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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쟁]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의 ‘위안부’ 재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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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79호]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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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반일 종족주의’ 이영훈의 ‘위안부’ 재반론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반일 종족주의’ 대표저자 겸 편집자 

이 글은 ‘반일 종족주의’(미래사·2019년 7월)의 위안부 서술에 관한 이선민(주간조선 2019년 9월 2일자)과 윤명숙(한겨레 2019년 9월 5일자)의 비판에 대한 필자의 반(反)비판이다. 우선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한국인의 일반적 인식이 어떠한지를 수년 전의 영화 ‘귀향(鬼鄕)’을 통해 소개한다. 1943년 경남 거창의 어느 평화로운 마을이다. 갑자기 일본군이 어느 농가에 들이닥쳐 14세 소녀를 끌고 간다. 소녀의 부모는 땅을 치고 통곡한다. 소녀는 경기도 가평 등 다른 데서 끌려온 소녀들과 더불어 트럭과 기차에 실려 만주 길림성 어느 일본군 부대의 위안소로 간다. 소녀들은 형무소와 같은 시설의 각 방에 감금된다. 방에 들어온 일본군은 소녀를 때리기부터 한다. 그러고선 소녀를 벗기고 강간한다. 소녀들의 얼굴과 신체 곳곳에는 언제나 피멍 자국이 가득하다. 어느 날 일본군은 소녀들을 총살한다. 이유는 없고 그저 상부의 지시라고 한다. 그리고 시신 더미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소녀가 있다. 거창과 가평에서 끌려간 두 소녀이다. 어느 악독 일본군이 두 소녀마저 죽이려 총을 쏘자 거창의 소녀가 가평의 소녀를 감싸 대신 죽는다. 살아남은 가평의 소녀는 늙어서 북한강 어느 당산나무 아래에서 벌어진 굿판에서 무녀(巫女)의 몸을 빌려 현신한 거창의 소녀를 붙들고 통곡한다. 그렇게 원한을 달랜 거창 소녀의 혼은 고향을 찾아 부모를 다시 만난다. ‘귀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 언저리에서 명확해진다. 이 나라는 그렇게 억울하게 끌려가고 강간당하고 학살당한 원혼이 맴도는 곳이다.
   
   이선민씨는 조선일보의 유명한 기자이다. 윤명숙씨는 위안부 연구의 최고 전문가이다. 두 분 다 영향력이 있는 지식인이다. 두 분에게 묻는다. 위 영화는 진실인가 허구인가. 영화 시작부의 자막은 영화가 원 위안부의 증언에 기초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대로인가. 필자는 에둘러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저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 한 성현의 말씀을 믿고 평생 연구실을 지켜온 사람이다. 필자는 위 영화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이래 팽배한 종족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기억이다. 일정기를 몸으로 겪은 세대에게는 없던 기억이다. 그들이 물러가고 해방 후 세대가 정계·학계·문화계의 주도세력이 되자 새롭게 지어낸 기억이다.
   
   
   “더러운 종족주의”
   
   새롭지만 철저히 전통적이다. 자연종교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인간의 영혼은 죽어서도 안식하지 못한다. 지배와 예속, 양반과 상놈, 원한과 증오가 저승으로까지 이어진다. 원혼은 무녀의 몸을 빌려 생자와 통곡으로 대화하며 살풀이춤으로 해원(解冤)한다. 그 전통적 정신세계를 오롯하게 재생한 것이 영화 ‘귀향’이다. 철저하게 종족주의적이다. 종족주의는 외래 침입자의 폭력에 무기력하다. 외동딸을 끌고 가는데 부모는 그저 땅을 치고 통곡만 한다. 낫이나 곡괭이를 들 줄도 모른다. 필자는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연출해온 이와 유사한 장면을 ‘더러운 종족주의’라고 질타하였다. 그러한 기억은 1940년대 농촌사회에서 전개된 친족을 단위로 한 공동체적 삶의 실태와 동떨어진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그들의 조상을 무기력한 종족으로 모욕하였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필자는 이 같은 한국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였다. 우리의 전통과 외래 문명이 접합하면서 만들어낸, 시기에 따라 변천해온, 정신세계의 구조와 특질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래서 ‘종족주의’라는 화두를 통해 지난 세월 한국의 민족주의가 개발해온 여러 상징을, 그 토테미즘을 비판적으로 해부하였다. 물론 필자는 이 같은 필자의 주관적 집필 의도가 그대로 독자나 평자에 의해 존중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 점을 전제하더라도 이번에 이선민과 윤명숙 두 분이 제기한 비판은 솔직히 말해 너무 메마르다. 사료를 놓고 함께 읽으면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의 문제들이다. 두 분은 위안부 문제를 이끌어온, 또는 그것을 통해 형성된, 한국 현대문명에 대한 성찰을 결여하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여전히 일본을 향하고 있다. 우리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에 관한 필자의 문제제기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이선민 기자는 감언이설에 속아 위안소로 간 여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필자의 주장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1916년 이래 유곽의 창기가 된 여인을 포함하여 1937년 이래 일본군 위안소의 위안부가 된 여인의 대부분은 근대 민법, 가부장 권력, 가난, 공창제가 극빈 계층 가정의 딸들에게 강요한 슬픈 운명의 희생자였다. 그들의 상당 부분이 속아서 유곽이나 위안소로 간 것은 사실이다. 이선민 기자가 주목한 1944년 버마의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미군의 심문기록은 그 점을 사실대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위안부로 전락한 여인들의 이후 삶은 어떠하였던가. 미군의 심문기록은 그에 대해서까지 자세하게 전하지만, 이선민 기자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화 ‘귀향’이 묘사한 대로 감금되고 강간되고 학살되었던가. 아니면 주어진 제도와 환경에 적응하면서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의지적 삶을 살았던가. 사람마다 차이는 다양하겠지만, 필자는 후자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 이선민 기자는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 영화 ‘귀향’의 한 장면.(왼쪽) 동남아 일본군 위안소의 실태를 전하는 박치근의 일기(1943~1944).

