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지난해 2월 16일 부산 다대항에서 열린 2207t급 참치 선망선 한아라호 출항식에서 자신이 서명한 선명(배이름)을 배경으로 사진을 쵤영했다. ⓒphoto 동원그룹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지난해 2월 16일 부산 다대항에서 열린 2207t급 참치 선망선 한아라호 출항식에서 자신이 서명한 선명(배이름)을 배경으로 사진을 쵤영했다. ⓒphoto 동원그룹

1957년 10월 5일은 우리나라 원양어업 60년사에서 의미가 남다른 날이다. 이날 대만 지룽(基隆)항에는 우리나라 원양어선의 원조(元祖)로 평가받는 지남호가 기항했다. 그해 6월 29일 부산항을 출발했던 지남호는 인도양에서 시범적으로 도전해본 참치 연승(延繩) 조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귀항하는 도중 잠시 지룽항에 들렀다.

그런데 이날 우연히 지룽항에는 부산수산대학 실습선 홍양호가 정박해 있었다. 홍양호에는 외국 한번 나가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 한국 역사상 최초의 원양 실습을 나온 수산대 어로학과 54학번 졸업생 48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의 우연한 조우에 대해 부산수산대학이 2011년 발간한 ‘어업학과 70년사’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57년에는 다랑어 연승어선이 인도양에 시험 출어해 성공함으로써 동년을 원양어업 원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와 때를 같이해 부산수산대의 원양 실습이 개시되었던 것으로 그 의미가 컸던 실습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원양어업의 시동을 걸던 참치잡이 시범선과 대한민국 원양어업의 미래를 짊어질 예비 선장들과의 만남이었던 셈이다.

무급 임시직으로 참치잡이배를 타다

이 역사적 만남의 현장에 수산대 4학년생 김재철이 있었다. 이듬해인 1958년 1월 수산대를 졸업한 김재철은 대만에서 조우했던 지남호를 타고 남태평양 서사모아로 진짜 참치잡이를 떠났다. 1년간의 실습항해사라는, 남들이 보기에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무급 임시직을 자청해가며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용 참치잡이선에 오른 것이다. 수산대를 졸업하면 이등항해사 자격증을 가질 수 있던 시절에 그는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며 꺼리던 남태평양 참치잡이를 경험하기 위해 무급직이라도 좋으니 배에 태워달라는 간청을 했다.

대한민국 원양어업 60년사는 동원그룹 김재철(82) 회장의 60년 삶과 그대로 겹친다. 김재철을 빼놓고는 우리나라 원양어업사를 얘기하기 힘들다. 그는 맨손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원양어업 도전사의 1막1장을 장식했고, 스스로 원양어업 성장사를 써왔다. 대한민국 원양어업은 김재철이라는 엔진을 달고 세계 정상을 향해 질주해왔다.

기업인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성공 스토리를 써왔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일대기에는 항상 혁신과 도전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1969년 자신의 신용만을 담보로 도입한 참치잡이선 두 척으로 시작한 회사를 30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키워낸 원동력이 혁신과 도전에 있다는 의미다.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창조적 파괴’라는 말로 유명한 경제학자 슘페터는 단순한 경영자와 혁신적인 기업가를 구분한다. 슘페터에 따르면, 기업가는 일상적 업무만을 수행하는 경영자와 달리 ‘새로운 결합’을 수행한다. 슘페터가 강조한 ‘새로운 결합’이란 △소비자들이 아직 모르는 재화 또는 새로운 품질의 재화 생산 △해당 산업 부문에서 알려지지 않은 생산 방법의 도입 △새로운 판로의 개척 △원료 혹은 반제품의 새로운 공급 △새로운 조직의 실현 등인데 김재철의 경우 이 다섯 가지에 대부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2016년 ‘김재철 평전’을 펴낸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의 분석을 보자. 공병호 소장은 ‘김재철 평전’에서 김 회장이 이룬 다양한 경제·경영사적 의의 중 하나로 ‘새로운 단백질 공급원의 제공자’를 꼽는다. 김 회장이 1982년 시작한 참치캔 사업은 참치라는 새로운 단백질 공급원을 대중화하면서 대한민국에 5000억원대의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선장 시절 자신이 잡은 참치를 납품했던 미국의 참치캔 1위 업체 스타키스트를 2008년 인수하며 단숨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쾌거도 이뤘다.

