 탑이 건립된 것은 1979년 4월 12일. 원양어업에 관심이 높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마지막 해였다. 박 대통령은 강화도조약(1876)으로 열린 부산 개항 100주년(1976)을 기념하는 뜻에서 순직선원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탑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해발 100m 지점에 높이 46m의 위령탑을 세우고 ‘순직선원위령탑’이란 비문은 본인이 직접 썼다. 9117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이면 ‘선원합동위령제’가 열린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선원들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다.
   
   위령탑 뒤에는 이은상 시인이 쓴 바다에서 죽은 원혼들을 추모하는 시가 적혀 있었다. ‘바라보라 저 오륙도(五六島) 벗어나면 세계로 통하는 한바다/ 내 겨레 이익을 위해 내 나라 이름을 위해 배 위에 몸을 싣고 오대양으로 산 같은 파도를 헤쳐간 이들… (중략) 뜻 아니한 불행이 덮쳐 몸은 파도 속에 희생되어도 넋은 그 순간 파도 넘타고 분명 그리운 내 조국 찾아왔으리/ 오늘도 여기 귀 기울이면 그대 원혼들의 애끓는 호소 이 바다 기슭을 치고 부딪는 파도소리 속에서 들려 나온다… (후략).’ 시를 찬찬히 읽고 위령탑을 다시 돌아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1957년 지남호 출항 60주년
   
   원양선원들이 바다로 나간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6월 29일에는 국내 첫 원양어선인 지남호 출항 60주년을 기념해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 바깥 뜰에 참치잡이배 지남호를 형상화한 기념비도 세워졌다.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경제발전의 디딤돌을 놓은 애국자인 원양어선원들의 개척정신을 기리고 앞으로 우리 원양산업이 우리나라를 해양강국으로 이끄는 초석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김현태 이사(홍보마케팅 지원센터장)는 “정부 차원에서 원양선원들의 기여를 파독(派獨) 광부나 간호사보다 더 크게 인정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찾아가서 본 기념비는 바다를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1960~1970년대 외화획득의 일등공신인 원양어업을 기리는 기념비치고는 작고 초라해 보였다.
   
   이날 찾아간 부산항 북항(北港) 제1부두. 일제강점기 때 ‘관부(關釜)연락선’이 드나들던 유라시아의 관문 북항 제1부두는 1957년 6월 29일 지남호가 출항한 곳이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은 그대로일 듯했지만, 1부두에 있던 국제여객터미널이 3·4부두 일대로 떠나버려 을씨년스럽게 변해 있었다. 60년 전인 6월 29일, 부산항 제1부두에서 지남호가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했다. 앞서 6월 26일 김일환 상공부 장관, 홍진기 해무청장을 비롯한 정부 고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1부두에 있던 해양경찰대 강당에서 출항식을 미리 연 터라 당일은 선상에서 간단한 기념식만 가졌다. 그래도 출항 당일 선원 가족과 지인들이 중앙수산시험장 지도선인 지리산호와 북한산호에 나눠 타고 오륙도 앞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며 배웅할 정도였다.
   
   지남호는 1946년 미국 시애틀 수산시험장이 연구용으로 건조한 230t급 종합시험선으로, 원래 이름은 ‘워싱턴호’였다. 1949년 미국 경제협조처(ECA)의 원조로 한국에 들여와 원양어선으로 개조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를 건져올려라”란 뜻에서 ‘지남호(指南號)’로 명명했다. 이날 지남호에 승선한 사람은 인도양 시범조업 단장인 남상규 해무청 어로과장(전 국제원양 사장)과 키를 잡은 윤정구 선장(전 오양수산 사장), 중앙수산시험장 이제호 지도관(전 광명수산 대표)을 비롯해 모두 27명. 부산항을 출항해 일본 시모노세키(下關)항을 거쳐 대만 북부 지룽(基隆)항에 도착했을 때 미국인 한 사람이 지남호에 추가로 승선했다. 주한 경제조정관실(OEC) 소속의 수산기술고문관 모건이었다.
   
   수산기술고문관으로 있던 모건은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의 후신으로 부산 영도에 있던 중앙수산시험장(국립수산과학원의 전신)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참치잡이배 선장 출신인 모건은 이곳에 머물며 틈틈이 인도양 참치연승 시험조업을 직접 권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모건이 지남호에 승선하자마자 사고가 터졌다. 인도양 도착 전 조업시범을 보여준답시고 투승(投繩)을 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친 것. 결국 모건은 중도에 하선했고, 지남호에 탄 선원 중 먼바다에서 참치같이 큰 물고기를 잡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남호 선상에서 남상규 단장과 윤정구 선장 주재로 긴급회의가 열렸다. 당초 계획대로 인도양으로 가자는 의견과 부산항으로 철수하자는 의견이 엇갈렸다.
   
