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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인 뉴스]  형제복지원 대출금 수백억은 어디로… 33년 만에 진실 밝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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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608호]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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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형제복지원 대출금 수백억은 어디로… 33년 만에 진실 밝혀지나

▲ 지난 5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현관에 올라가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를 요구했던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씨가 여야의 전격 합의 소식을 듣고 내려와 이채익 미래통합당 의원과 포옹하고 있다. 우측은 과거사법을 중재한 김무성 의원. photo 뉴시스
지난 5월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여야 간사는 20대 국회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법)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세부 내용에 대한 여야의 의견이 달라 통과 여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 부산시 진구 당감동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유린 사건이다. 이곳의 설립, 운영자는 박인근 원장이었다. 당시 형제복지원은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다. 이곳에서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구타로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사회에 알려졌다. 조사 결과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킨 것이 밝혀졌다. 굶기고 구타하고 심지어 암매장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고, 그 결과 12년 동안 531명이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릴 만한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12년이었다. 당시 기자가 월간조선 10월호(‘부산시와 형제복지원의 수상한 동거’)와 2013년 12월호(‘전두환 정권과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검찰 정보보고서’) 기사에서 “형제복지원이 아직도 건재하고, 그 배경에 부산시와의 유착이 있다”는 폭로를 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2016년 사망한 박인근 원장은 당시까지도 건재했었다. 2012년 7월 부산시를 방문해 형제복지원 취재를 할 때 박 원장의 막강한 힘을 직접 겪기도 했다. 당시 부산시 담당직원은 기자가 요청한 자료 목록을 형제복지원에 그대로 넘겼고, 나아가 형제복지원에서 기자에게 압력성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이럴 수도 있나”라는 생각에 당혹스럽던 그즈음, 과거 형제복지원 운영에 관여했던 A씨를 수소문해서 만났다. 그 역시 “청와대에 고발해도 박 원장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래 봐야 소용없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박 원장의 막강한 영향력에 대해 털어놓았다.
   
   오래 접촉해본 결과 형제복지원 운영에 관여했던 이 핵심인사 A씨 역시 피해자였다. A씨는 형제복지원 운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로 처음에는 박 원장의 사회복지 사업이 공익을 위한 일이라 판단했다. 박 원장과 가까운 사이로 형제복지원 일을 시작했으나, 복지원의 ‘실체’를 알게 된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대단한 심적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기자는 지난 8년간 이 인사와 꾸준히 접촉하며 “기자회견을 통해 형제복지원 설립자와 관련된 나머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설득해 왔다. 5월 초 특별법 제정을 앞두고 그를 마지막으로 설득했지만 그는 “자식이 보고 있어 어렵겠다”라며 직접 언론에 나서지는 못하겠다는 심정을 밝혔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그의 증언을 통해 형제복지원의 나머지 숨겨진 얘기를 공개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큰 줄기는 인권유린과 박인근 일가의 재산 축적이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이 아직도 많아 이들을 통한 증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 부산시의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 용역’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일부가 수용자 40여명이 폭행을 당해서 죽는 과정 및 시신처리 과정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사망한 몇 명은 산에 묻었고, 노인들은 방에 묻어 시멘트와 흙으로 덮었다” “때리다가 죽으면 가마니에 돌돌 말아서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둔 모습을 봤다” 등의 증언이 있었다.
   
   기자가 접촉해온 형제복지원 핵심 관계자 A씨의 가장 놀라운 증언은 박인근 원장의 살인 지시다.
   
   - 어떻게 살인 지시를 알게 되었나. “박인근이 직접 나에게 털어놓았다.”
   
   - 살해 방법은. “우선 원생 중에 몇 명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그 다음에 지시를 한다. 상처 없이 죽인다고 들었다.”
   
   - 그것이 가능한가. “송곳으로 뒤통수를 찍으면 가능하다고 들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증언은 지금까지 많았으나, 박 원장이 직접 살인을 지시했다는 근거 자료는 없었다. 아직까지 이 문제가 끝나지 않은 것은 형제복지원 원생의 죽음과 관련해 박인근 원장이 아직 ‘무죄’ 상태이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박인근 원장은 징역 10년과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87년 11월 1차 항소심에서 벌금형이 사라진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1988년 7월 2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형으로 형량이 낮아졌다. 결국 1989년 3월 3차 항소심에서 2년6월형이 확정됐다. 특히 사건의 핵심인 인권유린 부분에 대해 당시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징역 2년6월형은 특경법(업무상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 인권유린과는 관련이 없는 죄목에 대한 것이었다.
   
   
   “장애인이 상품” 복지 비즈니스의 시작
   
   박 원장에게 원생은 무엇이었을까? A씨의 증언에 따르면, 박 원장은 “장애인은 나를 먹여살리는 상품”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1980년대 초까지 고아, 장애인을 돕는 복지사업은 헌신적인 봉사정신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재를 털어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적었다. 하지만 박 원장은 ‘복지사업으로 돈을 버는’ 방식을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만들어냈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이를 가로채는 수법이 대표적이었다.
   