1968년 고려원양 수산부장 시절의 김재철 회장.
1968년 고려원양 수산부장 시절의 김재철 회장.

의지로 일궈낸 참치 선망업 도전기

혁신가로서의 그의 진면목은 슘페터가 강조한 새로운 생산 방법의 도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참치잡이 실력을 자랑하던 ‘캡틴 김’에서 출발한 그의 원양 도전사는 항상 현장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고기잡이 현장에서 실제 벌어지는 일을 꼼꼼히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경험에 기반한 새로운 조어법을 잇달아 선보였고 이것이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그는 초기 참치잡이 방식인 연승어법에 혁신을 가져왔다. 연승어법은 한 가닥의 기다란 모릿줄(메인 라인)에 일정한 간격으로 단 가짓줄(브랜치 라인) 낚시로 고기를 낚는 오랜 어법인데 김재철은 여기에 탑재모선식(搭載母船式) 방식을 최초로 도입했다. 이는 모선이 소형선인 ‘캐치보트’를 탑재하고 다니다가 어군을 발견하면 캐치보트가 떨어져나가 낚시를 바다에 던지고 이를 모선에서 감아올리는 방식이다. 기존 모선 한 척 때보다 더 많은 낚시를 놓을 수 있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다.

그가 참치잡이에서 이룬 최대의 혁신은 ‘참치잡이의 꽃’으로 불리던 선망어업을 개척한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참치 선망업은 큰 모선에 3~5척의 소형 모터보트와 어군 탐지용 헬리콥터를 싣고 다니다가 참치 떼가 나타나면 모터보트가 그물로 고기 떼를 둘러싼 다음 모선이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거대한 참치 떼를 일시에 포획해야 하기 때문에 군사작전에 버금가는 일사불란함이 필요하고 상당한 자본과 경험이 요구된다. 연승어업의 경우 25명 정도가 승선해 1년에 200~300t가량을 잡는다면 선망업은 같은 인원을 투여해 1만2000~1만5000t을 잡는다.

노다지를 약속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까지 참치 선망업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일본도 노동집약적인 연승어업을 탈피하기 위해 1960년부터 10년 이상 4대 수산회사가 공동으로 선망업 시범 조업을 했지만 미국의 노하우를 얻지 못해 실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 김재철이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당시 그는 동원산업 1년 매출에 해당하는 400만달러 이상을 선망업에 투입했고 몇 번의 실패로 280만달러의 손실까지 봤다. 자칫 실패하면 10년간 일군 회사가 도산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국인 선원을 전부 한국 선원으로 교체한 후 직접 배에 올라 30일간 선원들과 동고동락한 끝에 참치 선망업에 성공했다.

그는 새로운 시장, 새로운 생산방식 외에 새로운 어장도 끊임없이 일궈냈다. ‘평전’에 따르면, 그는 평생 “다른 어장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는 남획에 시달리던 남태평양 대신 창업과 동시에 인도양 참치 어장을 개척했고, 북태평양으로도 눈을 돌려 명태 트롤어업을 시작했다. 우리 식탁을 풍성하게 만든 북태평양 명태잡이뿐 아니라 동해와 사할린 인근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오징어 채낚기 어업도 그가 개척자다. 참치잡이가 잇달아 성공을 거두는 와중에도 그는 포트폴리오를 염두에 두고 어선을 동해로, 북양으로 띄웠다.

“본업을 버리는 자는 망하고 본업만 하는 자도 망합니다. 또 평균 풍속보다 순간 풍속은 훨씬 빠릅니다. 1t을 견뎌야 한다면 5t을 견딜 수 있게 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회사 역시 미리 위기를 준비해야지, 위기가 왔을 때는 이미 늦습니다.”