   결론은 당초 목표대로 인도양으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지남호에 승선했던 이제호 지도관은 “모건이 다쳐 하선하고 난 뒤 열린 선상회의에서 부산항으로 철수키로 결정했다면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싹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끝났을 것”이라며 “남상규 단장과 제가 마침 제주 근해에서 상어연승어업을 해본 경험이 있어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모건을 내려준 지남호는 다시 대만 지룽항을 출발해 필리핀과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양을 목표로 남쪽으로 나아갔다. 싱가포르에서 기름이 떨어져 한동안 발이 묶이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출항한 지남호가 말라카해협을 통과해 처음 도착한 곳은 인도양 초입의 니코바르섬.
   
   1957년 8월 15일 새벽 5시경, 지남호 선원들이 긴 낚싯줄을 바닷물 속으로 집어넣었다. 낚싯줄에 사람 키보다 큰 물고기들이 퍼덕거리며 올라왔다. 지남호의 선주이자 국내 첫 원양선사였던 제동산업 심상준 사장은 ‘원양어업개척사’란 자서전에서 “어획량은 0.5t에 불과했지만 우리 기술과 노력으로 이룩해낸 쾌거”라고 썼다. 지남호가 인도양에 15일간 머물면서 잡은 물고기는 모두 10t가량. 이 중 80% 이상이 고가에 팔 수 있는 황다랑어(참치)였고, 눈다랑어와 새치가 일부 섞여 있었다. 이 중 사람 키보다 큰 청새치는 출항 108일 만에 부산항으로 돌아온 직후 서울의 경무대(현 청와대)로 직송됐다. “우리 어선이 해외에서 직접 잡은 물고기를 구경하고 싶다”고 이승만 대통령이 말해서다.
   
   해무청 수산국 어로과에서는 지남호가 가져온 물고기 중 가장 덩치가 큰 청새치를 얼음상자에 넣고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한편 진상품 이름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진상하는 물고기에 딱히 붙일 한글이름이 없었던 것. ‘참치’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이었다. ‘다랑어’란 말이 있었지만, 일본말인 ‘마구로(眞黑)’나 영어인 ‘튜나(tuna)’라고 더 자주 불렸다. 이제호 지도관은 “어로과에서 격론 끝에 마구로의 ‘참 진(眞)’ 자에 ‘치’ 자 돌림을 붙인 것”이라며 “우리가 주로 먹는 꽁치, 멸치, 갈치가 모두 ‘치’ 자 돌림 아니냐”고 했다. 어종이 다른 다랑어와 새치 간의 구별이 모호하던 시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사람 키보다 큰 청새치를 널빤지 위에 걸어놓고 신기한 듯 바라봤다.
   
   1945년 일제로부터 광복된 지 12주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9주년 만에 벌어진 한바탕 대사건이었다.
   
   
▲ 1957년 지남호에서 잡은 청새치를 보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1968년 남태평양 사모아의 스타키스트 참치가공공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photo 한국원양산업협회

   1960~1970년대 외화획득 1등 공신
   
   1957년 지남호의 인도양 출항을 시작으로 한국의 원양어선들은 5대양 6대주를 누비기 시작했다. 원양어업 역시 대표적인 외화획득 산업이 됐다. 해외에서 잡아올린 물고기는 그 자체가 달러였다. 본격적인 원양수출은 인도양에서 시범조업을 마친 지남호가 1958년 남태평양 사모아에 첫 상업출항에 나서 잡은 물고기를 사모아 현지의 밴캠프사(社)에 넘긴 것이 시초다. 한국원양산업협회에 따르면, 밴캠프사 수출을 신호탄으로 1958년부터 1979년까지 원양어업을 통해 벌어들인 금액만 당시 돈으로 19억9289만달러에 달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동시대에 활약하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국내로 송금한 금액은 약 1억153만달러. 약 20배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돈벌이가 된다는 소문이 나면서 정부와 민간에서는 너도나도 원양어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우선 1963년 정부가 ‘한국수산개발공사’라는 원양 공기업을 세웠다. 초대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만주 육군군관학교와 일본육사 동기인 이한림 장군. 5·16군사정변 때 비밀리에 혁명공약을 인쇄한 광명인쇄소를 운영한 이학수 고려서적 사장도 박 대통령의 배려로 1963년 ‘고려원양’이란 선사를 세웠다. 이학수 사장과 함께 5·16 민간 주체세력으로 혁명거사자금을 댄 남상옥 국제약품 회장은 ‘공성산업’을 세웠다. 이 밖에 4·19혁명 때 치안국장이었던 이강학 고려증권 회장은 ‘원양수산’, 박용학 대한농산(대농) 회장은 ‘고려수산’을 세웠다.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의 선친인 김용주 전남방직(전방) 회장도 ‘대서양어업’이란 원양선사를 세웠다.
   
