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학회장 시절이던 2014년 한 세미나에서 축사하는 유의선 이화여대 교수. ⓒphoto 뉴시스
한국방송학회장 시절이던 2014년 한 세미나에서 축사하는 유의선 이화여대 교수. ⓒphoto 뉴시스

“언론노조의 비상식적인 횡포 때문에 사퇴했습니다. 언론노조는 자기 팀이 있지 않습니까. 진보언론들이 하나의 팀이죠.”

지난 9월 1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포스코관 정책과학대학원장실에서 유의선(60)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학과·미디어학부 교수를 만났다. 2015년 8월부터 약 2년간 공영방송 MBC의 관리감독기구이자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이사직을 맡아온 유 교수는 지난 9월 8일 방문진 이사직을 사퇴했다. 사퇴하기 전 주어졌던 임기는 내년 8월까지였다. “난 이미 떠난 사람이고, 쓸데없는 정쟁(政爭)의 소지가 된다”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던 유 교수를 설득해 마주 앉았다.

양대 공영방송 MBC와 KBS는 지난 9월 4일부터 파업 중이다. 기자, PD, 아나운서 등 각 사의 주요 직군을 망라한 파업 인원의 규모는 MBC 약 2000명, KBS 약 1500명에 달한다. 이들은 김장겸 MBC 사장, 고대영 KBS 사장 등 양사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과거 정권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던 기자·PD들을 비제작부서로 전출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다.

MBC 사장을 포함한 경영진의 임면권은 방문진 이사회가 의결을 통해 행사한다. 방문진은 MBC의 독립성,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특별법(방문진법)에 따라 세워진 기구로, 총 9명의 이사 중 구 여권(현 자유한국당·바른정당)의 추천으로 임명된 이사가 6명(고영주 이사장 포함), 구 야권(민주당)의 추천으로 임명된 이사가 3명이다. 이 중 구 여권 성향의 유의선 교수가 이사직에서 사퇴하면서 현 방문진 구도는 5 대 4로 재편됐다. 보궐이사의 추천권은 현 여당(민주당)이 가진다.

유 교수는 최근까지도 방문진 이사직을 지키겠다는 의사를 고수해왔다. 지난 4월에는 미디어워치에 “진보언론 ‘한 놈’ 손보기 굴복 않겠다”는 제목의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왜 이사직 사퇴를 결심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저는 보수적인 학자입니다. 제가 지향하는 가치는 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학생들이에요. 그런데 교권이 망가질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 왔어요. 언론노조는 굉장히 전략적입니다. 언론노조에 속한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일차적으로 저를 비방하고, 미디어가 짜깁기한 내용에 재학생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반론을 제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저한테 배운 제자들이 학교에 찾아와서 ‘이거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만 매번 일일이 만나서 설명할 수도 없고요. 결국은 학교에서도 언론노조가 원하는 대로 되겠구나, 교권침해가 구체화될 수 있겠구나 하는 직감이 왔죠.”