‘평전’에 소개된 김재철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자신의 이 지론대로 1·2차 오일쇼크,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 선포 등 몇 번의 위기를 넘기며 회사를 키워냈다. 현 시점에서 그의 성취가 각별해 보이는 이유를 공병호 소장은 이렇게 썼다.

‘바다를 상대로 하는 사업은 육지의 사업보다 더 투기성이 강하고 부침이 심하며 체계화하기가 힘들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재철은 주력사업의 심화(관련 사업 다각화)와 확산(비관련 사업 다각화)을 통해 건실한 그룹을 일구어낸다. 수산업을 모태로 사업을 시작한 이들 대부분이 무대에서 사라진 데 반해 그는 수산업을 넘어서 종합식품업체를 탄생시킨다. 또한 금융업에서도 기회를 포착해 사업화에 성공한다.’

여전히 미래는 바다에 있다

공병호 소장이 지적했듯이 수산업 무대에서 활약했던 그의 경쟁자 대부분은 이미 도산하거나 퇴출됐다. 한국원양산업협회에 따르면, 김재철 회장이 창업하던 1969년 20척 이상의 선박을 보유한 원양업체는 모두 3개였다. 이 숫자는 1978년에는 11개로 늘어난다. 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현재는 동원산업과 사조산업 2개 업체만 남아 있다.

김재철 회장의 40년 지기인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평전’에서 “김재철 회장은 한국 근대경제 성장사를 이끌었던 사업가 가운데서 1.5세대나 2세대 사람이지만 가장 1세대적인 특징을 지닌 분입니다. 1세대 사업가의 특징은 강한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대로 그가 사업을 빠른 속도로 확장해나가던 1970년대의 성취는 그대로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었다. 단적으로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동원산업의 외화획득률은 100%에 가까웠다. 바다에서 잡은 참치를 거의 전량 해외로 수출했다는 의미다. 당시 기여를 공병호 소장은 이렇게 분석한다. ‘김재철이 참치잡이로 벌어들인 1970년과 1975년의 수출액은 각각 94만8700달러, 147만5764달러이다. 1년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1인당 송금액이 1100달러 수준임을 가정하면 김재철은 1970년에 862명, 1975년에 1341명 몫의 외화를 벌어들인 셈이다.’

그가 이룬 성취가 일관된 철학의 소신이라는 점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전남 강진 중농(中農) 집안 7남4녀 중 장남이 바다에 인생을 건 것은 강진농고 시절 만난 스승 덕분이었다. 강진농고 시절 그를 가르쳤던 최석진 선생은 그가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3학년 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내가 너희들이라면 바다로 가는 길을 선택하겠다. 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가 세계 1등 국가가 되고 못 되고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바다 개척에 뛰어드는가에 달려 있다.” 친구들과 함께 들은 말이지만 그에게는 선생님의 이 한마디가 인생 철학이자 좌우명이 됐다.

서울 서초구 양재천가에 세워진 동원산업빌딩 18층 그룹 회장실 벽면에는 통상적인 지도에서 보던 유라시아 대륙의 위와 아래가 뒤집힌 지도가 걸려 있다. 세계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반도가 대륙 끝에 매달린 작은 반도가 아니라 태평양으로 향하는 천혜의 부두이자 전략적 요충지라는 김재철 회장의 지론을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한국원양어업 60년, 파도를 헤쳐온 기업가에게 바다는 여전히 인생과 사업의 교과서다. 김 회장은 지난해 3월 동원그룹 창사 47주년을 맞아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게 있어 경영이란 항해의 연장이었어요. 대양을 항해하는 선장이 가장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뭔지 아세요? 지금 내 배가 어디에 있는가, 배의 위치를 아는 겁니다. 그래야만 목적지를 향한 정확한 코스를 결정할 수 있어요. 기업이라는 큰 배를 이끄는 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현재 위치에 대한 정확한 판단입니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살 수 있어요.”

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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