   이학수 사장을 필두로 바다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출판업자들도 원양어업에 대거 뛰어들었다. 1969년 법문사(法文社)의 김성수 사장은 오양수산(현 사조오양)이란 선사를 세웠다. 동원산업에 이어 국내 2위의 원양업체인 사조산업의 모태 역시 주인용 회장이 운영한 ‘사조사(思潮社)’란 출판사였다. 원양업계의 한 관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학수 고려서적 사장에게 ‘고려원양’ 면허를 내어주면서 원양어업 활성화 방안을 강구해 보라고 지시했고, 이학수 사장이 잘 아는 출판업계 사장들에게 원양어업이 돈이 된다며 진출을 권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외화획득에 목을 맨 박정희 대통령도 원양어업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박 대통령은 1968년 9월 23일 육영수 여사, 영애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남태평양 미국령 사모아를 직접 찾아 원양선원들을 격려했다. 1964년 독일을 찾아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을 격려한 지 4년 만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 각지에 있는 코리아타운도 일확천금을 꿈꾸며 배를 탄 ‘마도로스’들이 개척한 곳이 대부분이다. 냉전시대에는 공산진영 국가의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은 적도 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에 구축된 네트워크는 현지 정보획득은 물론 외교관계 수립에까지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아프리카의 기니(1978년), 기니비사우(1984년) 등이 원양어업을 매개로 우리와 수교한 국가들이다.
   
   1·2차 오일쇼크로 원양어업 분위기가 한풀 꺾인 이후에도 삼호물산 조강호 회장, 인터불고 권영호 회장 등이 원양어업에 계속 뛰어들었다. 삼호물산은 국내 원양생선 유통시장을 장악하면서 원양어선을 인수해 원양어업에 직접 뛰어든 경우다. 먼바다에서 돈을 캐올리는 원양어업은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부산의 선창가에서는 “배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웬만한 집 한 채는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금도 원양선원 중 절반 이상이 부산에 적을 두고 있다. 부산은 일제 중고어선이나 어구(漁具)를 조달하기도 쉬웠다. 당시만 해도 원양어선을 수리할 수 있는 수리조선소도 영도의 ‘대한조선공사’가 유일했다. 일제가 세운 ‘조선중공업’의 후신으로 지금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다.
   
   원양어선들이 전 세계를 누빈 덕에 한국은 세계적인 원양강국이 됐다. 한때 일본에 이어 세계 2위 원양대국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1958년 지남호의 첫 사모아 상업조업 때 무급 실습항해사로 따라갔던 김재철 회장이 1969년 창업한 동원산업은 선망선 19척을 비롯 모두 39척을 보유한 세계 최대 원양선사로 거듭났다. 1982년 국내 최초로 참치캔을 선보였고, 2008년에는 미국의 식품회사 델몬트로부터 미국 1위의 참치캔 기업인 ‘스타키스트’를 인수하면서 세계적인 종합식품기업으로 발돋움했다. 2016년 말 기준 원양어업 생산실적은 45만여t, 수출액은 모두 4억4400만달러(약 5100억원)에 달한다. 60년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변화다.
   
   
   한국인 선원 반토막
   
하지만 원양어업 진출 60년 만에 정세는 급변했다. 원양산업협회에 따르면, 1977년 850척에 달했던 원양어선은 2016년 말 기준 255척으로 줄어들었다. 1977년 미국과 구(舊)소련이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선포한 뒤 연안국들이 이를 경쟁적으로 도입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물고기를 잡을 바다가 사라지니 조업량이 반토막 났다. 12해리 밖에서 잡다가 200해리 밖 심해(深海)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려야 하니 유류비와 인건비 등 조업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대신 물고기 잡기는 어려워졌다. 국내 첫 원양선사로 ‘한국 원양어업의 개척자’로 불리는 심상준 사장의 제동산업과 한때 국내 최대 원양선단을 보유한 이학수 사장의 고려원양은 높은 파고를 넘지 못하고 침몰했다.
   
