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하구에 큰 배들이 오가던 가야 전성기의 모습에 대한 상상도. 국립중앙박물관 제작 <가야본성> 전시회 예고 동영상 캡쳐. 이 그림은 현재의 모습을 찍은 사진 위에 CG를 덧붙인 것으로, 실제로 가야시대 낙동강 하구는 훨씬 더 넓었을 것이다. 현재의 김해평야는 조선시대 한랭기를 거치면서 좁아진 낙동강 하류 양안을 일제강점기 동안 간척사업으로 땅으로 메꾼 것이어서, 예전에는 그 부분까지 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하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낙동강 하구에 큰 배들이 오가던 가야 전성기의 모습에 대한 상상도. 국립중앙박물관 제작 <가야본성> 전시회 예고 동영상 캡쳐. 이 그림은 현재의 모습을 찍은 사진 위에 CG를 덧붙인 것으로, 실제로 가야시대 낙동강 하구는 훨씬 더 넓었을 것이다. 현재의 김해평야는 조선시대 한랭기를 거치면서 좁아진 낙동강 하류 양안을 일제강점기 동안 간척사업으로 땅으로 메꾼 것이어서, 예전에는 그 부분까지 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하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대사를 증언하는 고문헌 중 조선시대 이전에 발행되어 전해지는 책은 단 두 권이다. 고려조인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1281년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수십 권의 정사와,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야사의 기록을 갖는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다.

그나마 남은 두 권의 역사서 중 지금까지 정사(正史) 대접을 받은 것은 <삼국사기>뿐이다. <삼국유사>는 최근까지도 진지한 역사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설화적인 대목이 많아서일까? 연오랑과 세오녀, 은혜 갚은 까치… <삼국유사> 중 많은 콘텐츠가 구전 옛날이야기인 것처럼 알려져 왔다.

가야의 역사가 설화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학문적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던 것도 <삼국유사>에만 실려 있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선입견은 지금까지도 작용한다. 2019년 12월에서 2020년 3월까지 진행된,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사 특별전 <가야본성-철과 현>이 개장하자마자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다. “신화를 역사인 것처럼 전시했다”는 것이다. 주최측이 화급히 “먼 옛날 남쪽 바닷가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는 투로 전시해설문을 수정해야 했다. 엄연히 건국 시기가 기록되어, 로마제국이 영국을 정복하고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들어설 때 가야의 역사가 시작됐음이 밝혀져 있는데 말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 건국 시기인 서기 42년에 재위했던 세계의 왕들의 모습을 전하는 이미지들. 왼쪽부터 로마제국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대리석상, 중국 후한(漢) 광무제 초상화, 인도 파르티아 왕조 압다가세스 1세를 새긴 동전 탁본.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 건국 시기인 서기 42년에 재위했던 세계의 왕들의 모습을 전하는 이미지들. 왼쪽부터 로마제국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대리석상, 중국 후한(漢) 광무제 초상화, 인도 파르티아 왕조 압다가세스 1세를 새긴 동전 탁본.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고대의 기록문들에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는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고대인의 사유방식 자체가 현대인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후대로 오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왜곡`변형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삼국유사>만 해도, 구한 말까지 여러 가지 판본이 있었던 것이 다 사라지고, 1907년 일본 교토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된 버전만 현재까지 전해진다.

고대사 기록 중 어떤 대목에 비현실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 기록 전체를 역사적 탐구의 가치가 없는 설화로 간주해야 할까? 그런 식으로 하자면 고대사라는 게 거의 남지 않게 될 테다. 머리가 황소인 괴물 미노타우르스와 엮인 이야기 때문에 미노스 왕에 대한 기록 전체가 부정되어 크레타 문명사의 중요한 부분이 공백으로 남을 것이며,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대목 때문에 신라에 대한 역사 기록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버려져야 할 것이다.

다행히 <삼국유사>는 요즘 점차 그 역사학적 가치를 재평가 받고 있는 것 같다. 설화처럼 보이는기록의 행간에 숨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아내려 한 선지식들의 노력이 있었던 덕분이다. 대표적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을 진지하게 탐구함으로써 가야사를 비롯한 한반도 해양사의 큰 줄기를 살려내기 시작한 포운(包雲) 이종기 선생을 꼽을 수 있다. 또한 뜻있는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그런 작업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 빼는 게 좋을까요? 판단 부탁)

특히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설화적 허구성과 역사적 사실성이 공존하는 대목이 많다.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 얘기만 봐도 그렇다. 공주의 부모가 꿈에서 신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배를 타고 찾아왔다는 부분은 설화 느낌이 있다. (물론 이 정도 설화적 요소는 다른 사회의 고대 역사기록에도 넘쳐난다.) 하지만 그 뱃길이 천리, 만리 등 막연하고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2만5천리”이며, “공주를 수행한 뱃사람의 수가 모두 15명이었는데,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는 포상 규모까지 전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기록을 설화로 단정하고 그 역사적 가치를 묻어버려야 할까?

<가락국기> 중 이 글의 맥락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수로왕과 석탈해가 둔갑술 대결을 펼치는 상황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번역판으로 보자.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수로왕과 석탈해의 대결을 묘사한 현대 벽 부조. 김해시 가야의 거리 소재. 사진 출처: 경남도청 홈페이지
수로왕과 석탈해의 대결을 묘사한 현대 벽 부조. 김해시 가야의 거리 소재. 사진 출처: 경남도청 홈페이지

여기까지는 <삼국유사>의 다른 설화적 기록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위한 전래동화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 콘텐츠다. 가야 이야기 다룰 때 자주 등장해서, 꽤 여러 사람들에게 익숙할 테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便拜辭而出/到隣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王竊恐滯留謀亂/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海奔入鷄林地界)

논리적 인과관계가 선명하고 구체적인 장소와 수치까지 제시되는, 고대 역사기록으로선 상당히 사실적인 서술이다. 하지만 바로 앞의 부분이 갖는 설화적 요소 때문인지, 이 대목은 지금까지 진지한 역사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만 요약해보자. “중국에서 온 배가 정박하는 곳으로 가는 탈해를 보고, 그가 거기 머물면서 반란을 꾀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수로왕이 500척의 배로 뒤쫓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3가지 정보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가야와 중국 사이를 빈번히 왕래하는 배가 머무는 곳이 가야 도성 가까이 있었다는 것, 둘째, 그곳에서 배를 타고 중국 쪽으로 가면 가야에 반란을 도모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 셋째, 수로왕은 한 번의 명령에 즉각 출동할 수 있는 배를 적어도 500척 가지고 있었다는 것.

지금까지 전래동화 수준으로만 간주됐던 수로왕과 석탈해 대결 대목이 당시 동아시아의 물길을 주름잡던 해양대국 가야의 스케일을 언뜻언뜻 보여주는,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시사 포인트가 된다. 가야가 중국에도 본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땅을 두고 최소한 수백 척의 배로 오가던 때의 모습이다. 우리가 고정 관념을 깨고, 역사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통합해서 볼 수 있다면, 이와 비슷한 역사의 증언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테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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