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건국은 서기 42년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조에 발행된 두 권의 역사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그렇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밝혀지고 있는 관련 역사적 팩트를 토대로 추론한다면, 가야의 건국 시기는 그보다 100년 이상이나 빠른 기원전 1세기 전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적어도 네 가지 있다.

첫째는 가야 교역대에서 출토되는 화천이 서기 1세기 전반 중 통용된 것이라는 점이다(관련 내용은 지난 회 ‘화폐 사용 뒤에 감춰진 가야의 진짜 역사’ 참고). 가야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일본까지 이어져 있는 이 광대한 교역로에서 서기 14년부터 40년까지 사용되던 화폐가 많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이 시기엔 이 교역로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국가로서 가야의 출발은 그보다 훨씬 앞섰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둘째는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걸쳐서 백두산이 꽤 큰 규모의 폭발을 했었고, 그에 따라 그 폭발의 영향을 받는 부여인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으며, 가야도 그 과정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백두산 폭발 상상도(왼쪽), 백두산 폭발이 낳은 유민의 행렬 모큐멘타리 화면(오른쪽) 출처: YTN, KNN
백두산 폭발 상상도(왼쪽), 백두산 폭발이 낳은 유민의 행렬 모큐멘타리 화면(오른쪽) 출처: YTN, KNN

앞서 만주 평원을 근거로 번영하던 부여인이 기원전 1세기에 대거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이유가 백두산 폭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이 추정이 사실이었음을 최근 일련의 연구결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백두산 화산 문제의 최고 권위자인 부산대학교 윤성효 교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실제로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걸쳐 백두산이 대규모 폭발했던 것이다.

이 폭발은 서기 600년대에서 900년대에 걸쳐 일어났던 백운봉기 폭발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관련 자료도 거의 없다. 규모 면에서 좀 약해서일까? 하지만 만일 폭발이 여름철에 일어났다면 동남풍을 타고 바로 부여 쪽으로 향해서 대흥안령 산맥과 소흥안령 산맥에 막혀 화산재와 배출 가스 등 분화물질이 만주 평원에 축적되게 되므로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었을테다.

과거 백두산이 대규모로 폭발했던 경우를 보면, 그 과정은 강약의 변화를 보이면서 몇 백 년에서 심지어 만 년 가까이 지속되기도 했다.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된 폭발 중 규모가 큰 것이 여름철에 발생했다면, 직접 용암이 덮치는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형적 특성 상 만주평원의 생태계는 치명타를 입었을 거고, 그 영향이 오래 갔을 것이다. 그로 인해 부여인들 탈출 행렬이 상당 기간 이어졌을 것이다.

세 번째 근거는 이 시리즈를 통해 여러 번 언급됐던 박창범 교수의 천문 관측지도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을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 그 일식현상이 기록된 그 시기에 실제로 일어났었는지 확인하는 동시에, 어디서 그 현상이 관측되었는지 추적해서 표시한 이 지도는 우리 민족의 과거에 대해 충격적일 정도로 뜻밖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 일식 기록이 사실에 부합되는지 컴퓨터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그 일식들이 관측되었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상대 신라의 일식 관측지는 가장 뚜렷한 동심원으로, 관측이 약 250년 간 일정한 곳에서 행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2002)
‘삼국사기’ 일식 기록이 사실에 부합되는지 컴퓨터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그 일식들이 관측되었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상대 신라의 일식 관측지는 가장 뚜렷한 동심원으로, 관측이 약 250년 간 일정한 곳에서 행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2002)

고대의 천문관측 중심지는 왕궁이 있었던 도성 등 그 나라 정치경제의 중심지와 일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을 현대적으로 분석, 시각화한 이 지도는, 고구려의 정치경제 중심지는 현 러시아 자바이칼 변강주 및 몽골과 카자흐스탄을 아우르는 지역이며, 백제의 중심지는 요하 유역, 상대 신라의 중심지는 양쯔강 중류, 하대 신라의 중심지는 한반도 남해안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정치경제 중심지가 현 러시아 및 카자흐스탄 영토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다룬 바 있다. 백제의 중심지가 요하 유역이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에서 가야 편 이후에 다루려고 한다. 여기서는 상대 신라의 중심지가 양쯔강 중류로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하대 신라의 중심지도 맥락에 따라 함께 언급하게 될 것이다.

신라의 일식기록 중 상대 신라 시기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라의 역사서에 가야의 천문 기록을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역사기록의 속성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창범 교수 지도의 토대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구성 자체가 추론의 근거가 되어주기도 한다.

천문 기록을 중심으로 보면, 신라본기는 대충 봐도 뚜렷이 구분되는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1단계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202년까지며, 2단계는 202년부터 786년까지, 3단계는 서기 787년부터 935년까지다. 박창범 교수는 1단계를 ‘상대 신라’ 시기라고 부르고, 2단계는 아무런 언급 없이 건너 뛴다. 2단계에는 일식을 비롯한 천문 관련 기록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3단계가 ‘하대 신라’다.

상대 신라 단계의 특징은 일식 및 기타 천문학적 현상에 대한 기록의 비중이 눈에 띠게 크며, 상당히 전문적인 수준을 보인다는 점이다. 반면 그 외 일반적 역사 사건에 대해서는 양적으로 적고 아주 간단한 기록에 그쳐서, 천문기록의 비중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중대에서는 일식 및 기타 천문 현상에 대한 기록이 갑자기 사라진다. 반면 다른 일들은 훨씬 자세하게 기록되기 시작한다.

다시 일식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원성왕 통치기인 787년부터다. 여기서부터 신라본기의 끝까지는 거의 1단계 수준에 육박하게 일식을 비롯한 천문기록이 빈번하게, 그리고 전문적 수준으로 등장한다. 1단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천문 이외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도 자세하게,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식 현상 및 이에 대한 고대사회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한 상상도. 영국화가 존 마틴(1789~1854)의 작품. 출처: 퍼블릭 도메인
일식 현상 및 이에 대한 고대사회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한 상상도. 영국화가 존 마틴(1789~1854)의 작품. 출처: 퍼블릭 도메인

이 이상한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다. 일단 여기서는 ‘상대 신라’ 단계만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고려조인 1145년, 그때까지 전해져 오는 역사기록을 취합해서 편찬된 역사서이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을 때 가야의 역사기록이 승자인 신라인의 손에 의해 훼손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일식 등 천문기록은 중요하면서도 정치적 의미는 없는 사건으로 보아 비교적 손을 타지 않고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해진 기록들을 입수한 고려조의 김부식 또한 천문 현상 기록을 중시했다면, ‘삼국사기’를 쓸 때 되도록 그 부분을 살렸을 것이다.

기원전 54년부터 202년까지 천문기록이 그렇게 해서 크게 망실되지 않고 전해진 것으로 보면, 가야나 신라 중 누군가가 그 시기에 양쯔강 중류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관측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게 신라가 아니라 가야라고 보기 때문에 가야 건국을 그보다 빠른 기원전 1세기 전반으로 추정하는 세 번째 근거가 되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고대 해상국가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또한 가야가 기원전 1세기에 건국되었을 것으로 보는 네 번째 근거로 이어진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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