   공창제하의 유곽과 위안소
   
   필자는 이 기자에게 공창제하의 유곽이 어떤 곳인지부터 다시 고찰하라고 권하고 싶다. 유곽이나 위안소나 영업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관련 규정을 읽으면 유곽은 업자가 창기에게 영업 장소와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다. 관련 규정은 창기 스스로가 소영업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제도와 현실의 괴리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구조를 부정할 수 없다. 창기들은 조합을 결성했으며, 조합비를 납부하였다. 홍수라도 나면 조합장의 이름으로 의연금을 냈다. 창기들을 성노예라고 규정해서는 곤란하다. 위안소의 위안부도 마찬가지이다. 중국 화북의 조선인 사회가 편찬한 인명록을 보면 위안소의 여인들까지 성명과 본적을 버젓하게 등록하였다. 왜 그랬던가. 한몫의 인격이고 한몫의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노예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그들은 비록 속아서 왔지만, 전차금(前借金)을 상환하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열심히 살아남았다. 동남아로 간 700여명 위안부의 대부분은 1년 안에 전차금을 상환했으며, 이후 1년간 추가로 노동하고 저축한 다음 조선으로 돌아왔다. 위안소 제도가 그러한 권리와 기회를 위안부들에게 허용하였다. 여러 기록이 전하는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필자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고 한 것이다. 필자는 이선민 기자에게 묻는다. 속아서 갔으면 속절없이 노예로 살다가 소모되어야 마땅했던가. 이 기자는 위안부로의 전락 과정과 이후 전개된 그들의 의지적 삶에 관한, 다시 말해 상이한 국면에 관한 필자의 서술을 한데 묶어서 필자를 비판하고 있다. 속아서 간 여인들에게 어찌 그들의 선택과 의지를 운운할 수 있느냐고 흥분하고 있다. 원래 민족주의자에겐 개인과 그 내면의 주체는 인정되지 않는다. 개인은 민족의 부속품일 뿐이다. 필자는 이선민 기자의 비판으로부터 모든 민족주의자로부터 관찰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확인하고 있다.
   
   윤명숙씨는 훌륭한 연구자이다. 필자는 그의 저서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를 통해 위안부의 모집과정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영화 ‘귀향’에서와 같은 관헌에 의한 납치와 연행은 없었다고 지적한 국내 최초의 연구자이다. 그의 저서와 논문에는 위안부 성노예설에 관한 소개나 비평이 없는데, 이는 그가 신중하게도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해왔다. 필자는 국내의 난폭한 지적 풍토에서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해온 그를 높이 평가해왔다.
   