   1960~1970년대 원양어업 활황기 때 갑부가 된 선사와 선주들도 외도를 많이 했다. 사업 다각화에 주력하면서 무리한 투자를 거듭했다. 소위 ‘문어발식 경영’이었다. 원양수산 이강학 회장은 불탄 대연각호텔을 인수했고, 공성산업 남상옥 회장은 타워호텔을 인수했다. 후발주자인 인터불고 권영호 회장도 옛 대구파크호텔을 인수해 인터불고호텔을 세웠다. 고려수산 박용학 회장은 미도파백화점을 운영했다. 이학만 화양실업 회장, 김원규 울산어분 사장, 주진우 사조산업 회장은 각각 국회의원 배지를 달며 정계로 진출했다. 수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바닷사람들은 사업에 성공하면 뭍으로 올라와 정착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1세대 원양선사 중 동원산업, 사조산업, 한성기업처럼 원양어업을 주력으로 참치캔, 게맛살 등 원양가공품으로 수직계열화에 성공한 업체만 살아남았다.
   
   일이 고된 탓에 요즘은 원양어선을 타겠다는 젊은이들은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한국선원통계연보에 따르면,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바다로 나갔던 원양선원은 2003년 3460명에 달했던 것이 2016년 말 기준으로 1393명으로 반토막 났다. 선원들은 50대 이상이 절반이 넘는 841명에 달할 정도로 고령화가 심각하다. 이 중 60세 이상도 223명에 달한다. 한국인 선원들의 빈자리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 온 선원들이 대신하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에 따르면, 등록된 외국인 선원은 모두 3551명. 이 중 인도네시아가 2223 명으로 가장 많고, 그 뒤를 베트남(641명), 필리핀(511명)이 뒤를 따르고 있다. 육지국가인 중국인 원양선원은 57명에 불과하다.
   
   선장은 한국인인데, 선원은 외국인이다 보니 장기간 고립된 배 위에서 의사소통, 문화 차이로 인한 폭언, 폭력과 같은 인권침해도 빈발한다. 한국은 2014년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의 저개발국가들과 함께 미국과 EU(유럽연합)의 예비 불법어업국(IUU)에 지정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불법어업국에 지정되면 조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1957년부터 만들어온 원양어업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린 판이었다. 다행히 해양수산부와 원양선사들이 부산 기장군 동해어업관리단에 2014년 ‘원양어선 불법조업감시센터’를 설립하고,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15년에야 예비 리스트에서 빠지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대한민국 원양어업 60년은 그렇게 파고(波高)를 헤쳐왔다.
   
조업 기술의 진화
   
   연승어업에서 선망어업으로… 일본보다 전환 빨라
   
▲ 지남호 photo 한국원양산업협회

   원양어업은 60년 만에 기술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1957년 지남호를 타고 인도양으로 참치연승 시범조업에 나섰을 때는 먼바다에서 참치 같은 큰 물고기를 잡아본 선원이 없었다. 하지만 1966년 대서양에 트롤어선으로 진출한 뒤, 1971년에는 참치선망조업까지 개시했다. 연승(延繩)조업은 말 그대로 ‘길게 늘인 낚싯줄’로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낚시에 물고기가 걸리면 쇠갈고리로 찍어올리는 방식이다. 트롤조업은 긴 자루 같은 그물을 바닷물 속에서 ‘끌고 다니면서(trawl)’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일명 ‘저격식 조업’이라고 불린다. ‘선망(旋網)’은 말 그대로 무리 지어 다니는 물고기 떼를 포착한 후 큰 그물로 둘러쳐서 한꺼번에 포획하는 방식이다.
   
   본선을 비롯해 빠르게 그물을 둘러치는 쾌속정, 심지어는 어군을 하늘에서 포착하는 헬기까지 동원되는 까닭에 가장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선진어업으로 불린다. 자연히 유류비 같은 운항비용도 수십 배 많이 들지만 어획량은 연승선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군함에 비교하자면 구축함과 항공모함 정도의 차이다. 한국은 1971년 최초로 선망조업에 나선 뒤 1979년 동원산업이 스페인으로부터 국내 첫 헬기탑재식 선망선 ‘코스타 데 마필호(號)’를 도입하면서 비약적인 진보를 이뤘다. 연승어업에서 선망어업으로의 전환은 원양강국인 일본보다도 훨씬 앞섰다. 지금은 선망선과 연승선의 장점만을 결합한 다목적 선망선을 원양어업에 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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