   언론을 통해 사건이 드러나기 전에 박 원장이 운영하던 ‘형제재단’은 생계급여, 교육급여, 운영비, 인건비 등을 부산시로부터 보조받았다. 보조받은 금액만 2007년 9억원, 2008년 9억7000만원, 2009년 9억4000만원, 2010년 10억1000만원, 2011년 11억원 등이었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받아 이를 가로채니 박 원장에게 ‘장애인이 상품’이라는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취재 중에 시 관계자에게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시 복지과에 가까운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복지재단을 사라. 여러 명목으로 돈을 받아 돌려쓰면 된다.” 복지재단을 사고파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지만, 지금도 거래가 되는 것은 이렇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 시작에 박인근 원장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형제복지원 핵심 관계자 A씨는 “박 원장은 함께 운영하던 교회의 수입도 20%는 외환은행 통장에 넣어서 일가친척이 나눠 썼다”고 증언했다.
   
   
▲ 2018년 11월 27일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의 사연을 듣고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날 문 총장은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했다. photo 뉴시스

   공무원에게 준 돈은 장부에 ‘방수’ 기재
   
   아이러니하게도 박 원장에게 과거 형제복지원 원생 중 일부는 부담이 되었다. A씨의 증언이다. “과거 원생 중에 형제복지원에서 돈을 뜯어가는 건달이 많았다. 이런 연유로 박 원장은 건달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얼마씩 주면서 일을 시키는 형태였다. 이리하여 피해자들이 무서워 숨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폭력적 방법과 더불어 형제복지원을 유지한 배경에 공무원들과의 ‘신뢰’가 있었다고 한다. A씨는 “공무원에게 돈 준 것을 절대로 안 불었어. 자기가 죽으면 죽었지 불지는 않았어. 그것이 박 원장이 살아남은 배경이야. 돈 먹고 끝까지 봐준 것이지”라고 말했다.
   
   공무원에게 돈이 오간 상황에 대해 A씨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 돈은 어떻게 주나. “신문에 싼 다음에 검은색 비닐봉지에 넣어서 전달한다.”
   
   - 그 돈의 회계는. “장부에 ‘방수’라고 적는다.”
   
   - 장부는 어디에 있나. “1년이 되면 서류는 모두 땅속에 묻어 버린다.”
   
   - 공무원이 돈을 받으면, 뭐라고 하나. “‘엄마가 아파서 빌려가는 돈이다’ 등 이런저런 핑계가 있었다.”
   
   
   이리하여 박인근 일가는 복지원에 어울리지 않는 수익 사업체인 사상해수온천, 빅월드 레포츠센터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나아가 부산, 울산, 경주 일대에 수백억원대의 부동산까지 취득하게 된다.
   
   이러다 1929년생인 박 원장의 죽음이 임박해지면서 가족들 사이에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박 원장은 3남4녀를 두고 있었다. 박 원장 일가의 재산 빼돌리기 방법에 대한 증언은 이랬다. “일단 법인 명의의 재산을 팔겠다고 신문광고를 낸다. 진짜 파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그 다음에 직원에게 돈을 주고 사는 것처럼 해놓는다. 싸게 팔아 버리고, 후에 가격이 오르면 돈을 남기는 것이다.”
   
   전형적인 명의신탁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여기서도 한걸음 더 나아갔다. 복지원을 아예 깡통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복지재단의 경우 재산을 함부로 팔 수도 없고,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도 없다. 모두 지방자치단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은 박 원장 생전에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부동산을 담보로 수백억원의 대출을 받았다. 부산시로부터 허가를 받은 상태에서 대출이 이뤄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부산시가 처음에는 허락을 안 하다가, 박 원장이 수차례 전화를 해 성사시켰다”는 A씨의 증언이 있다.
   
   
   대출금으로 호주 골프장 구입?
   
   대출금은 수익사업체 공사비로 쓰인 것으로 서류상 되어 있으나 “박인근 일가가 나눠 가졌다”는 것이 A씨의 또 다른 증언이다. 또 “돈의 일부는 호주 골프연습장 구입에 사용되었다. 직원을 거기로 보내 시설 공사까지 시켰다. 한 사람이 1000만원 이상 송금을 하지 못해서 직원 이름으로 보냈다”고 추가 증언도 했다. 결국 껍데기만 남은 형제복지원은 청산 절차를 밟게 되었고, 빠져나간 돈의 흐름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과연 박 원장이 로비만 잘해서 살아남았을까. 그는 나름 독실한 종교인으로 선행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꾸준히 장학금을 주고, 신학대학을 나와 새로 개척교회를 열려는 목사들에게 5000만원씩 나눠 줘서 교회를 차리게 도와주었다.”
   
   그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은 이들은 공개적으로 말은 하지 못해도 그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제복지원 사건의 신속한 해결을 막는 한 원인이 됐다. 실제 부산시 경찰 관계자는 “요즈음의 서울역 앞을 보라. 노숙자가 많아 무섭지 않은가. 당시 부산시 전체에 노숙자가 많았다. 또 워낙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형제복지원에 들어가 사망자가 많았던 측면도 있다”라는 반론도 편다. 이러한 동정 여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제복지원은 끔찍한 실상이 드러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처음 표면화된 1987년에 정리했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6·29 민주화선언을 하는 등 역사가 회오리치던 시기였다. 당시 형제복지원에 대한 수사가 강도 높게 펼쳐지지 못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도 영향을 끼쳤다. 실제 수사 검사에게 “때가 좋지 않으니 기다려라”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향후 형제복지원 관련 과거사법이 통과될 경우, 명백한 사실 확인과 검증이 필요하다. 과거사를 밝히는 것은 미래에 비슷한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과거 정권을 공격하는 도구가 아닌, 진실을 밝히는 과거사법 통과를 기대하는 여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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