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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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학 전 육군 3군사령관(육사 37기·대장)은 2017년 8월 40년간의 군생활을 마쳤다. 엄 전 사령관은 군 복무 중에도 ‘전역 후에 군 관련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왔다. 실제로 그는 방위산업체나 대형로펌이 아닌 ‘월드투게더’라는 국제개발협력 NGO단체의 회장을 맡아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박노숙 전 육군 중장이 2005년 초대 회장을 맡은 월드투게더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직업학교 운영, 의료지원 등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업은 에티오피아의 6·25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후원이다. 박 전 중장이 우연히 에티오피아를 갔다가 그곳의 6·25 참전용사들을 보고 지원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지금의 월드투게더가 되었다.

엄기학 전 사령관은 지난 2월 전임 회장이었던 김요환 전 육군참모총장의 후임으로 신임 회장에 취임했다. 엄 회장은 박지만 EG 회장, 박찬주 전 육군 대장, 신원식 전 육군 중장 등과 생도 시절을 함께 보낸 육사 37기다. 그는 “주목을 많이 받던 기수이다 보니 오히려 바로 위 선배들에게 자주 혼이 나곤 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엄 회장은 군 시절 합참 작전부장 및 작전기획부장, 1군단장, 합참작전본부장 등을 맡으며 육군 내 대표적인 ‘작전통’으로 통했다. 4성 장군에서 후원금을 걱정해야 하는 NGO단체 회장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소감이 궁금했다. 지난 5월 23일 서울 마포구의 월드투게더 사무실에서 엄 회장을 만났다.

엄 회장은 “사실 회장직에는 봉급이나 활동비 같은 게 없다. 원래 전역하고는 그냥 마음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군 선배들이 이런 좋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사실상 ‘반강제’로 시작하게 됐다”며 웃었다.

엄 회장은 군 시절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지휘관’으로 잘 알려졌다. 지휘관 시절 그를 옆에서 보좌했던 운전병, 공관병들과는 지금까지 연락하며 지낸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장병들 사이에서 ‘빵 사모’로 유명했다. 주말마다 빵을 몇 봉지씩 가득 사와 위병소에서부터 병사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리더십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리더가 되자’였다. 차량이 잘못해서 교통사고가 나고 탄약이 잘못해서 총기사고가 나는 게 아니듯, 훈련이든 전투든 결국 모든 운용과 책임은 사람이 맡는다. 우리나라는 정치판부터 ‘나랑 다르면 틀린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군에서도 아랫사람이 잘못하면 ‘너 이 자식’ 하고 야단부터 치려 한다. 그럴 게 아니라 대화를 통해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그가 말하는 리더십은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에게 “군대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곳이지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곳이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다.

“군대는 민주주의라는 국가의 이념을 지키는 방패막이가 되는 집단이다. 소대장이 ‘돌격 앞으로’ 명령 내리는 게 어떻게 ‘민주적’일 수가 있겠나. 다만 평상시에 소통이 잘 되어 있으면 병사들이 지휘관에 대해 ‘저 사람 말만 믿고 따르면 되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군 밖에서 장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늘 곱지만은 않다. 한국 사회의 군인에 대한 존경심이 상대적으로 박하다는 목소리도 많다. 엄 회장은 “모든 조직이 공과가 있겠지만, 지금 군이 국민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민주화 발전에 역행을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인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하지만 6·25전쟁 때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고, 군 출신이 집권을 해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잘살게 되는 등 긍정적인 요소도 분명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불신이 자칫 민·군(民軍) 간의 갈등으로 번질 것을 염려했다.

“과거에 우리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는 ‘장군들이 모든 걸 빼돌리고 있다’는 불신이 많았다. 그렇지 않은 장군들이 더 많은데, 일각에서 그 불신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었다. 군은 사기를 먹고사는 집단이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군대는 국민의 성원이 없으면 절대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군대는 국민의 지지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북한이 대표적이다. 민과 군을 이간시키면 결국 득을 보는 건 저 위의 집단(북한)이다. 물론 잘못된 부분을 밖에서 잡아줄 필요도 있다. 다만 그 잘못이 전체인 양 침소봉대하는 건 모두에게 좋을 것이 없다.”

이 대목에서 엄 회장은 설명을 덧붙였다.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갈등을 조장한다. 그 첫 번째가 동맹 간의 균열, 바로 한·미 간의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한·미 관계가 그저 좋을 줄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민·민(民民) 간의 갈등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 이념의 갈등, 지역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등 잘 보이지 않는 갈등을 계속 야기한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건 민·군 간의 갈등이다. 우리가 6·25 때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다시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도 군 내 공산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수권자에 군의 입장 명확히 전달해야

엄 회장과의 대화는 자연히 현재 군에 대한 걱정으로 흘렀다. 그는 말을 아끼려 애썼다. “괜히 정치적인 발언으로 비쳐져서 후원금 끊기면 안 되니까”라며 웃었다. 그는 ‘후배들이 알아서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듯했다. “나한테 배운 후배들이 이제는 각자의 방식으로 해나가면 되는 것이지, 내가 굳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다만 그는 본인이 충실하려고 했던 군의 기본을 강조했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훈련이다. 상황과 여건이 변화했다 할지라도 훈련은 강하게 시켜야 한다. 부대와 개인의 능력에 맞추되, 각자 맡은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제대로 갖출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부하들과 병사들에게 항상 말했던 것이 ‘총구의 방향을 명확히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군인에게 첫 번째로 중요한 필승의 의지다. 이 의지가 흐트러지면 총구가 나한테 오고 전우한테 가게 된다. 두 번째로는 체력과 사격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군인이 민간인과 달라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능력이다.”

“그런데 요즘 군은 훈련을 줄이고 있는 추세 아닌가”라고 물었다. 엄 회장은 “군은 통수권자의 지침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이지만 현재 상황이 어떤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군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할 수도 있어야 한다”며 “이순신 장군이 열두 척의 부족한 배로도 전투에 이겼듯, 현역 군인들도 여러 제약이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그에 대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다만 한·미 연합훈련 같은 경우, 우리는 같은 사람이 쭉 임무 수행을 하는 반면 미군은 1~2년마다 본국으로 돌아가니까 훈련 기법 등이 잘 전수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은 있다”고 했다.

엄 회장은 지난 5월 27일 에티오피아로 회장 취임 후 첫 출장을 떠났다. 월드투게더가 설립한 기술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엄 회장은 “내가 군 생활하며 얻은 보람과 성취를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맡게 된 일”이라고 했다.

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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