실제 유 교수는 9월 8일 사퇴할 때까지 미디어오늘, 미디어스 등 인터넷 진보언론과 언론노조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려왔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으로 지난해 9월 명예훼손 민사소송 1심에서 3000만원 배상 판결을 받은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을 비롯해 구 여권 성향의 방문진 이사 6인 모두가 비판 대상이 되어왔지만 그중에서도 유 교수는 특히 날 선 비판을 받아왔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8월 16일 미디어스의 ‘방문진 유의선 이사가 고소·고발 당하는 사연’ 보도다. 미디어스는 언론노조가 공개한 지난 2월 방문진 이사회 속기록을 인용해 “유 이사가 권재홍 당시 MBC 사장 후보자 면접에서 노조탄압 방법을 묻고 조합원 업무 배제를 거들었다”고 보도했다. 유 교수는 이에 대해 “발언 일부만 짜깁기해 왜곡한 사례”라며 “노사 대립이 극심한 MBC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MBC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현상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사장 후보자의 의견을 물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유 교수는 앞서 지난 8월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로부터 방송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영주 이사장, 김장겸 MBC 사장 등과 함께 검찰에 고소당한 상태다. 이에 대해 그는 “이 고소도 짜깁기로, 엉터리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며 “엉터리지만 학교에 폐를 끼칠 수 있으니 대학원장직을 내려놓겠다고 얼마 전 총장에게 얘기했는데 총장이 자체 조사 후 대학원장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자신을 향한 비판이 특히 맹렬했던 이유에 대해 “다른 분들은 자유업에 가깝고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봤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언론법 전문가고, 다른 이사들과 달리 공격이 제기되면 반박을 했기 때문에 특히 공격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국내 방송 3대 학회 중 하나인 한국방송학회 회장을 지낸 유 교수는 언론법을 전공하는 학자라는 위상 때문에 방문진 구 여권 이사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사퇴 의사를 밝히기 전날까지도 구 여권 성향 이사들의 만류가 상당했다고 한다. 현재 유 교수가 재직 중인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학과에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부인인 김훈순 교수도 재직하고 있다.

“그쪽에서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은 못 짓겠지만, 이런저런 얘기들이 저한테도 들려왔죠. 예를 들면 파업한 사람들이 학교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다든지, 제가 대학원장이라 외부 발표를 많이 하는데 그럴 때 졸업생을 동원해 모욕을 준다든지요. 제 대학교 동창 등 지인들을 통해서 압력을 가하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했던 일이고요.”

“나머지 다섯 명은 끝까지 갈 것”

현재 5 대 4로 재편된 방문진 이사 구도에서 구 여권 성향 이사가 한 명만 더 사퇴한다면 구 여권 대 구 야권 구도가 4 대 5로 변하면서 현 김장겸 MBC 사장을 해임할 수 있게 된다. 이미 다음번 ‘자진사퇴 목표’로 지목되는 구 여권 성향의 이사도 있다. 목원대 총장을 지낸 김원배 이사다. 김 이사는 목원대 총동문회로부터 지난해 9월 업무상 배임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한 상태다.

방문진 이사 교체를 두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언론계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을 강조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방문진 이사 교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이다. 앞서 지난 9월 8일 조선일보는 “민주당이 KBS·MBC 등 공영방송을 ‘언론 적폐’로 규정하고 사장과 이사진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 등 시민단체 중심의 범국민적 운동을 추진하자는 내부 문건을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 문건에는 “야당 측 이사들에 대한 면밀한 검증을 통해 개인 비리 등 부정·비리를 부각시켜 이사직에서 퇴출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유 교수는 이에 대해 “(해당 문건은) 사실이라고 본다”며 “9월 4일 저녁까지 3대 학회가 ‘공영방송 정상화’와 관련해 학회원들로부터 서명을 받은 일은 학회, 언론노조만이 아니라 이들 위에 컨트롤타워가 있고 조직적 움직임이 이루어진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유의선 교수는 사퇴 전날인 9월 7일 구 여권 성향의 이사 5명을 만났다. 그는 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다섯 분은 끝까지 가시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그 자리에서 사퇴 결심을 굳히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 교수가 사퇴한 당일, 나머지 이사 5명은 성명을 내고 “명백한 외압이자 자유 언론에 대한 탄압 결과”라며 “국민이 부여한 임기와 책임을 결단코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 교수는 “언론노조와 방송사 파업 세력 측의 기세가 올라가지 않겠냐”는 질문에 “나머지 이사들에게 사안에 대한 법리 해석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달라고 말했다”며 “2선에서 제 역할을 하겠다”고 답했다. “이분들은 저와 같은 특수한 환경이 아니에요. 다 자유업이거든요. 그리고 야권에서도 이제 방문진 이사들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을 거고요. 이제 까딱 잘못하면 MBC가 넘어간다는 걸 알기 때문에 똘똘 뭉쳐 있습니다. 나머지 이사들은 내년 8월까지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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