   그렇지만 이번에 ‘한겨레’에 게재한 그의 글은 필자로선 적지 않은 실망이다. 우선 글 전체의 논조가 너무 모호하다. 몇 차례 읽어도 진의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 필자는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논의하기에 앞서 해방 후에 전개된 한국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 미군 위안부에 관해 먼저 서술하였다. 그것을 두고 윤명숙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는 시선을 국내로 돌리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하고 있다. 해방 후 민간과 미군 위안부의 처지는 일본군 위안부보다 소득수준, 건강상태, 임신위험, 포주와의 관계에서 훨씬 열악하였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가 그에 관해 먼저 쓴 것은 위안부 문제 전반에 관한 우리 한국인의 역사적 성찰을 촉구함과 동시에 그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종사해온 분들에게 그 운동의 도덕적·윤리적 기초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함이었다. 그에 관해 윤명숙은 “일견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건 순서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 내부의 어떤 문제점을 어떻게 지적하느냐의 문제다”라고 일축하고 있다. 필자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민족 내부와 외부의 구분에 따라 위안부의 성격은 차별된다는 뜻인가. 정녕 그러한가.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윤명숙은 일본군 위안부는 고노동·고수익·고위험이었다는 필자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전시기 동남아에서 발발한 인플레이션을 거론하고 있다. 우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음을 지적해둔다. 위안부나 그들의 부모는 업주로부터 대개 1000원에 달하는 전차금을 수령하였다. 동시대 공장 직공이나 하급 공무원의 3년치 연봉이다. 위안부들은 그 전차금을 대개 1년 이내에 상환하였다. 미군의 포로심문기록, 박치근일기, 기타 위안부들의 회고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 위안부가 고수익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윤명숙은 버마의 인플레율은 일본의 1200배였으며, 이에 위안부 문옥주가 버마에서 저축한 2만6000엔은 일본 가격으로 20여엔에 불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버마에서 일본으로 송금한 2만6000엔이 일본에서는 고작 20여엔으로 인출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전시기 일제가 구축한 대동아공영권은 그 말기까지 기축통화 엔과 각 지역통화가 등가로 교환되는 고정환율제를 고수하였다. 윤명숙이 상정한, 각 지역의 인플레율을 고려한 변동환율제는 끝내 실시되지 않았다. 버마에서 송금한 2만6000엔이 일본에서 20여엔으로 인출되었다는 윤명숙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일제는 고정환율제를 고수하는 대신 각 지역에서 일본으로의 송금 및 인출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윤명숙은 1945년 2월 일본에서 설립된 외자금고(外資金庫)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변동환율제의 실시를 위한 기구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으나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외자금고는 각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의 부족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기구인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본에서 시행된 송금과 인출의 제한 정책이 조선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시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할 때 1944년까지 조선에서의 제반 통제정책은 상대적으로 느슨하였다. 각지에서 조선으로 송금된 개인의 영업소득이나 근로소득에 대한 인출 제한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전체 통화량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45년 이후는 파국이었다. 송금과 인출에 심한 제약이 걸렸다고 보인다. 불쌍한 것은 1945년 8월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이었다. 전승 연합국은 일본군이 발행한 현지통화로 이루어진 저축의 인출을 거부하였다. 애써 모은 군표(軍票)는 휴지가 되고 말았다. 이 점을 전제하면서 종합하면 1944년까지 대다수의 위안부는 그들의 고된 노동으로 이룩한 저축을 조선으로 송금하고 조선에서 그것을 액면대로 인출하는 데 큰 애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991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터졌을 때 한국의 언론·학계·운동단체는 위안부와 여자정신근로대를 혼동하였다. 한동안의 혼란 이후 양자는 별개의 사건임이 명백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운동단체는 오랫동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단체명을 고집하였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지금도 일제가 여자정신근로대를 동원한 다음 그 일부를 전선으로 데려가 위안부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슨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 식의 설명이 필요하니까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다. 필자는 그 점을 ‘반일 종족주의’에서 비판하였다. 그에 대해 윤명숙은 “이 교수의 주장은 일부는 타당하나, 일부는 오류이고, 일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모호한 주장은 일찍이 다른 데서 접한 적이 없다.
   
   
   공창제와 국가책임
   
   어쨌든 윤명숙은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충당한 것은 일본이 책임질 국가범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일본군이 영화 ‘귀향’에서처럼 총검으로 소녀를 끌고 간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위안소제 이전의 공창제부터 활동해온 소개업, 다시 말해 매춘시장의 ‘산업체제’를 통해 여인들이 모집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것은 윤명숙의 훌륭한 연구성과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일본이 책임질 국가범죄로서 ‘강제동원’이라고 단죄하고 있다. 필자는 이 언저리에서 심한 모순과 혼란을 느낀다. 그렇다면 1916년부터 있어온 공창제 역시 강제동원으로서 일본의 국가범죄가 아닌가. 그런 주장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위안소 운영에 일본군을 위시한 공권력이 개입한 정도와 유곽 운영에 경찰을 위시한 공권력이 개입한 정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더구나 앞서 이선민 기자에 대한 반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양자의 영업구조는 동질적이었다. 공창제하의 창기나 위안소제하의 위안부나 모두 성노예는 아니었다. 필자는 윤명숙의 연구성과로부터 이러한 추론을 구상해왔다. 그런데 막상 윤명숙의 필자에 대한 비판은 그와 딴판이다. 필자가 아둔해서 그런가. 필자는 윤명숙이 구사한 ‘강제동원’ ‘국가책임’이란 용어에서 심한 혼란을 느낀다. 역사가가 한 시대를 범죄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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